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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54~68) - 도미티안(81~96) - 트라얀(97~117) - 하드리안(117~138) - 마르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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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Hyeon Park

on 16 Ju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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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네로(54~68) - 도미티안(81~96) - 트라얀(97~117) - 하드리안(117~138) - 마르쿠스

[카놋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헨리 4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독일왕)

서임권(교황권)의 반대로 그레고리 7세와 충돌
이유 : 독일 재산 반 이상이 감독과 교회의 소유가 되므로 재산 감독권이 교황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왕의 실권이 약화되므로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 반대파와 결탁

결과 : 그레고리 7세로 부터 출교 당함

제후들의 반대와 그레고리 7세로부터의 출교 명령으로 인하여 헨리 4세는 그레고리 7세가 카놋사에 갔을 때, 알프스를 넘어 카놋사에서 눈 위에서 밤낮 3일 사죄 그러므로 출교 철회 받음(1077년 1월 28일)

출교 철회 받자마자, 제후들에게 보복함. 그결과 다시 교황에게 출교(1080년) 당하나 국민들의 동정을 얻어, 1080년 군대를 이끌로 로마로 쳐들어감.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에 피신하였다가 객사함.
네로(54~68) - 도미티안(81~96) - 트라얀(97~117) - 하드리안(117~138)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 셉티머스 세베루스(205~211) - 막시미어스(235~238) - 데시우스(240~251) - 발레리안(253~260) - 데오클레시안(284~305)
10대박해
도미티안의 형인 티투스 AD 70년 예루살렘 함락(멸망)
사촌여동생인 도미틸라가 기독교인이 된것을 알고 추방하였는데 도미틸라가 죽음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도미틸라를 기념하여 '카타콤'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이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하여 살게 된 카타콤이 되었다.
동로마제국
서로마제국
갈레리우스(시져)
막시미아누스(가이사르)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져(306)
콘스탄티누스 2세 시져(337-361) 324년 로마로 진군하여 황제가 됨.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불림 337년 5월 사망.
1) 313년 막시미아누스와 전투하여 승리(밀비안 다리) 서로마를 정복
313년 밀라노칙령(밀란칙령)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락

2) 321년 교회들에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허락
3) 태양의 날(일요일)이자 기독교의 '첫 날'을 주간 휴일로 정하고 그날은 노동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
동방교회 : 져스틴 마터(유스티누스) , 타티아누스
서방교회 : 제롬, 암브로시우스, 히라리어스
헬라 - 소아시아 : 이레니우스, 힙폴리투스
- 알렉산드리아 : 클레멘트, 오리겐, 판타누스, 디오니시어스
라틴 - 터툴리안, 키프리안
사두정치(2명의 가이사르, 2명의 시져)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 제2의 로마인 비잔티움을 세움
네로시대 박해
원인 : 로마시내 대 화제에 대한 책임(범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움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은 맹수와 사투하고 십자가 형벌과 화형으로 순교함.
순교자 : 베드로와 바울

-네로는 원로원의 결의로 퇴위, 이후 69년 자살
도미티안 박해
1) 황제 예배 불복을 명분으로 하여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이 노하여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난다고 책임 전가.
2)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파괴 이후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강요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발 이에 도미티안은 박해를 시작하였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도미티안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박해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다.
3) 기독교인들을 맹수와 사투하게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추방을 시켰다. 그럼에도 황제의 사촌인 도미틸다가 기독교인이 되는등 많은 기독교인들이 늘어났으며 카타콤이 생겼다.
4) 예루살렘 멸망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강요
5)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 됨.
6) 말년에는 교회의 핍박을 중단하고 추방당한 교인들에게 자유를 줌. 요한도 유배지에서 돌아와 소아시아의 교회를 돌봄
로마관리들의 악정(탐욕)과 대제사장들의 부패, 그리고 백성들의 강포와 유대인의 반란이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된다.

가이사랴에서 유대인 2만명 살육, 수리아 총독 갈루스가 3만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나 실패.
이후 티투스(디도)장군이 AD70년 4월 예루살렘성을 포위하여 식량 결핍. 9월 8일 예루살렘은 함락됨

성전파괴로 인하여 사망자는 110만명, 포로는 9만7천명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속사도 교부 '이그나티우스' 순교
1. 이그나티우스(Ignatius)
1) 가톨릭 용어 처음 사용
2) 일곱 개의 서신
<순교자>
유스틴(져스틴 마터, 유스티아누스)
블란디나
프락스
폴리갑
대박해
Pax Romana A.D. 14 ~ 180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B.C 27 ~ A.D 14) - 티베리우스[디베료](14-37) - 칼리굴라(37-41) - 클라우디우스(41-54)
혈연제국
혁명제국
네로 시대부터 시작된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네로 이후로 극심해지는데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이 혁명을 통하여 황제가 지속적으로 바뀜으로 인해 그 정통성에 대하여 부정하게되는 기독교에 대하여 황제 스스로가 정통성을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핍박하게 되는것이 일반이다. 그러므로 네로 이후 10대 박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상 명분없는 단순한 박해에서부터 시작하여 박해의 명분을 다양한 방법들로 책임을 전가시키며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로마국가의 자연재해 문제를 곧 로마의 '황제숭배'와 다양한 '우상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 모든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데오도시우스 1세(379~395)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서로마제국
아르가디우스(395~408) - 데오도시우스2세(408~450) - 마르키아누스(450~457) - 레오1세(457~474) - 레오2세(474) - 제노(474~475) - 바실리스쿠스(475~476) - 제노 재위(476~491)
1453년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은 멸망.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대제, 800~814) - 루트비히 1세(814~840) - 프란츠 2세(1792-1806)
신성로마제국
예루살렘의 멸망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1) 유대교의 총 본산이 함락되므로 기독교가 자유얻음
2) 각지로 흩어져 전도의 판도가 확대
3) 정경 형성을 촉진
4) 기독교 조직 운동 촉진
폴리갑
1) 서머나 교회 감독, 사도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의 친구, 이레니우스의 스승
2) 황제숭배 거절에 의해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155년(86세)에 화형
3) 사랑의 사도였으나 이단에 대하여서는 단호
4) 교회의 조직과 권징보다 신약에 대한 언급이 많음
5) 저서로써는 '빌립보 서신'이 있음.
6) 천년왕국설
7) 말시온에게 '사단의 맏아들'이라고 정죄
기독교를 헬라 철학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했고,
하나님의 말씀 곧 로고스가 그리스도로 화육했다고 주장
오리겐(185~254, 클레멘트의 계자)
1) 기독교 진리를 철학적으로 해석
2) 성부와 성자는 동질이며 한 인격
3) 영혼선재설(인간의 영혼은 앞선 세계에서부터 있었다)
4) 연옥설
5) 만물회복으로 만인 구원설
6) 우주관은 이데아와 물질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레니우스(폴리갑의 제자)
1) 신은 자유의지로 창조된 유일신
그러므로 신의 피조물인 우주는 선하다.
2) 그리스도는 신이 자기를 표현한 로고스
그리스도는 영원한 아버지와 함께하심
3) 성령은 성자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께 속함
성자에게 복수의 지위가 있다.
4) 그리스도는 교사가 아니요 구주
터툴린안
1) 아담의 불순종으로 신인불화론이 생겼다는 죄악론 주장
2) 영혼 유전설
3) 그리스도의 사업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포괄
4) 유아세례 반대
5)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
6) 최초로 라틴어로 쓴 변증서를 저작함.
세례와 관련하여 '고기'라는 그리스어 '익투스'(Ichthus)를 사용. 이 단어는 Iesus(예수), Christos(그리스도), Theou(하나님의), Uios(아들), Soter(구세주)의 첫 글자를 합쳐서 Ichthus(물고기)를 뜻하는 단어를 이루도록 하였고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아이콘이 되었다.
7)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자'가 됨.
키프리안
1)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
2) 교회를 버린 자는 외인이요, 속인이요, 적이다
3) 교회를 어머니라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다.
4)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다
5) 교회는 감독으로 말미암아 세워졌으니 감독이 없이 교회가 없다.
6) 가톨릭 교회 이외는 없다.
7) 최초 가톨릭 성직 제도 실시
8) 분리한 교회나 이단자의 세례는 무효
그러나, 키프리안으로 인한 로마 교회 절대권과 교황 무오설의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고, 영적 교회를 무시하게 되었다.
9)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은 데시우스 당시 박해를 받았으나, 발레리안 때 순교함.
헬라 교부 신학
라틴 교부 신학
알렉산드리아
로고스의 성육신
신화된 인간이 종교적 이상
적극적 수용, 지식 우위
종속주의적
이레니우스, 클레멘트, 오리겐
아다나시우스, 시릴(키릴)
중심지
강조점
특 색
철 학
신 관
교 부
카르타고, 로마
법통의 확립
법학적, 정치적
비판적, 신앙 우위
삼위일체
터툴리안, 키프리안, 레오
암브로시우스
니케아 회의(325년)
소집자 : 콘스탄틴 대제
동기 : (1) 아리우스의 이단 문제때문에 교회의 분열을 우려하여
(2) 부활절 제정 문제
결의 : (1) 니케아 신조 제정 -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시며,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
(2) 부활절 제정 : 춘분 후 만월이 지난 첫째 주일
(3) 아리우스와 기타 이단자 추방
중요함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
인성을 확립, 인정을 제한한 아폴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소집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 회의(431년)
1인격 통일을 위해, 양성분리를 주장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추방하였음 소집자는 데오도시우스 2세

네스토리우스는 이후 중국으로 도피하여, '경교'를 세우고 우리나라에도 이 경교는 전파 되었다.
칼케톤 회의(451년)
1) 양성론 확립
2) 단성론은 주장한 유티케스(유티커스)를 정죄

[소집자]
마르키아누스 황제
어거스틴(354~430)
387년 암부로시우스의 설교에 감화받아 기독교로 개종
395년 힙포의 감독이 되었고, 430년 게르만족의 침입에 생을 마감

사상 : 그리스도의 양성론, 삼위일체 주장, 신을 인격적 체험의 대상으로 믿음
무형교회 주장, 가톨릭 신자 됨이 구원의 필수 조건, 원죄 인정
성령의식, 관례 중시, 예정론 믿음, 내세를 확신
작품 : 삼위론, 하나님의 도성, 독백, 참회록

[초기 마니교에 빠졌던 이유]
1) 마니교가 그 체계적인 이원론으로 악의 문제에 대하여 호소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점
2) 마니교가 구약을 거부하였던 점(회의적인 젊은 지성인에게 구약의 문학적이고도도덕적인 미숙함이 문제로 여김)
3) 마니교가 '믿음'을 요구하는 기독교를 비웃고 오직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가르친다고 공언하였기에
중요함
기독론에 관한 논쟁
단성론 : 그리스도 예수님을 볼때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있으나, 어떤 이들(단성론자)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의 '인성'으로 보았다. 즉 둘 중 하나로만 보았던 것이다. 이단으로 정죄를 받는다.

정통신앙은 '양성론'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
초대교회사
갑바도기아 교부들
1) 대 바실(329~379) : 가이사랴의 감독
2) 닛사의 그레고리(330~390) : 닛사의 감독, 대 바실의 친동생.
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330~394) : 콘스탄티노플 감독
중요함 삼위일체 논쟁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
아타나시우스(아다나시우스, 295~373)
1) 알렉산드리아 교부로써, 아리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2) 안토니와 파코미우스의 친구
3) 367년 동방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정경을 체택
극심한 박해
로마시대 박해의 원인들(심창섭, 기독교 교회사; p.49-50)
첫째,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반대하였다.
둘째, 기독교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
셋째, 기독교인들의 집회에 대한 오해(식인, 근친상간 - 성만찬에 대한 오해)
넷째, 기독교인들은 반국가적인 존재로 여김
1) 영지주의(Gnosticism) : 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며,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개념도 관련된 영지주의는 이원론에 근거한 혼합주의 사상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현상계)는 악하고, 그 세계 뒤에 있는 이념적 관념의 세계는 선하다고 보았다.

사상 : 유대교의 창조를 악한 신의 행위로 간주하여 구약의 신을 악한 세계를 창조한 악한 신으로 해석, 물질세계는 악하기 때문에 그 물질세계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도 열등하고 불완전한 하위 신인 것을 간주 함.

기독론 :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가현적이거나 그림자 정도로 나타난 것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하나의 '펜톰'(phantom:유령)으로 보았다.

구원론 : 인간의 육체는 악하므로 그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을 구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승천하여 영원한 영적 실제의 참된 세계인 플레로마(Pleroma)와 재결합해야 한다고 주장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지식 곧 '영지'(gnosis)의 비밀을 갖고 있다고 주장.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영혼의 내적인 신비한 신적 광명이 내재한다고 주장함.

2) 말시온(Marcion) : 말시온
영지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이원론적인 이단. 바울 사도만이 복음을 신앙적으로 이해했던 유일한 사도라고 하면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만을 진정한 성경으로 인정(그러나 바울 서신중에서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는 제외).

사상 :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을 창조한 악신으로 보았고 신약의 하나님만 진정한 참 하나님으로 간주,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책으로 금욕생활을 강조하여 육신을 거부하고 성적 생활도 악한 창조신의 유혹에 빠지는 수단으로 봄(5세기경까지 잔존)

기독론 :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반대하는 가현설의 입장을 취함

3) 몬타니즘(Montanism) : 몬타누스
영지주의나 말시온과는 달리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적인 근거를 따르면서 계시나 성령 체험적인 극단신앙을 주장. 지나치게 환상적인 신앙체험을 강조하고,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믿음과 예언자적인 열정으로 종말신앙을 강조

사상 :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도는 독신과 금욕은 물론이고 일체의 육신적인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를 강조.

200년경 초대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인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주의자가 됨.
콰드라터스(Quadratus), 아리스티테스(Aristides)
져스틴(유스틴), 타티아누스,아테나고라스,데오필루스
헤게시푸스
사데의 감독 멜리토(Mileto)
히에라폴리스 감독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1년 케실리안(Caecilian)이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임직하는 임직식에 박해시대에 성경을 버린 사람이라고 비난받던 펠릭스가 참석함으로, 임직식 무효에 대한 논쟁으로 인하여 발생된 종교회의.
결과 : 알레스 종교회의에서 케실리안이 지지를 받게되제 케실리안을 반대하던 도나투스는 기존 기독교에서 분리하여
도나티스트라는 새로운 분파를 형성
하였다.

알레스 종교회의에 3명의 '브리튼 감독들'이 참석 하였다. 이로써, 3세기에는 브리튼에 기독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알레스(Arles) 종교회의(314년)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은둔주의자)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251-356)
1) 개인적인 생활에 국한된 금욕 생활
2) 기도와 명상 그리고 예배 가운데서 구도의 삶을 살았다.
수도원 생활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
파코미우스(Pachomius, 290-346)
1) 공동체의 금욕생활
2) 노동, 기도, 명상(성경 구절들을 암송하는 훈련)으로 이루어진 '공동 일과표'를 따라 생활
3) 함께 식사하고 모든 재산을 공유
4) 원장들에게 엄격히 순종하는 것이 관습
5) 원장들은 파코미우스가 점진적으로 발전시킨 '수도회칙'에 따라 전반적인 수도생활과 소속 수도원들을 다스렸다.
6)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코미우스의 '코이노니아'는 수많은 수도원들을 포활하게 되었고, 그로써 최초의 '수도회'를 구성하였다.
7) 이 공동체들은 직접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고, 구원의 '도'를 훈련하는 일에 서로 돕고 격려 하였다.
제롬(Jerome, 345~420)
1) 교황 다마수스의 비서가 되어 교황의 격려를 받아405년 벌게이트(라틴어-Vulgate)성경 번역
2) 스스로 수도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침
3) 동방교회를 위한 사역을 함
4) 교황 다마수스의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로마에서 수도원의 금욕적인 삶을 전파함.
5) 로마를 떠나 이스라엘로 감 :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라는 말을 했음.
데오도시우스 시대에 수도원 정신을 널리 전파한 대표적 인물
서방교회의 고울지방에서
투울의 마틴(Martin of Tour, 347-397)
이 수도원정신을 널리 전파하였다.(리구게아와 마르무티에르 수도원 설립)

마르티에르 수도원은 급진적으로 발달하여 '은자의 집단 촌락'이 되었다.
어거스틴

하나님의 예정을 믿음
불가항력적 은총을 믿음
믿음으로 구원 얻음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미침
유아에게도 원죄 있음
펠라기우스

인간의 노력, 의지로 구원
가항적(거부할 수 있음)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의지적)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줌
유아는 범죄 전 아담과 동일한 상태
구원론
인간론
토마스 아퀴나스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가능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가 곧 구원


부분적으로 타락
선행이 가능
이성과 신앙에 대한 비교
터툴리안(무조건 믿는다)

나는 모순되므로 믿는다
기독교의 모든 이단의 근원은 철학
단순한 신앙만이 요구
클레멘트(이성 강조)

아는 것은 믿는 것보다 더 우위하다
철학도 신적 기원을 갖는다
철학은 복음의 준비다
어거스틴(신앙 우선)

신앙과 이성은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신앙이 우위이다.
나는 어머니와 거룩한 교회를 통한 진리의 전달을 믿는다.
진리에 이르는 두 가지 길 : 신앙은 찾고 이성은 발견한다.
어거스틴의 하나님 나라 개념

1) 변증법적 통일
2)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암브로스(Ambrose, 340~397)
어거스틴이 개종하게 되었던 설교자 암브로스.

그의 생애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1) 서방에서의 아리우스주의 잔여세력 척결 문제
2) 국가 권력에 대항하여 교권을 회복
3) 이방종교의 세력을 근절(이교)과 유대교 근절
4) 자신의 수도원적인 금욕생활에 반대하는 자들과의 신학 논쟁.

[특징]
1) 황제는 교회의 후원자이자 충실한 자녀이되 군주는 절대로 아니다..

[극적인 순간]
황제 데오도시우스와의 대결로 황제는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바닥에 누워 손발을 모두 뻗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죄를 구하게 되는 사건.

교회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음.
요한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407)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는 설교자.(동방교회에 속함)
콘스탄티노플의 타락과 부패를 지적한 공격적인 설교로 인하여 황제의 처인 유독시아(Eudoxia)와 그를 시기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필루스(Theophilus)에 의한 거짓 고소로 유배되었고, 유배지로 가던 중 세상을 떠났다.
서로마제국을 침입한 야만족
게르만어를 사용한 프랑크족(Franks), 반달족(Vandals), 알라만스족(Alanmans), 고트족(Goths), 색슨족(Saxons)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관련되어 침입한 야만족은 5세기 초의 훈족(Huns)의 침입이 발판이된다.

그러나 주목할 사항은, 대부분 아리우스주의이거나 이방신을 가졌던 야만족들의 로마제국으로의 침입을 통해 그들이 오히려 로마제국의 정통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 스페인 점령했던 비시고트족은 40년 투쟁 끝에 정통신앙을 받아들임
2) 부르군디족들은 야만족들 가운데 최초로 정통신앙을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라틴어를 사용(프랑크왕 클로비스에게 부르군디족 출신 클로틸다를 아내를 줌으로 프랑크족의 개종에 공헌)
3) 이탈리아를 점령한 오스트로고트족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었으나 로마의 주교를 인정하여 로마 제국과의 공존
4) 아프리카를 점령한 가장 잔인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었던 반달족도 534년 동방 황제 벨사리우스의 원정에 의해 멸당 당하거나 정통 교회로 흡수 내지 자멸하였다.

안디옥 학파 :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
알렉산드리아 학파 : 신성을 강조
제논은 482년 '통합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커스를 파문, 그리스도의 양성이 다시 확인 되기는 하였으나 모두 모호한 용어로 재자리 되어 사실상 칼케돈의 결정을 포기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1054년 동방교회, 서방교회 분리
동방 :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국가교회체제를 유지.
서방 : 교황의 권한이 황제권을 대신하는 역현상

원인 : 성상논쟁, 교리논쟁, 동-서 교회의 교권투쟁

중요함!!
1054년 동서교회의 분리에
씨앗이 되는 사건.
오도아케르(480~493) - 테오도리크(454년 ~ 526년 , 재위 488년 ~ 526년) - 아탈라릭(526~534) - 테오다하드(534~536) - 비티게스(536~540) - 일디바드(540~541) - 토틸라(541~552) - 데이아(552)
유스티아누스 1세(527~565) - 유스티아누스 2세(526-578) - 헤라클리우스(610~641) - 콘스탄티누스 11세(1448~1453)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멸망
동방의 6교구(트라키아, 폰투스, 아시아, 오리엔트, 일리키움, 이집트)
서방의 4교구(달마티아, 이탈리아, 아프리카, 스페인)
이 첨가된 지중해 연안의 동서교회뿐만 아니라 제국도 연합을 이루었다.
중세 교황
그레고리 1세(서로마제국, 540~604) - 니콜라스 1세(856~867) - 힐데 브란트(그레고리 7세, 1073~1085) - 우르반 2세(1088~1099) - 이노첸시오 3세(이노센트 3세, 1198~1216) - 보니페이스 8세(보나파시오 8세, 1294~1303)
서로마제국 멸망 동고트왕국으로 편입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

훈족과 스키리아인의 피가 반씩 섞인 헤룰리족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 - 유스티누스 1세(518~527)
동고트제국(서로마제국) 멸망 게르만족은 이후 유럽을 지배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됨, 본격적인 중세의 시작.
1) 574년 시실리 섬에있는 자신의 유산을 팔아 6개 수도원 설립카엘리안 언덕 위에 '성 앤드류 수도원'으로 만들고 수도승의 은신처로 만듬.

2) 590년 로마 전역에 페스트가 유행하고 롬바드족의 위협이 드세지면서 언젠가 거룩한 로마도 멸망한다는 분위기가 고조
교황 그레고리 자신도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게 된다.

3) 교회 예배 갱신을 시도하여 복잡한 예배의식을 통일하고 정리하는 공적을 세웠으며 그가 창설한
'그레고리 성가'
는 중세의 교회음악과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4) 그레고리의 업정중 뜻깊은 업적은
'영국의 전도'로, 596년 그레고리 1세는 어거스틴(켄터베리 대 주교 어거스틴, 불명확~604)을 직접 파송
하였다. 이 선교의 과정은 색슨족 왕 '엘텔버트'가 가톨릭 기독교도 공주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즉시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이루어졌다.
초기 중세시대대륙의 선교
[영국전도]
그레고리 1세 -> 켄터베리 주교 어거스틴을 영국으로 파송
잉글랜드 남동쪽인 켄트 지방에서 선교 시작
켄터베리에 최초의 기독교 성당과 수도원 설립(이름은 성 어거스틴)
-> 동북쪽으로는 켈트족의 수도사인 아디안(Adian)에 의해 선교시작.
[아일랜드]
콜롬바 -> 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창설
픽트족(Pict)에게 선교하여 그들을 개종

[대서양을 건너 대륙으로]
콜람바누스 -> 방고르(Bangor) 수도원의 수도사
586년 아네그레이에 '룩세이유 수도원' 세움
북스위스와 북이탈리아까지 선교하게 됨.
614년 이탈리아의 아페닌 지역에 '보비오 수도원' 세움
윌리브로드 -> 이교의 땅인 우트레흐트 항구 부근에 도착
프랑크족의 공작이었던 '피핀 왕'의 원도를 받아 프리지아에서 선교
수도원과 교회를 짓고 데인족에게 복음을 전파
보니페이스 -> 윌리브로드의 사역을 계승한 독일의 사도.
722년 헷세와 튜링기아 지방에서 전도하여 추장 및 많은 사람 개종
로마에 가서 그레고리 교황 2세에게 간청하여 이방인을 위한 주교 임명
독일과 라인 강의 동편을 교구로 주어서 보니페이스는 교황과 동료 주교
들의 지원을 받아 선교활동 시작.
두 가지 사명을 가지고 있음 (1) 프랑크족의 교회를 개혁
(2)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함.
741년 교황 자카리라스에 의해 보니페이스는 교황 사절로 임명.
교회의 개혁작업을 시도 하였다.
753년 본 강 언덕에서 초신자들을 위한 견신례 중 순교

독일은 페핀의 아들인 '샤를마뉴'에 의해 무력으로 개종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664년 휫비(위트비) 종교회

로마식의 기독교를 영국의 기독교로 공인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으며, 이런 결정은 대륙의 선교를 통일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샤를마뉴는 아버지(페핀)의 영토를 배 이상으로 확장하여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헝거리, 이탈리아, 스페인의 일부까지 점령하여 서로마제국의 몰락이후에 버금가는 유럽의 거의 전지역을 통일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그는 이 정복을 통해서
유럽을 군사의 힘으로 기독교화하는 기독교세계(pax christianna)를 이룩
하였다. 또한 종교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국가권력에 의한 교회 확장을 강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문화'를 형성
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크리스마스에 참석하여 로마교회의 성베드로 성당에서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면서 옛 로마 황제의 칭호를 내렸고 로마교회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탄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또한
'기독교 문예부흥'에 기여
하였다. 그는 고트족, 프랑크족, 색슨족, 겔트족 등 여러 종족으로부터 유능한 지식인들을 궁정에 초대하여
'궁정학교'를 개설
하였다.
샤를마뉴는 이방인들의 강제 개종을 반대하면서,
교회와 국가에 관해 '두개의 칼'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최초로 사용
하였다.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모든 교회의식을 로마의 의식으로 전환 로마교회와 밀착하였고, 유럽에 있는
모든 수도원의 수도 원칙을 베네딕트의 회칙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중요함
1792년 프랑스 혁명으로 신성로마제국은 그 끝을 향하여 달려갔고, 나폴레옹 1세에 의하여 1806년 프란츠 2세는 퇴위 샤를마뉴 대제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신성로마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프랑스'가 세워진다.
성상숭배 논쟁

황제 레오 3세 부터 시작하여 콘스탄틴 5세, 레오 4세까지 계속되어 787년에 종결되었다.그그러나 이 논쟁은 정확하게 726년에 시작하여 842년에 막을 내리게 되었고, 동서교회 사이에 간격을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성상 사용의 문제라기 보다는 동양제국이 동양화되는 과정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성상에 관련된 견해가 두 파로 나뉘는데, 하나는 '파괴주의'이고 다른 한편은 '보호주의'였다.

파괴주의(아이코노클래즘, Iconnoclasm) : 교회 안에 있는 형상, 그림, 어떤 숭배대상도 제거 - 대표자 : 레오 3세, 콘스탄티누스 5세
보호주의(아이코노클래스터, Iconoclaster) : 형상, 모형, 그림 등을 숭배하는 것이 신앙에 도움 - 대표자 : 교황 그레고리 2세, 다마스커스의 존(요한)

교황 레오 3세는 교회에 뿌리 깊은 전통으로 자리잡은 성상숭배를 반대하는 칙령을 선포
이유 : 교육을 많인 받은 계층이 성상과 같은 미신에 심취하는 것을 경멸
수도사의 영향력을 제한시키기 위함.
787년 니케아 회의(7차 공의회)
성상파괴를 그만두고 성상공경의 내용으로 돌아감
성상숭배 논쟁 기간 -> 황제 레오 3세(717~741) - 콘스탄틴 5세(741~775) - 레오 4세(775~780) - 콘스탄틴 6세(아이린 섭정, 780~797)

필리오케 논쟁 -> 서방교회 :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는 복발설(이중발출) - 필리오케(Filioque)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
니케아 신조에는 '필리오케'가 없으나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나온다고 삽입
동방교회 :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단발설
니케아 신조의 원문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
성령은 아버지 한 분으로부터 오며 아들로부터 온다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하였다.
사용 반대이유 : (1) 에큐메니컬 회의들은 신조에 어떤 종류의 수정이나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2) 정교회는 필리오쿠에가 신학적으로 부당하다.

필리오케 삽입 전통은 프랑스로 전달되어 독일로 유입되어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794년 프랑크푸르트의 반성상 숭배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교회의 관행과 예전의 전통 문제 -> 서방교회 : 성직자들의 독신제, 성만찬시에 무교병 사용
동방교회 : 성직자들의 결혼 허락, 성만찬시에 유교병 사용

용어정리
희랍정교(동방교회)
로마교회(서방교회)
교황권 강화의 기선을 잡고 등장

이탈리아 내에서 교황의 권위를 높임.
동방제국의 보호 아래 있던 '라베나의 대주교'를 소환 자신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 그러나 거절함으로 그는
'라테란 회의'에서 라베나의 대주교를 파문시킴

니콜라스 1세는 그의 재직 기간중, '이시도르 문서'라는 허위 칙령을 작성
하였고, 이것은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나타난 괴문서 즉
위조문서
였다.

이로써 니콜라스는 교황의 권위를 강화시켰고, 이시도르 문서를 통하여 만들어진 교령집은 교황의 권위를 높이면서 대주교들의 권위는 약화시키는 역할과 11세기에 와서는 실제적으로
'추기경단'을 잉태시키는 효시
가 되었다.
초기 중세 교회사
레오 9세(토울의 브루노)가 교황이 되자 그의 부집사직에 임명되어 교황권을 실제적으로 행사함. 1073년에 교황에 오름, 전임은 '교황 니콜라스 2세'였다.

업적
(1) 교직 매매 금지
(2) 교직자 결혼 금지
(3) 교직 임명, 교회 재산 관리권 교황아래 둠
(4) 전체이대광 같은 지상에 이대권이 있으니 교황과 국왕이다.(교황우위주장)
(5) 독일왕 헨리 4세(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문제로 충돌
서임권이란?
(1) 모든 성직의 임명은 교황이 하되 황제의 감독을 받는다.
(2) 반지와 훌(지팡이)을 줌으로 성직에 임명은 교황만 가능
(3) 황제가 거부하면 성직자가 될 수 없다.

: 헨리 5세(하인리히 5세)가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1122년 9월
보름스 회의에서 타협.

보름스 회의(1076년 1월)
성직자는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서 선거되며, 황제는 지환과 장(영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서임권을 포기하고 홀(세속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교회령 및 이에 부수되는 정치적 권리의 수여만을 행사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1054년 서로 결별했던 동,서방 교회가 이슬람의 침략으로인하여 다시 하나로 연합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동방 황제가 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서방교회 측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때 서방의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나서 1095년 십자군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사상 : (1)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왕이기에 심판 할 수 있다. - 수장권
(2) 교황은 하나님보다 낮으나 사람보다 우월하다.
(3) 베드로에게 주신 교회 통치권을 교황이 받았다.

정책 : 프랑스왕 필립 2세가 처와 이혼하고 다른 부인 얻은 것을 인정치 않고 본처와 재혼시킴
영국왕을 굴복시킴. 1213년 복권케 하고 매년 2차씩 공납하기로 함

특이사항 : (1) 4차 십자군 전쟁 일으킴(1202년)
(2) 종교재판 창설
(3) 고해 성사 제도 실시
(4) 화채설 교리 주장(라테란 종교회의(1215))
십자군 전쟁(1096~1291) 총 8차에 걸친 전쟁
원인 : (1) 셀주크 투르쿠족(Seljuk Turks)이 소아시아의 상당 지역을 정복하자 상황이 달라졌고, 1079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을 관할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성지순례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2) 흉년으로 경제적 불황이 계속되자 반작용으로 오히려 성지 순례자가 더 많이 생기게 됨
(3) 성지회복의 결의를 다짐 - 교황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에서 십자군 조직(거룩한 전쟁)
(4) 십자군의 특전 - 일체의 죄를 사면받음

장점 : (1) 이슬람(회교도)의 서방 침입을 저지
(2) 기독교의 의식을 환기
(3) 봉건제도 붕괴로 상공업 발달, 유럽이 근대국가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 마련
(4) 이슬람 국가의 지식 흡수로 동방과의 문화교류 촉진, 스콜라주의(스콜라 철학) 발생
(5) 로마교회(서방교회)의 재산 증가로 교황권 강화
(6) 십자군 운동 때 형성된 상업적인 길목을 따라 지중해 연안이나 북부 이탈리아 그리고 라인강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 발달
(7) 대학의 발생과 발전, 예술의 진보를 가져와 개화와 진보를 가져온 시대.

단점 : (1) 성지탈환 실패
(2) 동,서교회 통일 실패
(3) 무모한 종교적 열정으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가정을 파괴한 종교전쟁
(4) 금욕적 신비주의 사상을 입은 경건적인 수도원 운동과 타 세계를 지향하는 신앙의 열기 증대
(5) 십자군 운동으로 유입되어 온 성유물들은 유럽 교회의 성유물 숭배신앙에 일조
(6) 기독교 경건운동에 영향을 미침(시토 수도회 발생)
(7)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반사회적이고 이단적인 성격을 가진 무리가 나타남.
(8) 순교정신보다 전투 정신의 무사가 더 존경받게 됨
(9) 소아가 싸워야 이긴다는 이야기로 소년 십자군 사건이 일어남
(10) 경제적 파탄으로 국민 생활이 격심해짐

실패원인 : (1) 이해의 불일치 (2) 불순한 동기 (3) 교황의 군사 통솔력 결여 (4) 오합지졸 (5) 지리에 어두움 (6) 8차에 걸친 긴 싸움
[이단들의 등장]
이노센트 3세(이노첸시오 3세)에 와서, 이단들의 등장이 나타났다.

이들은 수도원 개혁 즉 '클로니 수도원의 개혁'과
그레고리 7세의 개혁운동 그리고 '시토회의 개혁'
을 통하여 만족을 얻지 못한 부류들이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은 귀족이나 영주들의 토지는 종종 수도회에 헌납되었기 때문에 수도회는 점점 부유하게 되었고 이는 곧 수도회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기존 질서 즉 교회의 질서를 비난하거나 거부하여 교황청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들

왈도파
: 피터 왈도에 의해 발생하게 된 이단.
(1) 성경의 문자적인 순종을 주장
(2) 부도덕한 사제들의 성례집회는 무효
(3)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줌
(4) 맹세를 거부함
(5) 전쟁 참여 거절
나중에 후스당이나 보헤미아 형제단의 신앙적인 유산이 됨
카타리파
: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나, 말시온 그리고 마니교와 같은 이원론적 사상으로 무장하여 창조물은 악한 물질이며, 영은 선한 원리라고 주장. 카타리파의 주된 호소력은
'도덕적'이고 '윤리적'
인 것이었다.
(1) 구약성경과 화체설을 철저히 배격
(2) 성찬식은 단순한 기념에 불과
(3) 성관계를 악하다고 봄
(4) 육식을 거부함

알비파
-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알비 일대 추종자들
보고밀파
- 불가리아에 추종자들이 형성
플로라의 요아
종말론적인 이단사상을 가지고 역사를 성부시대와 성자시대 그리고 성령시대로 3분하여, 각 시대를 다시 7기로 나누는 이설을 주장, 자신은 시대를 3기의 마지막 시대, 즉 성령의 시대라 보았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독일
서방교회의 수도원 운동의 특징

1) 서방 수도원주의 운동은 보다 실질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부인 이라는 전제 하에서 육체를 징벌하는 대신, 영혼과 아울러 육체를 훈련하여 세계를 복음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2) 서방 수도원주의는 동방처럼 고독한 은둔생활을 그다지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서방 수도원 운동은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다.

3) 서방 수도원 운동은 동방의 수도원 운동처럼 교회의 공식적 계급 제도와 계속적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

베네딕트(Benedict) 수도원 운동

베네딕트에 의해서 생겨난 공동체를 몬테 카시노로 이전하여 세워진 수도원 공동체로써, 이 수도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베네딕트가 작성한 '규율집'에 있다.

[특징]
1) 영속성(permanence)
수도사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수도원을 옮길 수 없는것을 의미, 이러한 베네딕트파 수도자들의 영속적 거주는 사회의 환란기에도 수도원 제도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

2) 순종(obedience)
'규율집'이 곧 순종을 강조하며, 무엇보다 규율 자체에 대한 순종을 의미 동시에 '규율집'은 모든 수도사들에게 육체 노동을 요구한다.

3) 베네딕트는 수도생활의 핵심을 기도라고 생각했다.

4) 수도원들은 학문의 중심지가 되어, 수도사가 되는 훈련을 받기 위해 이곳에 맡겨진 많은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5)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수도사들의 노동에 의해 경작된 토지 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농경지 면적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교황들의 업적이나 그외 사건들에 대하여 익힘
수도원 개혁운동의 발생

1. 클루니 수도원 운동
애퀴테인의 공작 윌리엄 3세에 의하여 자신의 사냥터 '클루니'를 수도원 부지로 제공하여 수도원 원장을 '베르노'로 세움.

[개혁방향]
1) 처음에는 베네딕트의 '규율집'을 온전히 따르는 것에 불과하였으나 그들의 시계가 확장되어 '베르노'의 모범을 따라 다른 수도원들에 대한 개혁을 시작

2) 규율집에 따라 성무일과 즉, '기도'와 '성경 강독'을 중점으로 하였으나 그들의 모든 일과를 성무일과에 바치게 되어 베네딕트가 중요시여기던 '육체 노동'을 등한시하게 됨.

3)이후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은 전체 교회의 개혁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교회의 전반적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연합하였다.

이와 같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토울의 브루도는 그의 동료들, 즉 '힐데브란트'(그레고리 7세)와 훔베르트를 동반하고 로마로 향해 갔으며, 이곳에서 브루노는 레오 9세의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하였다.
탁발 수도회

1. 프란치스코(프란시스) 수도회
프란시스(Francis, 본명은 지오반니)에 의하여 창설, 지오반니는 고향 아씨시의 친구들에 의하여 '작은 프랑스인'(프란치스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결국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이 별명으로 불리우게 됐으며 그의 수도원 역시도 '프란치스고 수도회'가 되었다.

[특징]
1)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청빈의 생활을 포용
2)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3세에 허락으로 수도원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3) 고향 아씨시에서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를 만듬
4) 동시에 '성 클라라'에 의해서 '가난한 클라라'(클라세스)라 불리게는 여자 수도회가 창설
5) 서부 유럽에 걸쳐 설교하고, 찬양하고, 구걸하는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이 생겼다.
6) 배출된 신학자 :
헤일스의 알렉산더, 로로저 베이컨, 성 보나벤투라, 요한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캄

2. 도미니크 수도회(설교자들의 수도회)
성 도미니크에 의하여 창립되었으며, 1203년 도미니크와 그의 주교 오스마의 디에고가 남부 프랑스를 방문 하였을 때 이단 '알비파'의 번창을 보고서 충격을 받아 도미니크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통신앙의 설교와 교휸'으로 시작하면 무력보다 더욱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하여 '디에고'는 툴루즈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위해 열심으로 노력했으나 1207년 자신의 교구에서 죽었다. 결국 '디에고'의 뒤를 이어서 '도미니크'가 그 사역을 계속 하였다. 실제적인 수도회 설립에 해당하는 승인은 1216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얻었다. 1217년 1월에 호노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수사 설교자 수도회'를 확인했다. 이후 도미니크는 동료들이나 교회 당국과 상의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동료들을 널리 분산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연구하고 설교하고 새로운 수도원을 창설하기 위하여 7명은 파리로, 4명은 스페인으로, 4명은 툴르즈에 남았다. 그리고 도미니크는 '로마'로 갔다. 이 결정은 혁명이었다.
즉, 주로 남부 프랑스의 이단들에게 설교하도록 특별히 허가를 받았던 한 어거스틴 교단 수도회가 세계적인 복음화 선교와 영혼 구원에 헌신하는 수사 설교자들의 수도회가 되었다.

[특징]
1) 성어거스틴의 규율을 채용
2)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뛰어난 학문을 갖추기 위한 지적 훈련 그 결과 뛰어난 신학자들 배출(
알베르트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하네스 타울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3) 가난을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 따라서 상황의 변화와 함께 수도회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 이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수용하였고 이후 탁발에 의한 생활의 모습은 자취를 감춤
4) 모슬렘들과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는데 주력. 초기 선교사로는 '트리폴리의 윌리엄'이 있으며 스페인에 거주하였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빈센트 페러'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3. 갈멜산 교단
1154년경에 경건한 십자군 병사였던 '칼라브리아의 베르톨드'는 팔레스타인의 칼멜 산에서 은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185년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 은자들의 공동체를 세워 놓았다.
십자군이 실패한 후 1382년경에 갈멜파는 팔레스타인에서 키프로스와 시칠리아, 남부 프랑스, 그리고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유럽으로 들어오자, 그들은 더이상 은자로 지내지 않고 도시 지역의 수도원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영혼을 돌보는 목회 사역에 착수하였다.

4. 어거스틴 교단
12세기와 13세기에 생겨난 이탈리아의 은자들의 집단으로, 1243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이들의 요청에 따라 투스카니의 은자들에게 성 어거스틴의 '규율'을 지정해 주었고, 추기경 '리처드 아니발디'에게 그들을 통합하는 책임을 맡김으로 1244년에 성취되었다. 1255년에는 교황 알렉산더 4세의 지시에 따라 이탈리아의 다른 은자 공동체들도 어거스틴 규율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256년에는 이런 모든 집단들이 도미니크회의 체제에 기초한 체제를 가진 '어거스틴 은수자 수도회'로 통합되었다.

5. 브라몬 교단
1121년에 설립된 금욕주의 교단

6. 제삼회(tertiaries, 제3의 수도회, 참회 수도회)
남자와 여자들이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금식과 기도, 예배와 자선을 베푸는 준수도원적 생활을 하며, 맹세와 무기를 드는 것을 삼가하였다.

탁발교단(수도원)의 발생원인
1) 교황과 감독이 부와 권세로 사원에서 안일하게 지냄
2) 예배의식만 강조하고 설교를 경시
3) 수도사들은 청빈한 생활만 힘쓰고 전도와 구령사업은 등한시

[영향]
민중의 벗이 되어 도와주고 이해하고 설교함
대학 세력을 장악하여 대학교수의 많은 참여
13C 학자 배출이 가장 많음.
프란치스고 사후 수도원내의 두 파

(1) 엄수파(Rigorists)
창립자(프란시스)의 지시에 절대 순종을 주장

(2) 온건파(Moderates)
상황의 변화가 규율의 문자적 해석과 적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수도회는 이제 그 사명의 수행을 위해 선물로 주어진 재산을 감수할 것 주장

: 1230년 그레고리 9세는 프란치스코의 유언이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선언 따라서 수도회는 이제 가난에 관한 규칙을 개정시켜 주도록 로마에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함
스콜라 신학의 발달
[특징]
1) 대학교들의 발전
2)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서유럽에 다시 소개 됨.

발생시기는 8C~12C이며, 전성기는 13C 그리고 쇠퇴기는 14C~15C이다.

샤를만 대제(찰스 대제, 샤를레망 대제)의 '궁정학교'를 시작으로 이성과 신앙 그리고 종교와 철학을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려고 했으며, 기독교를 철학적합리적으로 논증하면서
신학을 그 시대사조에 맞추어 재조정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평론을 경시하였으며 철학 위에 신학이 올라섰고, 성경해석에 전설적 해석을 시도했으며 형식논리를 과도히 적용함으로 인하여 이후에 로마교회의 잉태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스콜라신학의 장점으로는 신학방법의 대진보를 이루었으며, 기독교 진리를 철학적 합리적 논증으로 시도했다는 것과 진리 해석상의 오류 방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

[대표자]
1)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yry)
스콜라 신학의 발전에 중요성은 안셀름에서 나타나는데, 특별히 '신앙의 문제'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이성'(reason)을 적용하였다. 신학을 행하는 두 가지 방법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을 결합함으로서 '성경 묵상'과 '신적 조명을 위한 기도'라는 틀 안에서 기독교의 근본적 가르침에 대한 변증법적 탐구를 엄격히 수행하였다. 안셀름의 사상은 어거스틴을 뛰어나게 대변하며 합리적인 이해는 신앙을 전제한다고 주장하며 유명한 경구인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는 좌우명을 이야기 하였다.
안셀름이 신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저서에서 제기한 속죄에 관한 논의로서, 이전 시대를 통틀어 그 주제를 가장 유능하게 다루었다.

2) 피터 아벨라르드(Peter Abelard)
저서 <긍정과 부정>을 통하여 158개의 신학적 문제를 제시 그러나 대부분 이단으로 의심받는 인물들의 서적으로 제시하였다.아아벨라르드는 합리주의자도 아니었고 불가지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안셀무스의 좌우명을 뒤집지 않았고,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
라고 선언하였다.

3)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전거집>을 썼으며, 이 책에서는 신학의 조직적 분석으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신론에서 시작하여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의 주요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4) 알베르트 마그누스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신학자로 초기 도미니크회 교수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오랜 경력의 대부분을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 대한 일련의 주석서를 쓰는데 사용했다. 알베르트는 독창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지칠지 모르는 편집자요 주석가였다.

5) 토마스 아퀴나스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신학자로써 알베르트의 제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신학대전>이 있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서의 신학방법론은 '토미즘'또는 '토마스주의'라고 명명되었고, 그 방법은 '신앙과 이성'사이의 관계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 주요한 특징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신학적 탐구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인류의 초자연적 기원과 운명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는 것'이다. 그런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이성적인 '믿음의 서론'(praeambula fidei) 즉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자연적 이성으로 생긴다.
토마스는 '철학'과 '신학'을 따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구분
했다. 신학과 철학은 두 개의 독립된 '학문'이며 두 개의 뚜렷이 구별되는 지식 양태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자연 신학)이 두 학문에 공통적이므로 철학과 신학은 일치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믿음과 이성'에 대한 토마스주의의 유명한 종합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목적]
하나님과 인간의 기원과 그 운명에 대한 지식 습득

[신론]
삼위일체

[구원론]
예정을 믿음

[성례]
화체설, 7성례(고해성사)

[내세론]
연옥설

[교회론]
1) 교회는 구원의 기관
2) 교황은 교회의 머리
3) 교황에게 복종해야 구원 받음
중세말의 특징
1) 화폐 경제의 발전
12~13세기 발전한 화폐 경제는 중세말의 상황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 국가주의(민족주의)
국가주의는 이 시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이제 주민들은 자신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항한 공동 연대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국가주의는 우주 전체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교황의 주장을 잠식시키게 되었다. 13세기 말 알프스 산맥 일대의 공동체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위스 연방'을 결성하였으며, 1499년 막시밀리안 1세 때에는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3) 백년 전쟁
14~15세기에 있었던 정치적, 군사적 사건으로 백년 전쟁(1337~1475)이 있었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었지만, 유럽 전체가 개입해야 했기 때문에 '제1차 유럽 대전'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때 등장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잔느 다르크'(잔 다르크)이다.

4) 대 역병(흑사병)
흑사병의 발병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 유럽 전체가 영향을 받았며, 많은 인구가 사망하는 사건은 결국 '종교적 결과'로 나아갔다. 무차별 역병의 발생은 선조들이 믿던 신앙에 회의를 품게 하였고,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한계'를 의심하고, 일반 평민들은 미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생애]
1281년 추기경 됨 -> 1294년 교황에 즉위 -> 프랑스왕 필립 4세에 의해 투옥, 석방 후 1303년 사망

[사상]
1) 교황청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
2) 필립 4세와 조세문제로 다툼
3) 세속권세는 영적 권세에 속해 있기에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특이사항]
1) 필립 4세에 의해 투옥, 출록 후에 미쳐서 사망
2) 보니페이스 8세의 사망 후, 교황권은 붕괴되고 1309년 프랑스 르노 강변 '아비뇽'으로 70년간 교황청이 옮겨졌다. 이것을 흔히
'아비뇽 유수'라고 하며, 다른 명칭으로는 '교회 바벨론 포로 시대'(1309~1377)
교황청의 분열(로마: 그레고리 11세, 아비뇽: 글레멘스 7세) 두명의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1377년 교황청을 로마로 옮겨와 우르반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청을 복귀시켰다.
글레멘스 7세 - 아비뇽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글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 하였다.
영국, 보헤미아, 독일의 지지를 받음
프랑스의 지지를 받음
[피사회의](Pisa)

1409년 '피사'(Pisa)에서 제르손이 교회의 타락을 우려하여 의회가 세력을 장악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종교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청의 분열을 다시금 막고 통일 함.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선출

그러나 결국 '프랑스'와 '로마'에서 거부하여

다시 교황청은 3명의 교황(그레고리 11세, 글레멘스 7세, 알렉산더 5세)시대를 맞이하였다.

피사회의에서 후스는 파문당했다(1410)
그레고리 11세 -> 그레고리 12세
글레멘스 7세 -> 베네딕트 13세
알렉산더 5세 -> 알렉산더 2세 -> 요한 23세
독일의 황제 '지그문트'에게 의뢰하여 통일을 시도함
1414년 콘스탄스에서 회의가 소집, 그러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바젤회의](1431~1433)
1414년 콘스탄스 회의로 통일은 실패 -> 1434년 바젤회의를 통하여 개혁작업을 지속할 것으로 결의

[목적]
1) 교회 전체 개혁
2) 이단 박멸
3) 기독교단의 평화 도모

그러나 교황의 반대(유게네 4세) 하지만 독일의 황제 '지그문트'가 중재하여 유게네 4세 해산 명령 철회하여 13개월만에 개회 그렇지만 교황 없이 회의 강행

[결의]
1) 대회는 교황 위에 있다
2) 교황의 전제와 강제 징세를 제한보헤미아의 후스당과 협정 체결(15명 참석)
- 성찬 때 보헤미아와 모라비안 신자들에게도 떡과 포도주를 줄것
- 죄 있는 자는 처형한다(성직자도)
- 장로, 집사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설명할 권한이 있다.
3) 유게네 4세 교황 폐위시키고 '펠릭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
마틴 5세 -> 유게네 4세(에우제니오 4세) -> 펠릭스 5세(1449년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남) - 니콜라스 5 - 칼릭스투스 3세 - 피우스 2세 - 바울 2세(유게네 4세 조카) - 식스투스 4세 - 이노센트 8세 - 알렉산더 6세 - 피우스 3세 - 율리우스 2세(식스투스 4세 조카) - 레오 10세
유게네 4세는 바젤 공의회 해산을 선포하였으나, 공의회는 해산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유게네 4세를 심판하겠다고 나섰다. 이때 독일의 황제 '지그문트'가 중재에 나섰고 유게네는 해산 명령을 철회하였다.
이 때, 투르쿠군의 위협을 받던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구조 요청으로 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플로 가까이 이동하는 가운데, 유게네 4세는 이 기회를 틈타 공의회를 '펠라라'로 옮겼다. 하지만 이제 두개의 공의회(펠라라 공의회, 바젤 공의회)가 생겼고, 한 명의 교황만이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펠라라 공의회'는 '플로랜스'로 옴겨갔고 '바젤 공의회'는 점차 극단적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 결과 유게네 4세는 폐위 되고 그 대신 '펠릭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존 위클리프(1328~1384)
(1) 1371년 외교가로 활동 하였고, 이후에는 왕실에서 봉사하였다.
(2) 성경을 영어로 번역(1382년) - 정확히는 위클리프가 영어로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위클리프 사후에 '히어포드의 니콜라스'와 '존 퍼비'를 포함한 '옥스퍼드와 루터워스'의 제자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고 완성됐다.(사후 그를 따르는 '롤라드'에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전파하였다.)
(3) 런던대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음(사후 콘스탄스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 유골을 파내어 화형시킴)
(4) 고향에서 뇌일혈로 1384년 사망
(5) 1384년 그는 루터워스의 교회 묘지에 묻혔지만, 1428년 링컨의 주교는 콘스탄스 공의회(1415)의 명령에 순종하여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불태우고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사상]
(1)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표준-성경의 소유권은 교황이 아니라 교회에
(2) 속죄권 부인
(3) 화체설 부인 -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떡 속에 임재하면서도 이를 파괴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
(4) 진정한 교회는 유형교회가 아니라 무형교회라고 하였음(어거스틴에게서 영향 받음)
(5) 교황정치의 불필요 역설

[사상적 후계자들-롤라드(롤라즈)] - 롤라드 : '중얼거리는 자'라는 의미로부터 파생됨.
처음 롤라드파는 귀족층에서 가입하였으나 곧 민중운동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기의 의견을 철회하고 기존 교회로 귀환하였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몇몇 소수들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롤라드파 운동은 근절되지 않았다. 16세기초에 부흥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위클리프의 사상은 멀리 보헤미아까지 퍼졌다.

(1) 위클리프가 살아있을 당시에 그의 교리를 널리 전파함
(2)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파함 - 성경은 원래 대중에게 속한 것이므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확신함
(3) 성직자들은 세속 관직을 겸직할 수 없으며, 성상의 사용이나 성직자들의 독신 제도, 순례 등은 모두 신성모독적 행위라고 믿음
(4) 화체설과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를 부인
종교개혁 전
보헤미야
존 후스(1359~1415)

후스가 프라하 대학의 총장에 있던 당시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던 체코의 학생들로부터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보헤미아로 가지고 들어오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당시 영국 왕 리처드 2세는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한 관계였기에 양국은 우호적인 입장)
그런데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프라하 대학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는데, 당시 프라하 대학은 독일인들과 체코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체코인들은 위클리프의 철학을 받아들였으나 독일인들은 반대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총장이었던 후스는 전통적인 화체설을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두 파간의 불화는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체코인들이 보헤미아 국왕의 지원을 받아 유리한 입장에 섰으며, 독일인 교수들은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치히에 자신들의 대학을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프라하를 떠난 독일인들이 프라하를 위클리프의 사상을 중심한 이단의 온상이라고 비난하는데서 야기되었다. 프라하는 이제 새로운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이 급속히 진전되었고, 프라하의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금하고 후스와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결국 후스는 교황과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교황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설교를 계속 하였고, 그 결과 1410년 불복종 혐의로 로마에 소환 된다. 그러나 소환을 거부 1411년 파문 당한다.

[사상]
1)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을 따름 그러나
화체설을 주장
2) 교황정치의 부패를 공격하고
속죄권 판매를 부인
(그러나 20년전 면죄부를 매입한 경험이 있음)
3)
성경이
야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궁극적 권위
4)
참된 교회는 예정된 사람들로만
, 즉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인 사람들로 구성
된다고 가르침
5)
교회의 유일한 법은 성경
, 특히 신약성경으로 보았다.

[사상적 후계자]
후스파 : 대부분 귀족 및 부르주아 출신들 이었으나, 이들은 하류계급에서 출현한 보다 극단적 운동들의 지지를 수용

타볼파(Taborites) : 이들은 후스 이전에 이미 농부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종말론적 운동이었다. 후스파는 성경을 통해 구체적으로 거부된 사항들 이외에는 기꺼이 유지하고자 했으나, 타볼파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체의 사항들을 부정.

호렙파(Horebites) : 타볼파와 비슷하나 종말론에 있어서는 약간 온건하였다.

이후에 보헤미아의 여러 집단들은 '보헤미아 저항 운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그중에서 기존 교회를 떠나 '유니타스 플라트룸', 즉 '형제 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보헤미아에서 뿐만 아니라 인근 모라비아 지방에서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후에 이들은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거의 '루터파'에 가입할 뻔 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그 출신 황제들의 박해를 피해 도망하였고, 이들 중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를 중심으로 후일
'모라비아파'(Moracians)
로 생존하게 되었다. 그외 다른 잔류 세력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따라갔다.
이탈리아
1.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 산 마르코 수도회 출신

1) 로마가톨릭 교회에 비성경적인 교훈에 대항하며, 교황청의 부도덕성과 이탈리아인들의 부패한 습관과 악한 생활을 공격
2) 시민들에게 엄격한 경건생활을 요구
3)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법이 시민의 법률이 되는 모범적인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론을 가짐(도박, 사치스러운 옷 차림, 음란서적, 음화, 카드, 주사위 등을 엄격히 금지함)

[이탈리아의 시대적 상황]
1) 이탈리아에 문예부흥의 씨앗, 예술과 문학, 철학의 물결이 일어남.
2) 플로렌스를 지배하던 '로렌초 드 메디치'가 사보나롤라를 반대, 그의 아들 역시도 사보나롤라를 반대하였으나 이탈리아 백성들은 사보나 롤라를 추앙하여 메디치를 추방하고 사보나롤라를 통치자로 뽑음.

2.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
1) 하나님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종류의 씨앗들을 주셨고, 우리들은 존재 내부에 과연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가도 결정할 수 있다.
2) 식물적(vegetative) 씨앗을 선택하는 사람은 화초나 하등 동물보다 약간 나은 존재로 그침
3) 지성적 씨앗을 심어 이를 부지런히 양육하기로 선택한 자들은 '천사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4) 스스로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자기들 자신의 영혼의 중심으로 침잠 할 수 있다.

3. 제노아의 성 캐더린(본명: 카테리나 피에취 아도르노, 1447~1510)
1) 1474년에 황홀한 경험에 따라, 엄격한 내핍생활과 참회의 철야기도에 일생을 바침
2) 평신도의 몇 안되는 특권들 중 매일 성찬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였다.
3) 가난한 자들과 제노아병원에 있던 절망적인 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였고, 이후 제노아병원의 주임신부가 됨
4) 그녀의 영향으로 젊은 변호사인 '에또레 베르나짜와'와 그의 세 친구는 1497년에 '제노아에 신애회'로 알려진 종교단체를 세웠다.
5) 이 단체는 회원들은 공동헌신 행위와 자비와 사라의 실천을 통해 인격적 성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였다.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 운동)
: '재생' 혹은 '부흥'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라는용어 자체는 전 시대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시사하는 역사적 기간에 적용된다.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던 이들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로마 함락후 1000년 동안의 기간을 '중세'(Middle Ages)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기간을 단지 고대의 고전 시대와 자기들의 시대 사이에 놓인 중간기라고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고전으로부터 그 근원을 추출함과 동시에 그 이전 시대(고딕 양식)로의 영향을 받고 있다. 곧 그들의 예술은 고딕 양식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세상에 대한 그들의 태도 역시 키케로뿐만 아니라 성 프란시스코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문학 역시 중세 음유 시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 배경에는 세 가지 주요한 영향이 있다.
1) 중세시대의 두 개의 지배 기둥이었던 교황청과 제국이 이상기류를 맞이한 것
2) 십자군에 의해 발달한 유럽의 상업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되어 고도의 문화를 발전
3) 이탈리아의 극심한 정치적 분열은 도시들에게 새로운 특성이 있는 창의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방인들의 재능을 인정해주었고 개인주의를 잉태시켰다. 그리고 성직자들의 도덕적, 윤리적 부패는 중세인이 기독교를 외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고딕 양식'(Gothic)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중세'를 명명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불려진 이름이며, 이 단어는 이러한 예술이 '야만적 고트족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를 발전시킨 인물들

1. 르네상스 정신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사람 '페트라르카'
1) 라틴문학과 키케로의 저서를 부활 시켰다.
2) 스콜라주의를 경멸 했으며,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세계관을 불러 일으켰다.
3) '인문주의'란 말을 만든 창시자

2. 페트라르카의 친구이자 동료 '보카치오'
1) 페트라르카의 친구이자 동료인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저술하여 교회를 공격하였다.
2) 고전 신화의 신비를 파헤치고 인문주의 연구의 폭을 넓혔다.
5) 헬라어 성경을 연구하여 신약성경 연구의 기초를 놓음

3. 활판 인쇄를 발견한 '구텐베르크'
1) 1450년에 마인쯔의 구텐베르크는 활판 인쇄를 도입
2) 인쇄술의 발달은 넓게 보금된 고대의 저술과 문서 사본에 많은 오류가 있음을 발견
3) 학자들이 존경하던 고대 문서들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
4) 라틴어로 되었던 성경(Vulgate)을 헬라어 원어로 읽고 분석하기 시작,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여명을 밝히기 시작함.

4. 로렌조 발라
1) 발라에 의하여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가 콘스탄틴 훨씬 이후의 8세기의 산물임을 증명하였다.(이시도르문서 1440)
2) 디오니시우스 아레오바고의 저술이라고 간주되었던 저술들이 가짜임을 밝힘
3) '사도신경'의 사도들 저작설에 대하여 반박
4) 신약성경 라틴어 불가타를 그리스어 성경과 비판적으로 대조함으로써 신약성경 텍스트 연구에 기초를 세움
르네상스의 영향은 이탈리아에서 부의 극대화를 이루면서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거대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장식하는 유행이 번졌다.
그 결과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고, 재정을 후원한 후원자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하는 경향으로 발전, 이제 예술에서도 신이 아닌 인간의 위대함을 표현하면서 중세정신에 어긋난 경향을 띄게 되었다.

[대표자]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특징]
1) 죄악 속에 눌린 인간상이 아니라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생동적인 인간을 표현.
2) 대부분이 종교적인 작품이었으나, 이전에 표현하지 못했던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묘사
교황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르네상스'

1) 르네상스의 이상을 배경으로 종교개혁 직전의 교황청은 사실 르네상스의 이상과 목표가 동일해지는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2) 교황들은 자신이 열렬한 예술 후원자들이었고, 예술가들을 로마로 끌어들여 아름다운 저택과 성당의 기념물을 건축하였다.
3) 그 결과로 로마를 기독교의 수도로 부상시키는데 공헌함
4) 특별히 교황
니콜라스 5세
는 로마가 유럽 전체의 지적 수도가 될 수 있도록 당대의 저명한 예술가와 저술가를 초청할 정도였다.
5) 니콜라스 5세 이후에 르네상스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교황은
'바울 2세'
였다.
6) 르네상스와 교황청이 같은 목적으로 이룩한 사건이 바로 거대한 '성 베드로 성당'을 완성시키고자 이것의 경비 조달을 위해 무분별한 '면죄부' 판매를 강행하였다. 그 결과 루터의 저항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백년전쟁(1377~1475)
중요함
후기 스콜라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절정을 달하였던 스콜라 신학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 이해하기조차 힘든 난해한 질문들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애매모호한 구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2) 철학과 신학 사이의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오직 신적 계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사이에 점차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장벽이 쌓였다.

3) 단지 믿음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의존'(trust)으로서의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리를 위해 신적 능력을 명령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이 이들을 회의하게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의지하고 의존해야 한다.

4)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의 난해하고 번잡한 이론과 사고 전개는 당시 학문적 신학의 복잡성과 복음의 단순성의 차이를 감지한 많은 이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고, 특별히 경건한 이들(토마스 아 캠퍼스와 같은 신비주의자들과 그외 경건한 자들과 모임)에게 반발을 사게 되었다.
후기 스콜라 신학자

1.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
1) 도나벤투라 이후 가장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
2) 난해성과 정교한 용어들의 사용
3) 영혼의 불멸성이나 하나님의 전지성 등이 이성의 합당한 사용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는 가설에 대하는 교리를 주장
4) 그러나 위 교리가 이성과 공존할 수 있음은 부인하지 않음
5) 그럼에도 인간 이성이 이들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에는 반대, 이성은 단지 이러한 교리들이 진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데 불과하다고 주장.

2.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 1300~1349)
1) 하나님의 전능성이라는 속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자연 이성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전혀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유명론)
2)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제한적 능력'을 구분
3) 교황 및 전체 종교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믿고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다고 주장하였다.
인문주의(Humanism)
: 휴머니즘 혹은 휴머니티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연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문 계통의 연구에 전념하였던 중세 말과 16세기의 많은 학자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휴머니스트'라고 불렀다. 이들은 고전 학문의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외경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중에서는 인간의 제한성과 죄악성에 과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휴머니즘'이란 단지 '고전 문학의 원천으로 돌아가 그 양식을 모방 하고자 하였던 문학 예술 운동'을 의미할 뿐이다.
2.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
1) 공동생활의 형제단에서 교육 받음
2) 성직자들의 도덕적 부패와 무지와 나태함을 공격하였다.
3) <우신예찬>이라는 풍자적인 글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외형적인 신앙에 대해 가차없이 공격
4)
1516년 희랍어 신약성경을 발행
하여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이 성경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영향]
1)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경'을 발행은 이후 루터가 읽게되면서 종교개혁의 횃불을 밝히는 영향을 주었다.
2) 희랍어 신약성경의 발간으로 사람들이 참된 복음과 그리스도의 진정한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3) 종교개혁에 기여 : 인문주의자들의 원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 자체나 교부들의 믿음으로 회귀하자는 운동을 불러왔다.
4) 에라스무스의 영향으로 '제롬, 오리겐, 키릴, 크리소스톰, 이레네우스,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과 같은 일련의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들의 저서가 출판 되었다.

[사상]
1)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적'이다. 왜냐하면 비록 '신의 은총'이 진리를 행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지만, 진리 인식은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 '죄와 은총'과 '인간 의지의 자유'라는 중요한 현안에서 루터와 에라스무스간에 있는 분명한 차이 때문에 그들은 1524~1525년에 유명한 서신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3)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각기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와 '루터의 신앙지상주의'란 방법 차이로 갈라지게 된다.

[한계점]
1) 종교개혁을 갈망하고 그 여명을 밝혔지만 개혁을 통해 성경의 진리의 빛을 발휘하는 데는 미흡
2) 에라스무스는 알을 낳았으나 루터는 그것을 부화하였다.
중세후기 '신비주의자들'

[독일]
1.마이스터 에카르트(1260~1327) :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1) 스콜라주의와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체 언어는 정확하지 못하다.
2) 신성속에서 무아의 경지로 소멸되는 인간의 신비적 명상을 통해서만 가능
(인간 내면적인 명상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
3)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 반대
4) 만인 제사 주의 주장
5) 종교의 본질은 감각적 구체적인 것에서 초월하는 것
6)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2. 요하네스 타울러(요한 타울러, 1300~1360) :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 에카르트의 제자
1) 고행을 떠난 단순한 신앙 강조
2) 이신득의 사상

3. 헨리 수소(하인리히 수소, 1295~1366) :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 에카르트 제자
1) 신의 사상에 도달하려면 산고가 따라온다고 주장
2) 존 타울러와 함께 '하나님의 친구들'모임의 리더였다.

4. 토마스 아 캠퍼스(토마스 아 켐피스, 1380~1471) : 그루데의 '공동형제단' 출신의 신비주의자
네덜란드 즈워츠레 부근의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장을 지냄
1) 지식적 신비주의자
2) <그리스도를 본받아> 저술


[벨기에]
5. 로이스블랙의 존(루이스브뢰크의 존, 1294~1381)
플랑드르(플로랜스-벨기에) 출신의 수도사, 에카르트의 저술을 읽었을 것
1) 신비주의보다는 실제적인 것으로서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생활에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
2) 정서적, 내적 강조
3) 명상을 중시
4) 신과의 일치 주장
5) 이후 게하르트 그루데(Gehard Groote)라는 경건신앙의 개척자를 잉태에 의하여 더울 발전
게하르트 그루데에 의해서 창설된 '공동형제단'에서는 유명한 신비주의 지도자인 '토마스 아켐피스'
'존 위셀'이 배출되었다.
6) 로이스블랙의 존과 그루데는 흔히 '근대적 경건'이라고 불리는 사상의 형태를 이룩하고 이를 일관화 시켰던 인물들이다.

6. 게하르트 그루데(1340~1384) : 로이스블랙의 존의 신비주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인물
1) 명목상의 성직을 포기
2) 당시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맹렬히 공격
3) 추종자들에게 성결과 경건의 생활에 전념하도록 요구(수도생활 강요하지 않음)
4) '공동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 설립

[네덜란드]
7. 존 위셀(요한 위셀, 1420-1489) : 그루데의 '공동형제단' 출신
1)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신앙으로 구원 받는다)
2) 루터가 존경한 신비주의자 였다.

8. 현대 신심(Devotio moderna)
제랄드 흐로테와 그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시작한 운동으로 '현대 신심'으로 알려졌다. 1370년대와 1380년대에 이 둘에 의해 설립된 세 공동체(공동생활 자매회, 공동생활 형제회, 어거스틴 참사회 공동체)들을 포괄하였다.

[프랑스]
9.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성 버나드, 1090~1153) : 시토회 창립, 1차 십자군 전쟁 때 설교
1)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열정이 사상을 지배함
2) 평생을 광명의 곡 혹은 청곡이라고 불리는 수도원장으로 지냄
여기서의 '공동형제단' 출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나온다.
'자유 영혼의 형제단'이라는 신비주의단체에 대하여 반박함.

자유 영혼의 형제단
1) 자기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체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나 성경과 같은 중재 수단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
[특징]
독일과 벨기에(플랜더스, 플라드로, 플로랜스) 출신의 신비주의자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감정에 흐르지는 않았다. 이들은 신비적 명상이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내면의 평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 쉬운 감정적 자극이나 열정이 아니라 내면적이면서도 확고부동한 이지적 명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비주의 운동은 기존 교회나 혹은 계급 제도에 대척하는 양상을 띠지 않게 되었다.

[단점]
신비주의적 경향 자체가 단지 부패한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계급 조직을 가진 교회 자체를 약화시키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 결과 점차 계급 제도의 권위를 약화시키게 되었다.
중요함
민중(대중) 개혁운동 단체

1. 롤라드파
위클리프의 교훈은 옥스퍼드의 학자들이나 귀족들을 통해 생존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존 교회의 권위가 가르치던 것과는 상치되는 복음을 들고 촌락에서 촌락으로 떠돌아 다녔던 롤라드파를 통해 전파되었다.

2. 타볼파(후스파)
처음에는 주로 향사(gentry)와 학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던 후스파들도 결국 타볼파들에게서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타볼파는 후스파보다 먼저 시작된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신념은 후스로부터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종말론적 기대로부터 생성된 대중들의 종교성에서 추출되었을 것이다.

3. 베긴(beguine-우리는 흔히 '비구니'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베긴이다)
여성들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또는 '도미니크 수도회'등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각 수도회가 여성가입자 수를 제한하였으나 수도 생활을 염원하는 여성들의 열의를 꺽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곧 기도, 경건 생활, 그리고 빈곤을 실천하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4. 베가드(beghard, 벤 홀디 단체)
베긴과 비슷한 단체로 남성들은 비슷한 집단을 이루었고 이들을 베가드라고 불렀다. 보통 방적업자와 일반인들이 많이 소속되어있다.

5. 채찍질 고행자(flagellant)
1260년경 처음 나타난 대중운동 단체로, 14세기 들어 그 수가 급증했다. 그 결과 많은 수도원에서도 고행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6. 신우단
공동생활은 하지 않지만 각자 기도와 봉사로 협조하는 무형의 숨은 단체로 정치는 무시하고 하나님과 영교를 주장하며 병자를 위문하였다.

7. 공동 생활 형제단
게하르트 그루테가 설립한 단체로 종교개몽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하단의 '신비주의 단체' 참고)
대표인물로는 '토마스 아 캠퍼스, 존 위셀'
르네상스가 교회에 끼친 영향
1)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 출판, 특별히 성경 원어 출판
2) 성경 주해에 문법적 역사적 연구
3) 교회 제도에 대한 반발
4) 개인주의 발흥
5) 종교개혁 촉진
6) 세계관의 변화(종교적 -> 합리적, 과학적, 인간적, 현세적, 세속적 으로 변화)
중요함
콘스탄트 회의(1414~1418)
1) 귀족 외 5천명 참석하여 세 교황을 면직하고 '마틴 5세'를 교황으로 세움
2) 존 후스 사형을 가결
3) 존 위클리프의 뼈를 다시 불사름 결의
[피렌체 회의](1438~1439)
바젤회의를 반대한 교황, 이탈리아 교직자, 그리스 황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등이 모인 회의

[안건]
로마 교회(서방교회)와 그리스교회(동방교회) 합동 문제

[결의]
1) 성령의 출처문제 : '아들로부터'라는 말을 서방(로마교회)측이 삽입할 수 있게 됨
2) 연옥의 불의 성질이 정신적인 것인지, 물리적인 것인가에 대해 양편 모두 생각 할 수 있음
3) 성찬식의 떡은 누룩이 있든 없든 모두 가능
4)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목자, 교회의 통치자요 교사다.
(교황 이노센트 3세의 말과 동일한 부분)
콘스탄트 회의에서 '제르송'(Jean Gerson, 1363~1429)과 '다이이'(Pierre d'Ailly, 1350~1420)등이 후스에게 공의회의 권위에 굴복할 것을 명령 했다.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의 발달을 가지고 온 것이 바로 르네상스(인문주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
네덜란드
시토 수도회(Cistercian)
시토 수도회는 가톨릭교회의 수도회 가운데 하나이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하얀색 수도복 위에 검은색 스카풀라레를 걸치는데, 이 때문에 이따금씩 ‘백의수도자들’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시토회 생활의 역점은 수작업과 자급자족이며, 많은 시토회 소속 수도원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이나 맥주 제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체적으로 경제를 부양하고 있다.

시토회라는 수도회 명칭은 프랑스 중동부 디종 인근의 마을 시토에서 유래한 것이다. 몰레즘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사 무리가 성 베네딕토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따르기 위한 목적으로 1098년 시토에 대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들 초창기 멤버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수사들은 몰레즘의 로베르토, 시토의 알베릭, 잉글랜드에서 온 스티븐 하딩이었는데, 모두 초창기 시토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30명의 동료들과 함께 1110년대 초기에 시토 대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시토 수도회를 급속하게 확장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2세기 말엽까지 시토회는 프랑스에서 뻗어나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동유럽 등지로 진출하였다.
개혁의 갈망(중세말 시대상황)

1. 중세 교회의 모습
1) 교회가 천 년간 정치와 더불어 세속화 됨
2)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웅장해지고 비대해졌으나 본질은 결여됨
3) 설교가 '라틴어'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영적 공급이 없었고, 라틴어를 아는 자들이나 학자들 그리고 소수 귀족들에게만 예배가 허용됨
4) 세례와 성찬 외 다섯 가지 첨가된 성례(견진례,고해,서임,혼인례,종부)
5)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은 '림보'에 간다고 함(연옥에 대하여서도 주장)
6) 성인들을 위한 기도운동 장려
7) 마리아 숭배와 성인숭배(성자들의 유품들이 늘어남)

2. 국가,정치, 경제, 종교, 문화적 상황
1) 자본주의 발달로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
2) 봉건제도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사회 질서 열망
3) 종교적인 열정
4) 흑사병의 공포
5) 터키인들의 침략
6) 국가주의 발생 : 스페인, 영국, 프랑스가 정치적 독립으로 국가 형성 각자 나라에서 교회와 정치독립과 권위를 주장하게 됨
7) 스콜라 철학의 붕괴 : 중세의 사상적 지주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제론'이 윌리엄 오캄의 '유명론'에 의하여 붕괴
8) 신비주의, 경건주의 운동의 발생

: 30년 전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1483~1546)

1) 루터가 태어나던 날이 '성 마틴의 축일'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마틴 루터'라고 지어졌다.
2) 1505년 7월 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파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승이 됨.
3) 어거스틴파의 수도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와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신앙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신칭의'의 교리를 깨달았다.
4) 1510년 수도사로서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일로 '로마'로 향했고, 이 로마행이 루터의 인생에 큰 변화를 이루는 사건이 되었다.
5) 1515년 비텐베르그로 돌아와 설교를 시작했으나, 당시 로마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고, 이 면죄부의 정당성에 대하여 독일 라이프치하에서 온 수도승 '테젤'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6) 1517년 9월 초, 루터는 <스콜라 신학 논박>을 준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유명론자들'이 말도 안되고 '펠라기우스적'이고 사실은 펠라기우스보다 더 나쁘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의로워진 죄인이 은총의 상태에서 공로적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에서 협력한다는, 초기 스콜라신학자들의 가르침을 정죄했다.
7) 테젤의 면죄부 판매는 당시 제후였던 '알베르트'가 교황에게 대주교직과 주교직을 임명받기 위해 '푸가가'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테젤로 하여금 '면죄부'판매 조처를 하였던 것이다.
8) 면죄부 판매에 분노한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붙였다.
9) '95개조 반박문'은 삽시간에 독일과 유럽 전역에 퍼졌다(인쇄술의 발달로 가능).
10) 루터는 독일 선제후 프레드릭으로 하여금 교황의 법정에 데려 오도록 요청
11) 1520년 결국 루터는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파문
12) 1521년 4월 16일 보름스(웜스) 회의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소집으로 심문
13) 1521년 4월 26일 비텐베르그로 가던 도중에 루터의 친구들과 선제후 프레드릭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14)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에라스무스가 헬라어로 발행한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
15) 멜랑히톤의 도움으로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 출간, 1534년에는 구약성경 출간
보름스 회의(웜스 회의, Worms)
루터 처리 문제로 '찰스 5세'(샤를 5세, 카를 5세)가 소집

보름스는 1122년 헨리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가 서임권 문제로 회의한 곳이다.
레오 10세의 '면죄부'판매가 도화선
루터의 사상 및 저서
[사상]
1) 이신득의 2) 만인제사장주의 3) 성경권위:교황무오 및 교권주의 반대
4) 실제적 경험적 종교 탐구
5)
공재설 주장

[저서]
1)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1520년
2) <선행론>, 1525년
3) <기독자의 자유> : 이신득의
4) <교회 바벨론 포로>, 1520년 : 만인제사장주의

[개혁정신]
1) 율법종교에서 복음적 종교로
2) 교권주의에서 참 자유주의로 발전
3) 의식적 신앙에서 체험적 신앙으로
95개조 반박문 대의
1) 내용 : 연옥,산 자의 사면 문제, 평신도로서의 반대, 면죄부 판매 비판
2) 대의 : 면죄부는 죄를 속할 수 없다
3) 성격 : 라틴어로 기록 및 로마 교회적이다(연옥, 마리아 기도, 화체설 인정). 면죄부의 남용을 반대함, 참 회개 강조
4) 한계점 : 라틴어로 기록한 점으로 읽을 수 있는 대상의 한계 - 루터는 그 시대의 아들이라는 한계
5) 의의 : 의식이 아닌 신앙의 체험을 강조, 성경에서 얻은 내용을 주장
1526년 카를 5세는 '스파이어 회의'(Spier)를 개최
루터에 대한 관용에 대하여 포고령 내림
1529년 독일 황제 빌립이
'마르부르크 회의'(Marburg)
에서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교황에게 무조건 복종할 것을 제후들에게 요구. 이때
이 결정에 대하여 항의하는 제후 6명과 도시들에 대한 명칭으로 '항의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요함
프로테스탄트 용어의 기원
참석자 : 루터, 멜랑히톤, 츠빙글리, 콜람 파더스, 부쳐
1530년 아우크스부르트 회의
에서 카를 5세는 서로 상이한 점들을 토론하여 제후들과의 화목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때
'멜랑히톤'이 대표로 참석하여 루터의 도움을 받아 개신교의 입장을 정리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
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1531년
4월까지 연장 제후들이 황제에 대항하는 공동전성을 다지며
'슈말칼덴 동맹'
을 결성 이것은 최초의 개신교 동맹이었다.
이에 대하여 카를 5세는 가톨릭과도 동맹을 맺게 되는데, 개신교 동맹에 대항하여
'가톨릭 동맹'
을 결성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강호조약
개신교는 증폭된 힘을 이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제후들이 자기 백성들의 종교를 결정 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개신교 제후 아래의 백성들은 개신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개신교는 다른 형태의 개신교가 아니라 '독일 루터교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나중에
'30년 전쟁'
의 도화선이 되었다.
[루터의 사상적 배경]
1) 스승인 '스타우피츠'의 영향으로 성경 연구에 몰입 : 어거스틴의 은총신학을 소개받음
2) 윌리엄 오캄의 사상에 영향 : 마음의 평화와 구원의 확신은 오직 믿음으로
3) 신비주의자에 영향 : 에카르트, 존 타울러, 위셀의 영향으로 체험적 신앙에 영향받음
4) 성경연구를 통해 성경만이 유일한 신앙의 표준임을 배움(시편 22편, 로마서)
[에라스무스와 루터와의 관계]
1. 에라스무스의 주장
1) 기독교의 본질은 평화와 조화의 통일
2) 교리 논쟁 때문에 타 종파를 억압해서는 안됨
3) 개혁은 교리를 통해서 자유의지를 개발하고 진리탐구를 함으로 온건하게

2. 루터와의 관계
1) 루터의 비판 :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데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있지 않다다. 인간의 의지는 짐승과 같아서 주인이 모는 데로 따라갈 뿐이다.
2) 에라스무스의 반대 :
루터가 어거스틴의 신학을 채용함에 대하여 반대, 격노한 에라스무스는 프로테스탄트를 등지고 교황에 의해서 바젤의 사제가 됨.
[루터의 교회관]
1) 무형교회, 유형교회로 구분
2) 거룩한 교회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교제
3) 성령께서 교회로 신자들을 항상 모으시고 지키심
4)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성례만 정당히 거행되면 교회가 설립된다.
5) 교회는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국가는 왼손으로 다스리신다.
[루터의 국가관]
1) 교회와 국가를 구분 : 성도는 자발적으로 국가에 복종
(하나님께서 국가를 세우셨기 때문에 성도는 국가에 복종)
2) 신자는 원칙상 의인이나 실제상 죄인이기에 국가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의인된 죄인)
3) 그러나 종교생활에 방해가 올 때에는 볼복종이 가능
4) 성도는 박해시 망명은 가하나 혁명적 수단은 불가
5) 기독교 지도자들은 통치자의 비행을 비판, 충고할 의무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1) 루터와 마찬가지로 면죄부 판매를 반대
2) 취리히에서 설교자가 되어 주로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전파
3) 개혁의 전환점은 '사순절' 기간동안 '금식'에 대한 문제로 인해 유발(1522년)
4) 사순절 동안에 반드시 금식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 콘스탄스의 주교와 불화 관계로 놓임
5) 루터와 다른 성만찬 문제에 대하여 다른 의견인
'기념설'
주장.
6)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개혁주의자들이 '개혁교회'(the Reed Church)라는 개신교 단체를 결성
7) 그러나 가톨릭의 탄압으로 박해를 받음
8) 1531년 캅펠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여기서 츠빙글리는 사망
9) 츠빙글리의 개혁신학을 이어받은 '헨리 블링거'가 '헬베틱 신앙고백서'(Helvetic)를 만듬
10) 헬베틱 신앙고백서는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목사들, 네덜란드 남부의 교회들, 폴란드와 헝가리의 개혁교회들이 받아들였다.
루터와 성찬에 대한 입장이 다름
중요함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루터와 성만찬 논쟁 벌임 '마르부르크 회의' 참고
츠빙글리의 계승자 '헨리 블링거'
루터의 계승자 '멜랑히톤'
[츠빙글리의 개혁운동]
1) 칼빈과 함께 스위스 종교 개혁자
2) 아무 타협없이 종교 개혁에 착수
3) 종교개혁은 정치적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4) 스위스에서는 성과를 올렸으나 산간지방과 대립
5) 도시와 산간지방간의 싸움에서 전사(캅펠)
[신학]
1) 이신득의, 만인제사장주의, 성경의 권위
2) 신의 의지가 신학의 중심사상
3) 성찬은 기념설 : 상징에 불과
4) 교회와 국가 : 민주헌법, 교권주의배격
종교개혁사
칼빈(John Calvin, 1509~1564)

[생애]
1)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 리옹(노용)에서 태어남
2) 1523년 14세에 파리 소재의 '꼴레쥬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하여 논리학, 철학, 인문과학 등을 거쳐(이후 파리 소재의 꼴레쥬 드 몽테규 대학에 입학) 1528년 석사학위 받고 난 다음 '오를레앙'의 법과 대하에 입학. 법학 졸업
3) 1531년 아버지의 사망이후 자유롭게 진로선택이 가능, 1533년 11월 1일 24세에 니콜라스 콥(Cope)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연설문 작성을 도움(내용은 가톨릭을 공격하고 개신교를 옹호함)
4) 니콜라스 콥의 취임연설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1세'가 니콜라스와 칼빈 체포령을 내림
5) 1533년 칼빈은 '바젤'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 때, 바젤에는 '에라스무스, 불링거, 파렐 등이 거주하였다.
6) 바젤에서 칼빈은 (1) 로버트를 도와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 (2) 그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 저술 함(기독교 강요는 1535년 초판을 시작으로 1559년 5판까지 내게 되었다)
7) 바젤에서 1년을 지낸 후 스트라스부르로 가려 했으나 당시 프란시스 1세와 카를 5세와의 전쟁이 있어서 바로 갈수 없게되어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8) 제네바에서의 하룻밤이 칼빈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곳에는 프랑스의 개혁자 '기욤 파렐'이 있었고, 파렐은 칼빈을 설복하여 함께 종교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9) 그러나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 의회를 통해 추방 당했다.
10) 1538년 제네바를 떠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피난민을 상대로 3년간 목회의 삶을 보냈다.
11)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빈은 부쳐를 만났고 그외 다른 개혁가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다.(특별히 칼빈의 장로교 정치제도는 부쳐의 영향을 받았다)
12) 1541년 제네바 의회를 다시 장악한 칼빈의 친구들로 부터 칼빈은 공식적으로 제네바로 초청되었다.
13)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은 루터가 1546년 세상을 떠난 다음 개혁자들이 칼빈에게 지도를 받고자 찾아왔다.(결국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4) 칼빈 생에에 있어서 많은 대적자들의 공격이 있었는데 단연 '세루베투스 화형' 사건이 그것이다.
(1559년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15) 1564년 그는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6) 칼빈의 사상은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로 이어졌다.
[칼빈의 사상]
1. 성경관
1) 성경의 필요성 :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 위해서 성경이 필요함.
2) 성경의 권위 :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자신의 입을 열어 말씀하시며, 자신의 말로 말씀하시고 계시며, 그것이 글로 적히고 날인되었으며,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칼빈은 성경의 내적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과 말씀은 항상 분리되지 않는다.
3) 성경의 영감 :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며 이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 되었기 때문에 절대권위가 있다.
: 가경(위경)을 인정하지 않으며, 축자영감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보다 위에 둔다. 또한 성경의 통일성을 믿으며 성령의 내적 증거로 성경을 증거하며, 성경 66권 외 다른 계시는 인정치 않고, 교회는 성경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2. 교회관
하나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소명의 중심이 바로 교회이며, 그 교회는 말씀의 바른 선포와 성례의 바른 집행이 있어야 참된 교회이다.
교회는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로 나뉜다.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이하는 것이며,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1) 가견적 교회 :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로 외면적 조직과 정치가 있는 교회다. 그러나 위선자가 포함 될 수도 있다. 불가견적 교회만큼 중요함.
2) 불가견적 교회 : 눈으로 볼 수 없는 교회,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로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들의 모임이며 참 교회이다.

3. 성례관
말씀은 개인에게 선포되는 것이지만 성례의 집행은 모든 회중의 현존과 참여를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교회를 본질적으로 성례적인 교제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례 그 자체로는 은총의 수단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때 효과적인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여기서의 하나님의 개입의 수단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신적 은총의 표, token of divine grace) 동시에 성만찬은 일종의 치료제와도 같은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1) 세례 :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징표이자 그리스도와연합하는 징표로서 교제와 구원의 확인, 소망을 충전시켜주는 예전이다. 동시에 칼빈에게 세례는 단회적인 죄 사함의 의미가 아니라 전 생애를 정결케 하는 징표였다. 그래서 이제 세례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정결함의 능력으로 세례 이후에 의로운 삶과 위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그러나 츠빙글리의 '기념설'과는 다르다)
2) 성만찬 : 칼빈은 빵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의 은총을 제공해 주는 징표로 인식하였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자신의 자식으로 영접하신 후에도 우리를 혼자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필요에 따라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영적인 자양분을 제공해 주고 계신다는 것이 바로 성만찬의 의미였다. 칼빈은 성만찬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하여 실존적 사건으로 이해하며 확실한 임재의 체험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영적인 임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눈앞에서 보고 손으로 만지듯이 그의 실재함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영적 임재설)

4. 윤리관
: 성경과 교리의 생활화

5. 신학의 기초
: 하나님 절대 주권, 하나님 중심 주의

6. 구원관
: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은총), 성도의 견인
헨리 8세(1491-1547)
아라곤 캐서린(1485~1536)
메리 1세(블러드 메리, 1516~1558) -
가톨릭교회의 복권
앤 블린(1501~1536)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
반 가톨릭 적, 종교개혁 추진
제인 시무어(1507~1537)
에드워드 6세(1537~1553)
반 가톨릭(성공회)
클레페의 앤(1515~1557)
캐서린 하워드(1520~1542)
캐서린 파(1512~1548)
- 1534년 수장령이 '영국 국교회의 유일한 지상 수장'은 왕임을 선포한다.(반대하던 토마스 모어, 존 피셔 참수형)
에드워드 6세의 죽음은 왕실의 새로운 정치적 판도를 가져왔으며, 종교개혁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에드워드 6세 통치 기간(1547~1553) 동안 종교개혁이 진행 되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시작
중요함
토머스 크래머(1489년~1556)에 의해서 '공동기도서'(성공회 기도서)를 1549년에 발간 하였다.
메리 여왕 당시에 개신교들은 박해를 받았다. 이때 많은 개신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독일, 스위스'와 같은 대륙으로 옮겨갔다. 당시 300명의 개신교들은 화형을 당하였고, 이때 '토머스 크래머'도 화형 당했다.
에드워드 6세의 '공기도서' 내용중 교황의 권위에 반항적인 기도문을 삭제함으로 종교적으로 양면적인 정책을 시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갈등을 해소 하기 위하여 양편의 공동기도문을 수정하여 '39개 신조'로 된 영국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을 완성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에서보다 훨씬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1)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은 '비텐베르그'와 '바르부르크'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패트릭 해밀턴'
이 루터 교리를 설교하다 1528년 화형을 당하면서부터 서서히 본격화 되었다.

2) 1543년 스코틀랜드 국회는 성서 읽기와 번역을 법적으로 허락하였으나 친불파들은 강한 억압정책을 시도하였고, 그리하여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개신교 설교가인
'조지 위셔트'
가 추기경 비튼에게 화형 당하였다.

3) 위셔트의 화형을 지켜본 사람들은 친불파에 대한 반감이 확대되면서 비튼을 살해하고 '성 앤드류 성'을 점령하여 동지를 모았다. 1547년 위셔트의 동반자요 개신교 목사였던
'존 낙스'
가 그들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4) 존 낙스는 개신교 집단이 모였던 '성 앤드류 성'이 프랑스인에게 점령당하자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19개월 동안 선상 농로 지냈다. 그러다가 영국의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석방되어 영국의 왕실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메리'
(블러드 메리)가 즉위하자 대륙으로 건너간 낙스는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영국 피난민들과 결합했다가.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칼빈'
의 제자가 되었다.
친불파와 친영파
스코틀랜드 교회는 프랑스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 가톨릭 산하의 한 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와서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부는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수하려고 한 반면에 또 다른 이들은 잉글랜드와 보다 밀접한 선린관계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왕실의 혼인문제와 결부되어 소위
친불파(Francophiles)

친영파(Anglophiles)
로 양분되기도 했다.
유력한 '더글라스 가'는 대체로 '잉글랜드'(영국) 편이었고, '해밀턴 가'는 '프랑스' 편이었다.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프랑스에서 석방
영국의 왕실 목사가 됨. 그러나 메리가
즉위하자 대륙으로 건너감.
칼빈과 에라스무스와의 만남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 수학중에 그 학교에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를, '로이히린'은 히브리어를 그리고 '알렉산더'와 '볼마르'는 헬라어 교수로 있었다.
제네바로 건너간 '존 낙스'는 '칼빈'의 제자가 됨.
존 낙스(John Knox, 1513~1572)

[사상]
낙스의 신학사상은 그가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ch Confession A.D. 1560)에 가장 깊이 드러나고 있다.

1) 낙스의 신학은 사도신조를 중심으로 신조중심의 신학을 천명했던 대륙의 개혁신학과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2)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감독주의를 배격하고 장로교회를 수립하려고 노력
3) 교회의 통일성 제시
낙스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을 시작함
1) 1560년 영국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힘의 균형을 이루어 '영불조약'을 통해 프랑스군을 철수하게 만들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영국의 도움으로 성공하게 되었다.

2) 1560년 8월 17일 존 낙스가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초안이 신조로 채택, 제1회 총회를 열고 '교회헌장'을 작성하여, 1561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헌장은 칼빈의 교회정치 제도를 도입하여 '장로교회'에 스코틀랜드 개혁교도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교구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있고 최종적으로 총회를 두었다.

3) 1560년 12월 프랑스 왕 '프란시스 2세'가 죽자
'메리'(스코틀랜드 여왕)
는 1561년 스코틀랜드로 귀국, 이전에 메리가 친가톨릭 정책으로 개혁을 방해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있었다.(메리는 미사를 시행하고 로마교회의 전통을 사수하려고 함)

4) 그럼에도 낙스는 1564년 예배규정을 국회에 통과시켰다.

5) 메리는 그의 사촌인 헨리 큐어트(단리경)과의 사이에서 장차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합왕이 된 영국왕
'제임스 1세
를 낳았고 그는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제임스 4세'가 되었다.
영불조약을 주도한 존 낙스
존 낙스의 후계자
'멜빌'(Andrew Melville)
멜빌에 의해서 종교개혁은 지속되었고, 장로교회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중요함
프랑수아 1세(프란시스 1세)
<친 가톨릭>
개신교 교리에 찬성하지 않음,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자들을 프랑스에서도 점차 증가하자 많은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였다. 1545년까지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어 22개의 개신교 지지 도시와 마을들이 파괴되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프란시스 1세가 기독교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저술한다고 쓰고 있다.
헨리 2세(앙리 2세)
프란시스 2세(프랑수아 2세)
스코틀랜드의 메리와 결혼하였으나
곧 귓병으로 사망하여, 메리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샤를 9세(프란시스 2세 동생)
어머니 '캐더린 드 메디치'가 섭정
<친 가톨릭>
1547년 왕위에 올랐고 그의 부친보다 더 심하게 개신교도들을 핍박하였다. 이 때, 많은 개신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스위스의 제네바 등지로 이주하였다.

1559년 헨리 2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위그노'(Huguenots)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 1561년 캐더린은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신학 토론을 허용하였다. 이 토론은
1561년 9월 '뿌아시'(Poissy)
에서 열렸는데, '베자'의 활약이 컸다.

2)
1562년 1월에는 위그노에게 성 벽 바깥의 예배 집회와 성 안의 사적 집회를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뿌아시' 회담과 관용 법령으로 인하여 프랑스의 개신교는 최고 수준에 달하였다. 이에 반하여 가톨릭 측은 중용 정책에 순응 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3) 1562년 3월 1일
'기즈 공'
은 무장하고 파리로 가는 길에 부하들로 하여금 샹파뉴의 벽에 쌓인 도시 '바시'(Vassy)에서 예배하는 위그노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바시의 대학살'
이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3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루었다.

4) 위그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1570년 8월 '생 제르멩 앙 라이예'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 되었고, 이 조약에 의해 귀족들에게는 완전한 예배의 자유가 주어지고 위그노 평민들에게는 프랑스 각 통치 구역마다 두 곳의 예배 처소가 허락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무장한 4개의 도시(라 로쉘, 코냑, 몽또방, 라 샤리테)가 위그노 수중에 들어왔다. 사실상 위그노들은 국아 안에 있는 무장 국가가 된 것이다.

5)
1572년 8월 18일
샤를 9세의 누이 동생 '발로아의 마게릿'과 나바르 왕국의 '앙리'(헨리)의 결혼식이 파리에서 열렸다. '성 바돌로매'의 날이었던 그 날 결혼식장에 참석한 많은 하객들 특별히 '위그노'들은 결국 '캐더린'의 계획된 살육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 바돌로매의 축일사건'
이다.
기즈공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삼촌이며, 카트린이 섭정을 시작하였을 때, 세력을 장악했으며, 캐더린과 같이 친 가톨릭 세력이다.
중요함
6) 샤를 9세는 대 학살 이후 사망 하였으나, 캐더린은 여전히 왕권을 유지하였다. 1589년 캐더린이 사망하고 마게릿의 위그노 남편인 '헨리 4세'(앙리 4세)가 즉위하였다.

7) 가톨릭과 위그노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나, 외세의 관여를 두려워했던 가톨릭측과 프랑스 귀족들은 결국 '위그노'와 협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598년 그 유명한 '낭트칙령'(Edict of Nantes)
이 맺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위그노에게 모든 공직이 개방되었고, 파리, 랭스, 툴로즈, 리용, 디종을 제외하고는
1597년 그대로 공중 예배가 허용
되었다.

8) 낭트칙령 이후 위그노 교회들은 최고의 번영기를 맞이했지만, 루이 13세 시대의 유명한 재상, 추기경 리슐리외의 중앙집권화 정책과 충돌하였다.

9)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궁정에서 새로운 권력가로 등장했다.

10) 루이 14세가 5살에 왕위에 오른것에 대하여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앤'은 국정을 '마자랭' 추기경에게 맡겼다. 원래부터 리슐리외의 추종자였던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정책을 계속하였다.

11) 마자랭이 사망하고 23세가 된 루이 14세는 추기경의 후임자를 선출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후일 '태양왕'이라 불린 왕은 아무도 자기의 광채를 가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1685년 루이 14세는 '폰탠블루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선언하여 낭트칙령을 폐기
하자 위그노들은 박해받는 순교자의 교회가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법적인 보호 밖에 방치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위스,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들은 고도의 숙련공들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망명은 근접 국가들의 '산업발달'에 도움을 주었다.
중요함
1) '낮은 땅'이라고 불리우는 네덜란드는 서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패권을 쥐고 있었다.

2) 그러나 이곳은 일찍이 '르네상스'의 영향이 밀려왔으며,
'에라스무스'
가 탄생한 곳이며, 개혁의 선구자들이었던
'공동생활 형제단'
과 그 단체를 세운
'그루트'
가 이곳에서 개혁을 추구하였다.
카를 5세(샤를 5세-독일 왕)의 통치하에 있었다.
필립 2세(스페인)
마가렛의 섭정
헨리 3세(앙리 3세, 1574~1589) - 헨리 4세(앙리 4세, 1589~1610) - 루이 13세(1610~1643) - 루이 14세(1643~1715) - 루이 15세(1715 - 1774) - 루이 16세(1774 - 1792)
프랑스의 왕 '헨리 4세'의 아내
'성 바돌로매의 축일 학살'에 결혼
'공동 생활 형제단'은
네덜란드에서 시작
1) 마가렛의 섭정으로 통치되어진 네덜란드는 그녀가 개신교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는 가운데 놓여졌다.

2) 개신교에 대한 박해 가운데서도 네덜란드 개혁파 지도자들은 신앙을 지키며 그들의 사상을 고수하였다. 그중에서 중요한 인물로는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또는
'37개조의 벨직 신앙고백서'
를 작성한
'기도 드 브레'(Guido de Bres)
가 있었다. 그는 1567년 순교했으나, 그가 만든 신앙고백서는 개신교 신앙의 유산이 되었다.

3) 네덜란드의 마가렛 섭정과 필립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탄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귀족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은
'나싸우의 윌림'(William of Nassau)으로, 일명 '오렌지 공'(Prince of Orange)
이다. 그는 최소한 명목상 가톨릭 신자였고, 1573년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며, 네덜란드 독립의 영웅이다.

4) 오렌지 공의 독립을 위한 투쟁 가운데,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1571년 첫 전국 대회가 네덜란드 영토 밖 '엠덴'에서 열렸고, 2년 후에 오렌지 공이 칼빈주의를 받아들였다. 1575년 라이덴에 대학을 세웠고 곧 신학과 과학으로 유명해졌다.

5) 마침내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교황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였다. 17세기 초 칼빈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부인하는 '알미니우스'의 등장으로 개혁교회간 분쟁이 있었으나, 그 결과
1618년 '돌트회의'에서 93개조에 달하는 '톨트 신조'를 작성
하였다. 이 신조는 칼빈주의자들을 표방하는 개혁교회에서 오늘날도 신조로 삼고 있는 고백서이다.
중요함
중요함
급진주의 종교개혁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은 보다 급진적인 주장을 하면서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징]
1)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체성 부인
2) 기존교회의 모든 전통과 제도는 물론, 세례까지 의심
3)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 요구
4) 구원에 있어서 '완벽주의'를 주장
재세례파(The Anabaptists)
1) 기원은 불확실 하나,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시작
2)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퍼짐
3) 은혜의 수단으로 새로운 특별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
4)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 '성령의 내적인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특별히 성령은 그들 안에 역사하여 그리스도와 개종과 회개와 신앙에 대한 지식을 준다고 하였다.

[특징]
1) 모든 유아세례를 거부
2) 참 신앙은 기존 교회나 기독교인들과는 무관
3)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성령의 주관적인 내적 경험에 예속
4) 시민정부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를 주장
5) 군대에 종사하는 것 거부

[계승]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스'에 의하여 그 정신이 재정립되어 '메노나이트'(the Mennonites)라는 종파로 발전.

교회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재세례파'의 후예들을 '침례교회의 원조'
로 보고 있다. 초기 영국 침례파는 160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설립된 침례교회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주의적 급진파(토마스 뮌처)
1) 재세례파 가운데
무력을 동원하여 혁명적인 개혁
을 요구하는 자들
2) 대표적 인물로는
'토마스 뮌처'
가 있다.
3) 뮌처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와 환상 그리고 꿈을 보았다고 주장
했으며, 교회당의 방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했다고 하였다.
4)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
해야 하며
5) 그 방법은
모든 물건을 공유
해야 한다는 것
6)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전복
7)
신명기 3장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적용
할 것
8) 모든
불경건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죽여야 한다
고 보았다.
9)
그의 운동은 독일의 '농민들의 반란'과 합세
되어 뮌처는 혁명의 주도적인 지도자로 등장
10)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행동하는 '루터'등에 대하여 불만
11)
뮌처의 사상은 오늘날도 기독교 국가에서 무력을 통해 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난다.
낭트칙령
1598년 4월 3일
헨리 4세(앙리 4세)가 국가(로마 가톨릭)와 개혁교회간 양심 자유를 용인한 칙령.

1) 예배의 자유 허용
2) 신교도들도 관직 취득권 부여
3) 신교도들도 로마 교회와 같은 권리 부여
4) 안전 보증으로 수개 도시에 병력 허용
1)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은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간의 조약 이었지, 그외의 개신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는 이 조약에서 제외되었다.

2) 또한 이 당시 독일은 여러 작은 통치 기구로 나뉘었기 때문에, 지역마다 통치자에 따라서 종교적인 박해가 지속되기도 했다.

3) 이런 가운데, 1618년년 개신교를 대표하는 복음주의의 연합군과 가톨릭의 신성동맹군이 탄생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
(페르디난트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독일 황제, 보헤미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1578~1637)
그는 열열한 가톨릭 신자였다.
1) 보헤미아에도 개신교들은 박해를 받았다.
2) 보헤미아에서 가톨릭에 대한 강한 반발이 발생
3)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프라그'에 가서 거센 항의를 했으며 그들에게 파송된 '페르디난드의 사절'에게 박해를 가했다.
4) 더 나아가 이들은 왕을 거부하고
팔라틴의 칼빈파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을 그들의 개신교 왕으로 선출하였다.

5) 페르디난드 2세와 개신교의 전쟁은 프라그 근처 '화이트 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은 패배를 하였고 이전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6)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들은 200년간 종적을 감추고 외국 땅에서 버림 받은채 살아야 했다.
박해
반발
페르디난드 2세 시절의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은
존 후스의 후예들 이었다.
보헤미아 개신교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
가 개신교도들을 돕기 위해 출정
1626년 8월 27일 크리스티안 4세는 '틸리'와 '가톨릭 연맹군'에 의해 '루테르'에서 패배하였다.
덴마크 패배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푸스 아돌푸스'
독일을 공격
개신교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1) 스웨덴의 출정을 환영했던 도시 '마그데부르크'를 페르디난드 2세의 군인들이 포위하고 초토화 시킴(지휘관 '틸리')

2) 마그데부르크의 소식을 접한 독일 개신교도들은 구구스타푸스'와 합세하여 '틸리'의 군대와 대전을 버렸으며 구스타푸스는 승리의 행진을 거듭하였다.

3) 독일과 스웨덴의 전쟁은 1634년 뤼첸에서 격돌, 독일 군대들을 격퇴하였으나 '구스타푸스'도 전사.

4) 전쟁은 18년간 지속(프랑스 군도 전쟁에 가담)

5)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평화조약을 맺음 이것이 바로
'웨스트팔리아 화약(베스트팔리아 화약, Peace of Westfalen)
이다.

6) 웨스트팔리아 조약 후, 유럽의 종교분포는 넓게 형성

7) 칼빈주의자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락.(그러나 아직 재세례파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음)
독일 30년 전쟁의 발발(1618~1648)
웨스트팔리아 화약(베스트팔리아 화약, Peace of Westfalen-1648)

[종교에 관한 규정]
1) 가톨릭, 루터, 칼빈파 모두가 동등한 권리
2) 교회재산 소유권은 1624년 1월 10일 현상으로 환원
3) 자유 이주권을 허용, 재산몰수는 불가

[정치에 관한 규정]
1) 독일은 스위스의 독립을 승인한다.
2) 에스파냐(서반아)는 네덜란드를 승인한다.
3) 각국은 자유로 서로 연합하며, 자기 나라와 외국 간에 맹약할 수 있다,
중요함
엘리자베스 1세
엘리제베스 1세 시대의 청교도 혁명

1) 1559년에 두 개의 의회 법령을 기초로 교회 정책을 이루었다.

2) 엘리자베스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만들어 자신이 영국교회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3)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공동기도문'을 수정하고 여러 정책을 수립하였으나, 양쪽에서는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 하였다.

4) 개신교쪽에서는 더 과감한 변화를 요구 하였고, 바로 이들을
'청교도'(Puritan)
라고 불렀는데, 원래 의미는 '빗자루로 잘못된 것들을 쓸어버린다'는 뜻이다.(1560년대 초)

5) 초기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시대에 '예복'(Vestments)을 문제삼았다.(이것이 바로 예복논쟁) 청교도들은 성직자의 예복이 '적그리스도의 옷'이라고 하여 반대, 여왕은 이런 청교도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6) 청교도들과 여왕간의 분쟁은 이후 '예언(Prophesying)모임'에 관한 것으로써, 당시 이 모임은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비공식 종교 회집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이 모임을 교회 개혁을 더욱 심화시키려는 의도로 여겼다.

7) 1570년대에는 다양한 '장로교적 실험'들이 기존 질서의 틀 안에서 시도 되었다. 1572년 런던 근처 '윈즈워스'에서 처음 있었는데, 회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종의 '장로교 교구'를 조직했다. 장로교적인 입장은 1574년에 케임브리지의 학자였던 '트래버스'에 의하여 <교회 권징에 대한 완전하고 평이한 선언>이라는 팜플렛이 발행됨으로써 진전되었다.

8) 1577년 여왕은 켄터베리의 대주교 '에드먼드 그린달'로 하여금 '예언 모임'을 갖는자들을 체포하라고 하였으나, 그린달은 오히려 청교도들을 옹호해주었다. 그러나 그 후임자인 '휘트기프트'때 탄압은 다시 시작되었다.

9) 휘트기프트 때의 탄압 당시 오히려 많은 청교도들이 '장로교적 교회 정치'형태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당시 대표격 지도자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였던 '토머스 카트라이트'였다.

10) 대부분 청교도들은 기존교회 체제 내에 머물면서 개혁을 추진하였지만(국교도), '헨리 배로우, 존 그린우드와 같은 자들은 영국 국회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함으로써 심한 탄압을 당했다.(이들은 비국교도 또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렸다)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1603~1625)
- 장로교 신자
- 존 낙스가 그의 대관식을 거행했음
- '왕권신수설'을 주장(주교 없으면, 왕도 없다)
- 1604년 햄턴 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제임스 1세는 불편한 분위기를 해결하고자 '주교들'과 '청교도들'을 불러들였다. 여기서 제임스 1세는 '의장'이 되었다.

[햄턴 회의](1604년 1월)
1) 논쟁 중 한 청교도가 '총회'(Synod)라는 용어 사용에 대하여 왕을 격노케 함(그 말은 장로교 색채를 풍기는 용어).
2) '노회'란 용어가 곧 감독(주교)들이 장로로 대치되며, 이것은 왕이 왕위에서 쫓겨날 것을 의미한다고 봄
3) 회의는 결렬, 주교들은 300명이 되는 성직자들의 직책을 박탈
4) 그러나 이 회의에서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제안
그것이 바로 KJV(흠정역) 성경이며, 1611년 출판 되었다.
5) 햄턴 회의에서 양심상 영국의 국교회와 교구에 속할 수 없다고 한 분리주의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 할 수 있도록 결정. 이론 인해 '분리주의자들'(비국교도들)은 네덜란드나 영국인들이 정착해 있던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이민
찰스 1세(1628~1649)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공주(루이 13세의 누이)와 결혼, 그는 영국의회의 청교도에 대한 호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찰스 1세는 1629~16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국가를 통치하였다. 이때 왕의 종교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윌리엄 로드'였다. 로드의 정책은 청교도 성직자들을 박해하고, 그들의 예배 조례를 영국국교 형태로 다시 바꾸는 것이었다.

로드는 찰스의 후광을 받으며 소위 '앵글로-가톨릭 전통의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는 켄터베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앵글로-가톨릭 전통의 개혁]
1) 교회의 의식과 성직자의 복장 그리고 예배 통일
2) 청교도들을 박해

- 청교도들은 이러한 찰스 왕과 로드의 탄압정책에 절망하고, 설교의 자유와 교회 조지직자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국 이민의 길'을 택하였다.
1) 윌리엄 로드의 개신교 박해는 스코틀랜드에까지 뻗어나갔다. 그 결과, 영국(잉글랜드)과스코틀랜드는 전쟁을 치루게 되었으며, 이는
'감독들의 전쟁'(1639~1640)
이라 불렸다.

2) 전쟁을 하기 위해 의회의 지원이 필요했던 찰스 왕은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의회는 왕과 로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의회를 지배하고자 하여, 의회와 왕 사이에는 1642년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의회파'와 '왕당파'사이의 전쟁이었다.
의회는 1643년 초 그해 안으로 감독제를 폐지한다는 법령을 통과 시켰다. 교회의 신조와 행정을 위해서 규정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의회는 121명의 성직자와 30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 이렇게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회의'(Westminster Assembly)
는 몇몇 회중교회주의자와 감독주의자를 포함하나 대부분은 장로계 청교도들이었다.

이 회의에서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어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소요리문답>은 항상 칼빈주의의 가장 유명한 해설서로 분류되었다. 일반적으로 이것들은 익순한 대륙의 유형을 답습했다. '하나님의 작정'의 문제에 있어서 이들은 '타락후예정설'이었다. 주된 특색 중 하나는 '모든 인류의 뿌리'인 최초의 부모로부터 원죄를 도출시키는 익숙한 경해 외에도 '행위의 계약'과 '은혜의 계약'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계약 신학'(covenant, or federal theology)의 근원은 '불링거'의 저작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완전한 해석은 '프라네커'와 라이덴의 신학 교수 '코케이우스'의 작품 속에서
중요함
중요함
중요함
올리버 크롬웰(호국경,호민관, 1649~1658)
1649년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정복했고, 1650년 스코틀랜드를 진압했다. 그리고 독립파인 크롬웰은 호민관으로 공화정을 수립 이로써 청교도 신앙의 정치적 승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크롭웰은 극단적인 장로교파들의 개혁을 싫어했으며, 그로 인해 국회가 승인하였던 장로교회의 완전수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스코틀랜드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크롬웰은 유능하고 양심적이며 정치가다우 면모가 있긴 하였지만, 그의 통치는 군사적 귄위로 가득 찼으며, 그 자체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 그의 아들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었으나 사실상 그의 통치력은 큰 힘을 가지지 못했으며 실제적인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였다.
찰스 2세(1660~1685)
모든 시민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이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 후 청교도 사역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662년 새로운
통일령(Act of Uniformity)
이 재정 되었고, 이 법령에 의하면 모든 성직자들은 '공증 기도서'에 있는 모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과중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러한 조항들은 '청교도'들을 교회에서 밀어냈으며, 약 1,800명의 목사들인 규정된 맹세를 하지 않고, 자신들의 직위를 버렸다. 청교도는 이제 영국 국교회 밖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비타협'(nonconformity) 또는 '비국교도'(Dissent)
가 되었다. '장로교인'과 '독립파들'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후자(독립파)

이 때,
'존 번연'(존 버니언)
은 신앙양심의 문제로 투옥되었으며, 그는 감옥에서의 경험으로 <천로역정>을 남겼다. 결국 20년 동안 투쟁해온 청교도들의 공적이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제1 비밀집회법>
: 기도서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와 같은 가족 식구가 아닌 다섯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경우에는 벌금, 감금, 추방 등의 형벌이 가해지게 되었다.

<5 마일 법>
: '거룩한 질서 또는 외양만의 거룩한 질서 안'에 있는 사람, '비밀집회'에서 설교하는 사람, 왕에 대항하는 무장 저항을 저주하는 맹세와 '교회나 국가의 통치에서 개정'의 어떤 시도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도시 공동체 5마일 이내에서 살 수 없고, 또 그의 이전에 목회지 5마일 이내의 지역에서 살 수 없었다.
크롬웰 사후, '왕당파'와 '장로파'들이 '독립당'에 대항하여 왕정을 복구하기로 결심,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를 회복하고 장로회파를 국교회에 흡수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서 장로회파의 지도자였던 '리처트 백스터'에게 주교직을 주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말았다.
왕정 복고
청교도 혁명
제임스 2세(찰스 1세 동생, 1685~1688)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회를 수립하고자 군관의 중요직에 가톨릭파를 임명시켰다. 그는 '자유령'을 만들어 '신앙의 완전자유'를 허락했으나, 이것은 가톨릭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찰스는 프랑스의 강력한 가톨릭 신봉자인 '루이 14세'로부터 비밀리에 '연금'을 받고 있었다.

이로써 비국교도들은 또 다시 타격을 입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임스 2세의 정책에 반대 하였고, 정치적 대응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총독 '오렌지의 윌리엄'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1688년에 '개신교 자유령'을 선포하여 30년 전쟁 이후에 맺어진 지역적인 자유와는 달리 '개인적인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 자유령은
윌리엄

메리
에게 충성을 서약한 자와 로마교회적인 요수를 거부하고 39개조 신조에 서명하고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이 법령으로 다양한 신교의 예배형식이 출현 장로교, 회중교, 침례교 등이 신앙과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윌리엄과 메리는 영국에서만 청교도와 같은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개혁이 난관에 부딪쳤던 스코틀랜드에서도 개신교 복구를 가져오게 하였다. 1690년 스코틀랜드 국회는 1661년 이후 추방당했던 장로교 목사들을 복귀시키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 승인하여 장로회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1707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통합하여 '대영제국'을 이루었다.
동시에 개신교의 자유정신에 따라 스코틀랜드 교회의 독립권이 동시에 인정 되었다.
오렌지의 윌리엄과 영국의 제임스 2세의 딸 메리가
결혼, 이후 제임스 2세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던 '비국교도'들은 정치적 대응을 모색하여 윌리엄에게 지원을 요청함. 후일, 윌리엄과 메리는 영국의 대영제국을 이룩함
네덜란드
오렌지의 윌리엄(참고)
윌리엄과 메리의 통치하에 1690년 스코틀랜드 국회는 1661년 이후 추방했던 장로교 목사들을 복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 승인하여 장로회 선택.

1707년 영국과 하나로 통합. '대영제국'수립.
퀘이커파(Quakers)의 등장
윌리엄과 메리의 도움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시기에, 소위 퀘이커파가 등장하였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 '몸을 떨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다.

이 단체를 결성한 사람은
'조지 폭스'(George Fox)
다.

[특징]
1) 형식적인 예배의 전통적인 의식 반대
2) 참된 예배의 본질은 내적인 것
3) 세례, 또는 성찬 등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음
4) 신조의 고백을 거부
5) 영혼의 조용한 대화, 찬양, 기도 등을 강조
6) 검소한 복장을 함
7) 자신의 '내적 조명'을 의지
8) 성경(기록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소홀히 하는 결과 초래
9) 이들은 박해를 피하여 서인도 제도와 북아메리카에 정착, 1681년 퀘이커 교도인 '윌리엄 펜'이 펜실베니아 식민지를 건설하였다.(초기에는 이 지역을 '실베이니아'로 부르려고 하였으나 '펜'의 이름을 붙여서 '펜실베니아'로 칭하였다.
중요함
중요함
1689년 5월 11일 '윌리엄'과 '메리'가 스코틀랜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중요함
[과학과 합리주의의 발흥]
1. 코페르니쿠스(1473~1543)
<지동설>
이전의 지구 중심 우주관을 태양 중심의 우주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종교재판에서는 정죄되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과학자들은 지속적으로 그의 이론을 홥립시켜 나갔다.

2. 갈릴레이(1564~1642)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명확하게 발전시켜 체계화 시켰다. 그는 '망원경'을 발전하여 우주를 보기 시작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실증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3. 뉴턴(1642~1727)
'만유인력법칙'으로 유럽을 다시 한 번, 흥분하도록 만든 뉴턴은 수학적 인과 관계의 법칙이 우주에 나타난 자연법으로 우주관을 설명하는 근거를 만들어 내었고, 이는 하나님이 우주의 주재라는 신학적 가설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과 위신에 결정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이성의 시대
1. 르네 데카르트(1596~1650) : 프랑스 철학자, 생활은 주로 네덜란드에서.
데카르트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그는 '지식'이란 오직 마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이라고 단정하여 유럽 사상계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시켰다. 모든 개념은 입증될 때까지 의심의 대상이이기에 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말을 남겼다.
데카르트 철학이 영향력을 주었으나, 그 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1) 증명될 때까지는 모든 개념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2) 제대로 증명되려면 수학적 증명의 확실성을 가져야 한다.

바로 위 두 가지 원칙으로 인하여 이후 세계는 많은 변화와 결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2. 바룩 스피노자(1632~1677) : 네덜란드 유대계 철학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더욱 강화 시켰다. 그후 수 백년 동안 경건주의자와 낭만주의자들은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경향을 띤, 스피노자의 작품에 의존하였다.일원론은 '하나'를 의미하는 헬라어 모노스(monos)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만물을 신이요, 본질로 보았으며, 자연으로서 사상과 연장(extention)에서 우리에게 지각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의 초월성을 부인하였고 신을 내재적인 원인으로 규정, 그리고 모든 인간의 인격과 속성들은 그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메이플라워호(Mayflower)는 1620년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 현재의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는 ‘청교도’(프로테스탄트) 개척자들을 수송한, 유명한 영국의 선박이다.
독일의 이성의 시대
3.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
스피노자와는 다르게, 만물의 본질과 바탕은 하나가 아니라 그 수가 무한하다고 보았다. 그는 그 하나하나의 개체를 '단자'(monad)라고 보았다.그는 지식과 이념의 문제에서 우리에게 생득적으로 심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드러내는 데 불과하다고 보았다. 사람은 이러한 '생득적인 진리'와 이념을 이끌어내고 표현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의 해답은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생득적 관념을 해명함으로써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40년을 하노버에서 사사로 있었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재통합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인간의 '지식' 획득에 대한 고민을 한 라이프니츠
영국의 이성의 시대
4. 존 로크(1632~1704) : 경험주의
로크는 라이프니츠와는 다른 대답을 하였던 철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오성에서 생득적인 지식이 공급될 수 있다는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백지'
라고 하였다. 그 백지의 마음에 우리의 '감각'이 형상으로 새겨지고, 그것을 '마음'에 이념으로 형성하여 '지식'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크는 바로
'지식의 합리성은 감각이나 경험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하고, 신의 존재도 인과 관계에서 증명될 수 있다'
고 보았다.

로크는 신앙의 관용에 관한 열렬한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그의 사상은 가연종교인 '이신론'(Deism)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로크의 철학은 18세기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반대하고 나온 철학자
아메리카(미국)
북미 개척지
중남미 개척지
아메리카의 기독교는 주로 구세계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중남미'
는 이민자들이 거의 동질적이고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문명을 강요한 곳에서는, 단일한 기독교 유형으로 전형적인 '로마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다.

'북미'
는 많은 민족들로 인구가 구성되어 있기에, 큰 다양성을 보였고 상호 관용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완전한 종교 자유가 시작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중남미와 북미 전체에서 기독교의 이식은 일반적으로 유럽 기도교 세계 발전의 연장의 일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특별히 '북미'에서는 많은 개신교 교파들이 유럽의 모교회들로부터 독립하면서, 기독교전전통의 '미국화'와 '캐나다화'가 드러났다.
<스페인의 미국 진출>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의 의미있는 모습은 '로마 가톨릭'의 국교화였다. 정교한 수직적 계층 질서 안에서 일하는 세속 사제들이 유럽인 정착민들을 위해 사역하였다. 원주민들의 개종은 주로 '수도원 종단들'의 사역이었다.

[특징]
1) 스페인 왕권의 강력한 지지로,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에서 활동. 수도사들은 '인디언들의 노예화'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면서 선교 체제를 발전시켰다.
2) 프란체스코회, 도미니크회, 예수회들은 중남미의 개종 사역에 있어서 특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프란체스코회]
1) 16세기 중엽, 프란치스코회는 '베네주엘라,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에서 사역에 착수했다. 16세기 말까지 그들은 오늘날의 '뉴 멕시코'와 '텍사스'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들을 설립했다.
2) 1770년 프란체스코회는 '캘리포니아'에 광범위한 선교 중심지를 세웠다. 프란체스코회의 경쟁자는 '도미니코회'였다.
[도미니크회]
1) 1526년 '멕시코'에 이어 곧,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페루'에 나타났다.
[예수회]
1) 예수회의 활동은 훨씬 더 광범위하였다. 그들은 1549년부터 '브라질'에서 광범위한 사역을 전개했다. 콜롬비아는 곧 그들이 가장 성공을 거둔 지역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들은 1568년에 '페루'에 진출 했다.
2) 1572년에는 '멕시코'사역을 시작
3) 17세기에는 '에쿠아도르'와 '볼리비아, 칠레'에서 사역을 확장시켰다.
4) 파라과이에서는 가부장적으로 다스린 인디안 촌락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 수도원 출신 선교사들은 그들이 철저히 헌신해온, 스페인식 로마 가톨릭 기독교를 충실하게 재생산하였다.
5) 예수회의 주도로 인디언을 개종시키려는 진지한 노력들이 여러 종단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프랑스 미국 진출>
프랑스령 '캐나다'는 1604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위그노'가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으나, 그것은 곧 거의 가톨릭에 의해 대체되었다.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
<대영제국 시작>
메리 1세(1689~1694)
오렌지의 윌리엄(1689~1702)
이신론(Deism)
17세기 영국에 나타났던 수많은 분파들 사이의 끝없는 논쟁들과 갈등에 지쳤던 많은 인물들은 편협한 정통성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신론자'
혹은
'자유 사상가'
의 길을 택했다. 이들이 이신론자라 불리운 이유는
'무신론자들과 자기들의 입장을 구별하기 위함'
이었고, 자유사상가라 불리운 이유는
'정통의 제한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
이다. :
이신론은 자연에는 자연법칙이 존재하며 우주는 바로 이 자연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상.

1) 처베리의 허버트(이신론의 선구자)
(1) 진정한 종교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2) 보편적이라는 의미는 모든 이들의 충성을 요구
(3) 모든 인류에게 자연스러운 종교여야 한다
(4) 특별한 계시,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것이 아닌 인간들의 자연적 본능에 의지

[특징]
1)하나님의 존재
2) 하나님을 예배할 의무
3) 예배의 도덕적 책임
4) 회개의 필요성
5) 이승과 내세에서의 상벌
5. 데이비드 흄(1711~1776) : 스코틀랜드 출신 - 회의주의
이신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하며, '이성'에 관해서 매우 비관적 입장을 가졌다.

흄은 로크의 '경험론'을 출발점으로 택한 그는 진정한 지식의 범주란 일반적으로 이성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보다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경험론자들은 경험에 기초한 지식만이 진리라고 했다. 그러나 흄은 우리가 흔히 원인과 결과가 부르는 것을 아무도 보거나 경험한 일이 없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경험론적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신론은 종식되었다. 만약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진정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즉 누군가가 이 세계를 야기시켰다는 이론은 더 이상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특징]
기적을 부인함으로 교회에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기적이 기독교의 가장 신빙성 있는 보증물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기독교의 역사적인 뿌리는 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이라는 '극단적 회의론'이 대두되었다.
이신론을 비판
6. 파스칼(1623~1662)
1) 이신론을 정면으로 반대.
2) 인간의 이성 저 너머에 있는 종교성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 함.
3) 이성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
4) '인간은 단지 하나의 갈대이기에 본성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다'
5) 죽기전에 31세 때에 '얀센주의자'가 되었다.

7. 볼테르(본명: 아루에, 1694 ~ 1778)
1) 일체의 열광주의를 적으로 간주
2) 루이 14세 치세 말기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박해를 목격한 그는 이러한 박해야말로 잘못된 행위로서 영원히 태양왕의 이름에 오점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
3) 당시 유행하던 '낙관적 이성주의'(optimistic rationalism)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짐
4) 상싱으로서의 이성의 사용은 필요하다고 믿음
5) 인간 생활은 이러한 상식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6) 인류의 역사는 우리 자신들과 우리들의 조직체에 관한 발전적 이해 및 이러한 이해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라고 주장
7) 인권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이의 수호를 위한 진보를 의미하는 것
8) 왕조(monarchy)가 정부의 필요한 부분이기는하나, 원래 군주가 아니라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성립된 것이며, 국민들의 권리야말로 존중되고 수호되어야 한다고 주장
9) 볼테르의 사상은 '프랑스 대혁명'의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8. 샤를 몽테스키외(1689~1755)
1) 이성의 원칙들을 정부 조직 이론에 적용하고자 했다
2) 그는 공화 정치야말로 공포에 기초한 독제정치나, 혹은 '명예'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편견을 기초로하는 왕조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
3)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므로 정부가 서로를 규제할 수 있는 삼권으로 분립시켜야 한다고 주장(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9. 장 자크 루소(1712~1778)
1)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보는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왜냐하며 속칭 이 진보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원래의 자연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인공적 상태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2) 이를 정치적 방면에서 파악한다면, 이는 곧 원래 정의와 자유를 수호해야함으로써 피지배자들을 섬기고자 했던 원래의 질서로 귀환해야 함을 의미
3) 지배자들은 원래 국민들의 고용인으로서, 이들의 의무는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4) 종교적 측면에도 적용, 도그마 및 각종 종교 조직체들은 소위 인간의 진보를 특정 지은 부패의 일부라고 주장,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영혼의 불멸, 그리고 도덕적 질서로 구성된 자연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파스칼은 자연종교인 '이신론'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중요함
대륙의 철학적인 이성론자든 영국의 이성론적 경험론자든 그들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지적 힘으로 신을 증명하거나 부인하려는 풍조를 야기
시켰다, 동시에 이러한
합리적인 사고가 신앙을 압도하는 시대를 도래
시킴으로 결국에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기독교 종교도 합리적인 종교로 인식하려는 분위기를 형성
하였다. 이는 곧
기독교의 초월적인 신앙을 무너뜨리는 시도
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신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의지하려는 위험에 빠지도록 하였다. 이들의 합리적인 사상은 근대 사상을 주도한 '계몽주의 운동'(Enlightenment)의 기초를 형성하게 하였다.
서양 기독교는 이 계몽주의 사상의 시대 속에서 '자율'과 '이성의 조화'라는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했다.
<영국령 식민지>
1) 많은 교단들이 유입,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1607년 '버지니아'에 영속적으로 설립되어 이식되었고, 식민 시기 내내 법에 의한 국교회로 남아 있었다.
2) 1693년 '제임스 블레어'는 '윌리엄 메리 대학'을 설립하였다.
3) 버지니아의 북쪽에 인접한 '메릴랜드'는 최초의 영국 독점식민지로서 1632년 로마 가톨릭 교도인 발티모어 경에게 특허권이 부여되었다. 1691년 메릴랜드는 왕실 직할 식민지가 되었고, 1702년에는 주로 주교 대리 '토머스 브레이'의 노력을 통해 영국 국교회가 법적으로 제도화 되었다.
4) 1689년 이후 영국은 가능한 모든 곳에서 국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5) 1706년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1715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에 각각 국교회가 설립되었다.
6) 위그노,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퀘이커를 포함하여, 주민들의 다양한 종교의 혼합으로 인해 이들 국교회들은 무력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의 뉴 잉글랜드 이민 정착>
1) '플리머스, 매사추세츠 만, 코네티컷 및 뉴헤이번'에서 1620~1638년 걸친 개척 사업이 있었다.
2) 교육받은 목사들이 성경을 정확하게 읽었다고 믿고, 서둘러
'하버드 대학'(1636)
을 설립하였다.
3) 초기의 뉴 잉글랜드의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대영제국의 그들의 형제 청교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승인을 환영했고, 그것을 실제 받아들였으며, 언약 혹은 계약 신학을 강조했다.
4) 1662~1665년 코네티컷과 뉴 헤이번이 합병
5) 1691년 매사추세츠 만과 플리머스가 합병
6) 1680년 뉴 햄프셔는 매사추세츠로부터 독립
7) 17세기 말 하버드에 자유주의적 흐름이 나타났다.
8) 1701년 예일 대학의 설립
<북미 개척의 발전>
1) 로드 아일랜드의 개척으로 뉴 잉글랜드는 독특한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2) 프로비던스(Providence)는 1636년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3) 1639년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4)
윌리엄 펜
에 의해서
'펜실베니아주'
가 명명되었다.
뉴 잉글랜드(로드 아일랜드는 제외)는 회중교회가 법적으로 설립
남부 식민지에는 영국 국교회가 법적으로 설립
<17-18세기 신비주의 운동>

도그마의 논쟁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 사이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또 정확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보다 많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에서만 선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신비주의 분파나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낮았으나, 그 추종자들 속에는 보다 높은 교육과 사회 계층 출신들이 섞이게 되었다.
1. 야곱 뵈메(1575~1624)
1) 14살 견습 제화공으로 들어갔으나 도제 생활을 시작한 직후부터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
2) 방랑자가 되어 여행 하는 가운데, 당시 교회의 지도층이 끝없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논쟁들을 통해 '바벨탑'을 세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
3) 설교할 욕심은 없었으나, 자기의 환상들을 반드시 글로 남기도록 명령하신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찬란한 여명>을 쓰게 되었다.

[특징]
1) 전통적인 기독교의 주제들이 마술, 점성술, 신지학, 연금술 등에서 비롯된 관념들과 이상하게 혼합
2) 구체적인 설명 없이 기묘한 은유법을 마구 사용
3) 그의 가르침은 신학자들의 냉정한 교리주의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형식적인 교회의 의식들에 대한 반발
4) 영혼의 자유, 내면적 생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계시들 중요시
2. 조지 폭스(1624~1691)
1) 당시 잉글랜드에 만연하고 있던 여러 교파들이 잘못된 것이며,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확신
2) 소위 교회는 건물들은 위선자들의 집합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3)
폭스는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주장
.
4)
내면의 빛은 모든 인간들 가운데 존재하는 씨앗
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진정한 길
이라고 주장.
5) 이러한 모든 인간들 속에 존재하는 내면의 빛 덕분에 기독교 신자들 뿐만 아니니라 이교도들도 구원받을수 있다고 주장
6) 이러한 빛을 '지성' 혹은 '양심'과 혼란하면 안됨
7)
내면의 및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는 그 어떤 외형적 방법들을 통한 교제보다 우선시 함
8)
조지 폭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종교적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떠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그들을 가리켜 '떠는 자들'(Quakers)이라고 부르기 시작
.
3. 윌리엄 펜
1) 조직 폭스의 추종자중 가장 유명함
2)
'성스러운 실험'이라는 생각을을 함. 이것은 곧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된 도시'를 만드는 것
이었다.
3) 찰스 2세로 부터 펜실베니아 지방을 받고 난 다음, 양도받은 토지를 다시 인디언들에게 대금을 지불하고 구입. 그는 원주민들과 정착민들 사이에 화해 관계를 수립하여 서로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고자 했다.
4) 펜의 노력에 의하여 그 중심지는 '필라델피아'(Philadelpha)즉 '형제 사랑의 도시'라고 불다.
1. 스페너(1635~1705)
'경건주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그는 철저한 루터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1) 박사 학위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하면서 '경건의 모임들'이라 불리우는 성경 공부 및 경건회 모임 설립
2) 16세기 종교개혁이 교리적 논쟁으로 중단된 것을 다시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


[특징]
1) 만인제사장설을 통하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 책임에 중점을 두도록 제안
2) 소그룹 운동이 효과적이라고 제안
3) 목회자 후보자들은 '진정한 기독교 신자'인지 시험해봐야 한다고 주장
4) 설교자들에게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을 억제하도록 요청
5) 당시 기존 교회의 교리에 대하여서는 비판 없음
6) 교리는 개인적 신앙의 대용물이 될 수는 없다.
7) 루터보다는 칼빈에 가까웠다.
8) 계시적 종말론을 주장하며, 그의 때에 계시록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고 믿음
9) <경건의 열망> 저서
2. 프란케(1663~1727)
스페너의 뛰어난 추종자로 루터란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라났다.그는 할레 대학교 교수로써, 경건주의와 전통 루터란 신학 사이의 관계에서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스페너와 프란케는 루터란 출신이었으나,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개혁파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1707년 경건주의자들을 깊이 존경했던 덴마크 왕이 인디아에 있던 그의 식민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자 했고, 이때 프란케가 있던 '할레 대학'에서 가장뛰어난 두 제자(바돌로메우스 지덴바르크,하인리히 플루트차우)를 보냈고, 이들의 선교소식은 독일에서 경건주의자들 사이애 흥미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
프란케의 지도 아래 할레 대학교는 선교사들의 훈련 중심지가 되었다.
3. 진젠돌프(1700-1760)
열열한 경건주의자였던 그의 부모는 그를 할레 대학교에 보내어 프란케 밑에서 수학하도록 했다. 이후에 결혼하여 '드레스덴'(Dresden) 궁정에서 섬기게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진젠돌프는
'모라비안들'
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젠진돌프는 이들에게 자기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정착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창설했는데, 이에 깊은 매력을 느낀 진젠돌프는 궁정에서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했다.

[특징]
1731년 덴마크에 머무는 동안 진젠돌프는 루터란 선교사 한스 에게드에 의해 개종한 일단의 에스키모인들을 만남으로 여생을 뜨겁게 불태울 선교열에 타오르게 되었다.

1) 1732년 카리브에 최초의 선교사들을 파송
2) 수년후에 아프리카, 인디아, 남아메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 등에서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3) 펜실베니아의 베들레헴과 나사렛, 노스캐롤라이나의 살렘 등에 선교부를 설치
모라비아 공동체는 '진젠돌프'에게 영향을 주었다.
존 후스의 계승자들인 '모라비안들' 진젠돌프와의 만남
4. 존 웨슬리(1703~1791)
영국에서 태어난 웨슬리는 옥스포드에 진학해서 학문과 경건에 뛰어난 인물로 각광받았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 조지 휫필드와 함께 성경공부와 성경읽기등을 하는 '신성한 모임'( Holy Club)을 결성하였다. 후일 이와 같은 생활 방식을 따라서 나온 용어가 바로
'감리교'(Methodist)
이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웨슬리는 그의 동생과 함께 선교사로 임명받아. 1735년 미국 조지아 주의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가다 큰 풍랑을 만났고, 1735~1736년초까치 모라비안 제 2진이 조지아 주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탔던 그 배 안에서 큰 풍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희망의 의지를 보이는 '모라비안들'을 통해 감화를 받는다.
미국 사바나에 도착하여 모라비안 선교사인 슈팡켄베르크를 만나 다시 감화를 받고, 1738년 5월 24일 '알더스게이트'에 있는 모라비안의 모임에 참석 웨슬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 웨슬리는 '진젠도르프'를 만나 교제하였으나, 그들의 지나친 신비주의나 주관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웨슬리는 신비주의 보다는 더 체험하고 폭넓은 신앙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성과]
1) 그의 사후 노예제도 철폐운동이 그의 영향으로 나타났고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도 기여하였다.
2) 웨슬리의 열정은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3) 웨슬리의 세력이 확장되어 '감리교단회'를 창설감리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설립된 것은
1779년이었고, 웨일즈 감리교회가 최초의 감리교회
였다.

[특징]
1) 대부분의 교리는 칼빈주의였다.
2) 예정과 자유 의지에 있어서 웨슬리는 전통칼빈주의에서 벗어난 알미니안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경건주의는 신학자들의 '교리우선주의'와 철학자들의 '이성주의'에 대한 응답이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경건주의'(Pietism)라 하면 단지 스페너와 프란케가 이끌었던 독일에서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진젠돌플'와 '웨슬리'까지도 경건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경건주의 운동의 장점]
1) 독일에 생동하는 신앙을 불러일으킴
2) 목사들의 영적 능력과 설교의 질을 향상
3) 청년들에게 기독교 훈련의 실천을 일깨워 주고, 평신도의 교회생활 확장을 가져옴
4) 성경에 대한 친숙함과 신앙생활의 구체화를 가져옴

[경건주의 운동의 단점]
1) 공로사상에 치우침
2) 세상에 대한 금욕적 태도
3) 경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신앙적인 질타
4) 신앙에서 지적 요소의 경멸
5. 조지 휫필드(1714-1770)
존 웨슬리와 함께 '신성한 모임'(Holy Club)의 일원이었던 휫필드는 웨슬리가 알더스게이트에서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을 웨슬리보다 3년 앞서 경험하였다.
그는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고, 조지아와 잉글랜드에서 주로 설교하였다. 특별히 공업도시 '브리스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휫필드는 '언팅던 백작부인'의 도움으로
'칼빈주의 감리교회'(Calvinist Methodist Church)
를 조직했는데, 그 중심지는 주로 웨일즈 지방이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함께 사역 했으나, 어느 순간 신학적 차이로 인하여 갈라지게 되었다.

[특징]
1) 웨슬리와는 다르게 예정과 자유의지에 있어서 칼빈주의였다.
2) 전통교리와 복음주의적인 열심과 전도가 서로 상충하지 않는 진리를 보여주었다.
3) 예배의 중심을 성찬식이라고 보았다.
4)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 성공회의 공식 예배를 통해 성찬식을 가능한 한 많이 갖도록 원하였다.
영국교회의 부흥운동
<18세기 북미신앙과 1차 대각성 운동>
북미에는 다양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였다. 뉴잉글랜드에는 '루터교, 칼빈주의파, 장로교파, 독립가, 퀘이커파, 로마 가톨릭파, 중생파, 형제파, 신광파, 계약파, 브라운파, 분리파'등 각종 교파와 종교들이 정착하였다. 이런 교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사는 동안 이들에게 신앙의 영속적인 영향을 준 운동이바로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이었다.
50년간 지속되 이 운동 역시 독일의 경건주의나 영국의 복음주의 부흥과 마찬가지로 '합리주의'의 팽창과 문화의 혼란 속에서 발생하였다.

대각성 운동은 뉴저지의 라리탄 계곡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부터 일어났다. '플렝이후이센'이라는 사람은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좀 더 일깨우며 생생한 신앙 지식을 가지도록 6년동안 부흥운동을 하였고, 이 불씨가 미국 전역으로 부흥의 물결이 되어 흘러갔다. 이때 영향을 받은
'윌리엄 테넌트와 그의 아들 길버트 테넌트'
는 영국 청교도의 확신에 따라 교육에 열중하여 당시 필라델피아 북쪽 오늘날의 프린스턴에 프린스턴 대학의 전신인
'로그(Log)대학'(통나무대학)
을 설립하였다. 윌리엄 테넌트는 원래 영국의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미국에 와서 장로교에 가입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두 개의 장로교가 있었다. 첫 째, 청교도 계통으로써 '신앙을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것'에 최고의 관심을 가진 부류. 둘 째, 스코틀랜드 장로교로써, '정확한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둘은 결국 대립을 하였고, 청교도 측을 따르던 테넌트 가는 뉴브룬스윅에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는 문제로 인하여,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을 대표하는 필라델피아회의 구파(반테넨트파)와 청교도 진영인 뉴욕종교회의 신파(테넨트파)와로 분열되었다.

이때,
'조지 휫필드'
가 미국에 와서 미국대각성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분열되었던 '구파와 신파'는 다시 결합되었다. 그리고나서 이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
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1701)
로그 대학(1735, 구 프린스톤 대학 전신) - 뉴저지 대학 - 구 프린스턴 대학
<통나무 대학>
예일 대학(1718, 초기 코네티컷 대학)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 출신
웨슬리 신학에 대한 정리(추가자료)

[주장]
1) 하나님의 은혜는 무차별적이다.
2) 지옥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3) 원죄는 믿으나 완전 타락은 불신
4) 구원에 대해서는 자기 확증을 얻을 수 있다.
5)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

[조직]
1) 비 사제적 감독 정치
2) 중앙집권적 조직
3) 감독은 총회에서 투표, 목사는 감독이 파송
4) 직원은 목사, 장로, 권사, 속장, 유사, 탁사
1차 대각성 운동은 먼저
'조지 휫필드'
로부터 시작하여
'조나단 에드워즈'
로 하여금 이어지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를 통해 사람들이 영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교회들은 부흥하게 되었다. 그리고 1차 대각성 운동이 미국교회에 가져다 준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미국형 칼빈주의'
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대각성운동 주역들의 노력으로 북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모습도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예일 대학'

'통나무 대학'
출신들은 '체험과 감격'을 신앙의 본질로 보고 부흥운동을 지지.
'하버드 대학'
출신들은 '이성과 상식'을 강조하며 부흥운동을 반대.


[대각성 운동에서 영향권 밖에 있던 루터교]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제대로 받지 않은 교파는 루터교였다. 대각성 운동에서는 벗어났으나, 독일 할레에서 온 '물렌베르트로'인해 이주해 온 루터교인들 사이에서도 자체적으로 경건주의 열의가 마치 부흥처럼 번져갔다. 경건주의와 정통사상이 잘 조화시킨 전통을 만들어
1748년에 최초로 미국 내 루터회의가 조직
되었다.
옛 빛파(Old Light) - 보스턴의 촌시(Chauncy)를 중심
새 빛파(New Light) - 대각성운동 주역들 중심
1차 대각성 운동(1735-1755)과 분열
1741년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신파(New Side)와 반대하는 구파(Old Side)로 분열
부흥운동을 지지
부흥운동을 반대
구파와 신파의 차이점.

1. 목회의 자격
구파(Old Side) : 목회의 자격을 유럽이나 뉴잉글랜드의 대학(하버드) 졸업자로 제한하여 목사의 수준 저하를 막고자 함
신파(New Side) : 구파가 목사의 학구적인 자질만을 강조하는 것은 통나무 대학 출신들을 배제하려는 그릇된 의도라고 봄.

2. 신학적인 문제
구파(Old Side) : 대체로 관용적이어서 합리주의에 빠져 원죄설을 부정하고 예정론을 배척하는 이들을 수용(신앙적 보수와 학문을 강조)
신파(New Side) :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면서 부흥운동을 지지(경건과 교회의 부흥을 중시)

[미국 장로교안에 있는 양대 전통의 차이]
1. 구파(Old Side - Old School - Old Light)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출신 장로교는 '개혁주의 유산'에 대한 개념을 '높은 교회'(High Church)나 강조된 객관주의와 권위주의적 경향을 갖는다. 이들은 18세기에 구파(Old Side)라고 불리웠고, 19세기에는 구학파(Old School)라 불리웠다.

2. 신파(New Side - New School - New Light)
영국 청교도나 뉴 잉글랜드 청교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들은 '개혁주의 유산'에 대한 개념을 '낮은 교회'(Low Church)나 강조된 주관주의와 권위적인 경향을 갖는다. 이들은 18세기에서는 신파(New Side)로 19세기에는 신학파(New School)로 불리웠다.
1758년 구파와 신파 연합
구학파(Old School) :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출신들
신학파(New School) : 뉴 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했던 사람들
2차 부흥운동(1790-1840)
2차 부흥운동은 장로교 이외의 침례교와 감리교가 주도하였고, 칼빈주의적 설교보다는 '회심 체험'위주의 '복음주의적 운동'이었다. 그리고 서북 개척의 확장과 함께 교회 수의 증가는 목회자 수급의 필요성이 동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 2차 부흥운동의 중심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손자
'티모티 드와이트와 나다니엘 테일러,베넨트 타일러,리먼 비처
였다. 그리고 부흥의 초기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몇몇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2) 그리고 2차 부흥운동 중에 설립된 단체들은 '노예 제도 폐지-아메리칸 식민협회, 금주 운동-미국 금주협회 등 사회문제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3) 1800년대 2차 부흥운동이 미국전역을 휩쓸면서 장로교 안에 선교열을 고취하였다.

4) 그러나 19세기 중엽 부흥운동은 전혀 새로운 그러나 이후 '칼빈이 없는 칼빈주의 신학' 태동하게 만든
'찰스 피니'
가 2차 부흥운동을 이어가게된다.
옛 빛파와 새 빛파 분열의 틈으로, '알미니안주의'와 '유니테리안주의'가 급적으로 번식하게 되었다.
미국 교회사
시초부터 북미의 영국령 식민지들은 상당한 독립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18세기 후반부터 식민지에 대한 직접 통치를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식민지의 주민들은 이러한 왕실의 간섭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양측의 투쟁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1) 영국인들은 식민지에 17개 연대를 파견했다. 이것은 식민지의 보호를 위한 것으로 간주 할 수 없었던 개척자들은 군대를 탄압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2) 세금이야말로 계속적인 갈등의 초점이었다. 왕실은 식민지가 당연히 정부의 비용을 담당해야 한다고 결정 했는데, 이러한 비용 가운데는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던 병력의 유지비도 들어있었다. 이를 위해 영국 정부는 일련의 세금들을 신설했다.

3) 인디언들의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정치적, 도덕적 이유 때문에 백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서 토지를 점유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가난한 백인들은 새로운 토지를 소유하고자 했고, 이미 토지를 가진 지주들과 투기가들은 인디언들의 토지를 식민화하기 위한 회사들을 조직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4)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770년 영국 병사들이 보스턴에서 군중에게 발포하여 다 섯 명이 생명을 잃었던 사건을 통하여 이제 영국 군은 완전히 외국군으로 간주되어 위협에 직면한 식민지 민병대들이 무기와 단약을 비축하기 시작.

5)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차 사건 : 관세에 흥분한 시민들이 싼 관세를 통한 차 공급을 거부하며 342상자의 차를 바다에 버림

6) 1775년 영국군이 이러한 탄약고들 가운데 하나를 파괴하고자 민병대와 공개적 저항의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7)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대륙의회에서 13개 식민주가 독립 선언, 미국은 영국의 통치하에서 벗어났다.

8) 그리고 정부 조직은 1789년에야 가능해졌기에 그 기간 동안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어야 했다.

[결과]
1) 미국의 새로운 정부의 인물들은 이미 유럽에서 유행하던 '합리주의'나 '이신론'(Desim, 자연신론)의 영향을 받았다.
2) 이전보다 국가 위주의 정책이 이루어짐
3) 종교제도는 '정교분리 정책' 제정(1785년)
4) 각 주의 종교 관여와 종교로 인한 과세를 금지
5) 헌법상 공직 위임 시 종교상 시험을 금지
6) 추가 헌법에도 종교 설정이나 신앙 금지의 법률제정을 금지
찰스 피니(1792~1875)
1) 뉴욕북부 지방의 젊은 변호사
2) 1821년 회심한 그는 복음주의적인 여정을 시작했으며, 공식적인 신학교육도 별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의 목사가 되었다.
3) 부흥 운동 방법으로 '새로운 방법'이라고 알려지게 된 양식 사용
(1) 예배의 순서를 갑자기 바꾸기
(2) 예배를 연정하는 것
(3) 거칠고 통속적인 말을 사용하는 것
(4) 기도와 설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
(5) 예배시 설교단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것

4) 이러한 시도의 효력은 뉴욕 로체스터 부흥운동(1830~1831)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5) 부흥회의 강도와 횟수는 1840년 줄어드는 듯 하다가 1857~1858년에 다시 새롭게 일어났는데 전국적으로 수천 개의 교회를 휩쓸었다.
독립전쟁의 여파로 미국의 각 교파들이 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교단으로 서로 다른 독자 노선을 가고 있을 때, '보편주의'(Universalism)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칼빈주의자'였던
'존 머레이'
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특수한 사람들만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전 인류를 위해 희생당하셨다고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교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790년 그를 따르는 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첫 모임을 갖고 1803년에는 신조를 만들어 교회를 정식으로 창설하였다. 주로 가난하고 신분상 하류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예제도 폐지 논쟁
1) 1830년대 노예제도를 중심으로 교회가 분열함
2)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은 '노예제도 폐지론'에 가까움
3)1820~1830년대 사회적 요인의 변화에 따라 노예제도에 대해 침묵함
4) 적극적인 노예 폐지 운동가 :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루이스 테핀, 아서 테핀, 미국노예폐지협의회(American Anti-Slavery Soceity)
5) 대학 중심의 노예 폐지 운동 : 1832년 개교한 후 '찰스 피니'가 교수직을 감당한 '레인 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와 오벌린 칼리지(Oberlin College) 중심의 노예폐지운동
6) 부흥운동과 노예폐지 운동 : 부흥운동의 주역인 찰스 피니와 조지 번의 주장
독일교회와 18세기 계몽운동

영국에서 '이신론'(자연신론)이나 '합리주의'가 일어난 동안 독일에서는 '경건주의'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경건주의 운동은 신학적인 지도자나 체계를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공백 기간이 지속되자 그 틈을 비집고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독일 계몽주의는 기독교에서 초월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의 자연 종교 차원으로 끌어내렸으며, '진리와 도덕'만이 기독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선생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19세기 독일 신학사조를 잉태시키는 효시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성경 연구에서 비판저긴 방법론의 터전을 이루어 나갔다.
19세기 독일교회의 신학사상

1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사조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1) 독일의 라이프니츠나 볼프와 같은 이는
'모든 지식은 인간의 생득적인 순수한 이성이나 단자에서 온다'
고 보았다.

2) 영국의 흄이나 로크는
'모든 것은 외부로 오는 경험에 의해 주어질 뿐 내적인 생득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단언하여였다.

3) 생득적이든 외부에서 인식되든 이성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사고에 집착해왔던 양파와는 달리
'감정에 호소한 낭만주의자들'
이 있었다.

이러한 18세기의 모든 사조를 비판하고 통합하면서 새롭고 종합합적인 사조를 불러온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
였다.
10.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주장]
1) 로크가 주장하는 것 처럼 마음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은 이 법에 의해 분류된다. 이것을 범주라고 규정.
2)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는 법(경험론)과 마음 안에 있는 법(생득적인 것)의 소산이다.
3) 신이나 자연 종교를 객관적으로 다 서술할 수 없다
4) 그러나 인간이 절대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행동을 할 때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같은 감정을 의식한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 보이신 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5) 그러므로 교회란 이 도덕적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의 공동체라고 했다.
6) 칸트가 기독교에 공헌하는 바는
'이성주의와 낭만주의의 극단을 피하고 인간의 심원한 감정을 실천적인 종교의 확신과 도덕적 행동의 기초로 보았다는 것'
이다.
7) 결국 그의 이론은
기독교 진리를 도덕적 실천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사람들의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인간 감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해 하려는 판도를 열었다.
본 프레지는 강도사 고시 준비를 하면서 만들어본 '교회사' 프레지 입니다. 단순히 '암기'를 위한 '교회사'는 오히려 신학함과 신앙에 있어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1차 작업으로 강도사 고시용으로 만들어 본 프레지 이지만, 강도사 고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더욱 디테일한 '교회사 프레지'를(초,중,근-현대)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모쪼록 부족한 가운데 조금이나마 바른 신학함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아직 미비한 부분들은 계속해서 추가 합니다.)

박민현 전도사 올림.

초대교회의 분류 방법(로마제국)은 라은성 교수님의 온라인 강의를 통해 정리했습니다. 이후에 참고한 서적 목록은 완성 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교회사 연구'에 내재한 위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매우 후회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종교사 연구에 내재하는 위험입니다. 저는 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그리고 교회의 위대한 인물들과 운동들의 역사에 능통한 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분야에 자기들의 온 삶을 바쳤습니다. 세 사람 모두 18세기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영광스러운 신앙 부흥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책을 읽는 데 자기들의 삶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과목, 학문의 소재, 역사적 관심거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숨은 영에 대해서는 하나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접근법에 항상 따라다니는 위험이며, 이론적인 접근법에 대한 하나의 예입니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마틴 로이드 존스 저, 서문강 옮김, pp.55-56.

<울프(볼프)주의>
계몽주의는 결과적으로 '울프(볼프)주의'라는 신학사조를 계몽주의는 '크리스찬 울프(볼프)'(1679~1754)에게서 기원되는데, 그는 '수학'을 모델로 삼고, 어떠한 것도 충분히 이성적 기초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라이프치히의 '이성 충족의 원칙'을 토대로 신학을 세웠다.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추구한 것이다. 이성의 도움을 얻어 전통적인 교리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니올로기>
계몽주의는 '니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제 2단계로 접어 들었다. 신신학(neo=New Logie=theology) 또는 '합리주의'라 불리우는 니올로기는 '계몽주의 운동 과정상의 한 신학 단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울프주의가 이성의 도움을 얻어 전통적인 교리를 지키려고 한 반면에
니올로기는 '도그마에 대해 의식적으로 비판'
한다.

이들은
원죄와 삼위일체의 교리는 물론 전통적 신학에서의 기독론까지도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 부정
하였다.
교의의 내용이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고, 교의가 인간의 발전 산물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성경을 역사 비평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성경이 당시의 시대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니올로기의 대표적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요한 세믈러'와 '고트홀드 에프라림 레씽'이었다.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세믈러
는 정통신학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원래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말은 그의 저술의 제목(Institutio ad doctrinam Christianam liberater discendam, 1744)에서 유래
하였다.

세믈러의 특징 세 가지
1)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한다. 도덕적인 완전성과 참된 내적 축복을 말하는 본문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봄
2) 종교와 신학의 구분, 역사적 비판적 성경 연구를 주저하지 않고 수용한다.
3) 공적인 종교와 사적인 종교를 구분한다.
<백과사전파>

볼테르에 영향을 받은 '백과사전파'는 계몽주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볼테르 사상의 영향을 받아 '회의주의'와 '무신론'으로 흘렀다. 이들은 35권의 백과사전(1751~1765)을 발행하여 계몽주의 운동을 확산시켰다. 백과사전파의 대표적 인물은 '디데로트'와 '달람베르트'이다.
루소는 '백과사전파'들의 이성주의와 반종교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11. 레싱(1729~1781)

레싱은 당대의 가장 예리한 사상가요 문예 비평가로 알려졌다. 그가 편집한 <울프(볼프) 단편집>은 급진적인 계몽주의 사상을 확산시키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는 종교의 본질을 모든 역사적 계시와는 독립적인 순수한 인본주의적 도덕성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쓴 <인류의 교육>은 19세기 독일 전역을 휩쓸었던 개신교 자유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용어 기원
울프(볼프)에게 영향 받음
라이프니츠에게 영향 받음
루소에게 영향 받음
칸트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
레싱은 울프주의를 이끌어 왔다.
15. 슈트라우스(1808~1874)

헤겔과 바우르의 영향을 받고 독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튀빙겐 대학의 교수였던 슈트라우스는 지상에서의 예수의 생에 관해 성경이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보고, 이것은 예수를 한 인간으로 보고 관찰할 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복음서의 '기적'은 '신화'라고 보았다.
그리고 제자들이나 초대교인들이 예수를 초인간으로 보려는 데서 파생된 신화 조작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걷어내고
'인간 예수'에 대한 모습을 볼 때 진정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16. 벨하우젠(1844~1918)
1) 성경의 영감, 통일성, 기자들에 대한 정통적인 가르침의 반대입장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줌
2) 유럽과 아메리카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침.
17. 리츨(1822~1889)

독일 신학은 19세기에 급격히 변화하면서 '자유주의 물결'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 신학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때
기독교 신앙을 '도덕적 가치'로 규정한 자유주의의 선구자인 '리츨'이 등장
하였다.

리츨은, '칸트'의 도덕적 감정이 실천적 확실성의 기초라는 이론과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감정을 개인적인 의식의 규범적 가치로 인식해서는 안되며,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의식은 사변적, 추상적 지식과는 관계없이 실제적이고 인격적이어야 한다
고 하였다. 이런
종교적인 의식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의 영감설은 도출할 필요가 없고 일반적인 역사적 연구 방법만 가지고도 증명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리츨은 인격적인 관계의 강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구원의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도덕선생으로 계시
되었다'고 하였다.
18. 하르낙(1851~1930)

리츨을 거쳐서 그의 영향을 받은 '하르낙'이 나왔고, 1890년대에는
'종교사학파들'
이 독일 교회에 등장하였다.
<종교사학파>
종래의 기독교의 우월성은 인정하지만, 종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보편화하여 기독교를 일반 종교 중의 하나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를 고대 극동 아시아의 제 종교와 같은 배경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서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저술한 '트뢸취'(1865~1923)가 있었다.
1. 19세기 영국의 개신교

17,18세기에 청교도 혁명과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는 영국의 개신교에 영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흥의 물결을 일으켰던
개신교는 '저교회'(low-church)파
로 남게 되고,
국교회(영국 성공회)가 다시 회복되어 '고교회'(high-church)파
가 기세를 몰아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광교회'(broad-church, 자유주의적 운동)파
도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 사역자들이 속한 복음적 단체로는 '클라팜'파가 있었다. 이 단체의 회원이었던 사람이 바로 영국의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을 인도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
였다.

1) 19세기 영국의 가장 훌륭한 설교자는
'찰스 스펄전'(1834~1892)
이었다. 그는 마지막 청교도라고 불리는 설교의 대가였다.

2.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방해
1)
옥스퍼드 운동(혹은 소책자 운동)
으로, 이들은 그 시대에 나타난 신앙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논문집을 발행하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명칭으로 불렸다. 이 운동은 영국 국교회 출신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대표자들은 '존 헨리 뉴맨, 페이버, 존 케이블, 퓨지'등이다. 이들은 로마가톨릭으로의 복귀사상'을 주장
하면서, 교회는 16세기 이전의 성직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 가톨릭 재개혁 운동
(2) 종교침체를 구출
(3) 건실하고 순수한 교회 육성
(4) 도덕 재무장
(5) 교리와 규칙을 지키게 한다.

2)
19세기 복음주의의 확산을 약화시킨 사건은 바로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이었다.
이 진화 사상은 19세기 유럽인들의 사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이제 과학만이 낡아빠진 기독교를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루소, 버틀러, 흄, 칸트'에게 일격을 받으면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이들은 이성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기초들에 의문을 제기하였던 18세기의 사상가들이다.
독립 전쟁에 따른 교회의 영향
미국의 독립전쟁의 과정과 결과
[독립선언서]
1) 자연법(이신론) 사상과 프랑스 인권선언의 사상을 계승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마스 제퍼슨 5인이 초안
2) 정교분리를 최초로 선언하여 법령을 재정
독일(루터파) 경건주의 운동의 과정
17-18세기 신비주의 운동
1. 윌리암 틸링크(1579~1629)
1)개혁파 내의 경건주의 성격을 지닌 초기의 인물
2)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받음
3) 1612년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미델베르그의 목사가 됨.
4) 중생의 경험과 삶 속에서의 주님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설교를 통하여 많은 감화를 끼침
5) 삶의 현장에서의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을 통해 당대인들에게 적지않은 감화를 주었음
6) 신비주의로 기울였음
2. 콕세이우스(1603~1669)
1) 칼빈이 발전시킨 계약사상(신약과 구약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으로 보는 것)을 근거로 '계약신학'을 발전시킴

[경건주의 태동에 준 영향]
1) 성경 어느 한 부분만을 즐겨 읽어서는 안되며, 성경 전체를 다 읽고 영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2) 구속사(Heilsgeschichte)라는 용어나 '인간 교육' 등이라는 말을 도입하여 사용
3) 재림에 대한 기대와 신앙에서 선교에 대한 긴급성을 읽깨움
3. 운데리히(1635~1693)
1) 독일의 '교회 안의 집회'(Konventikel)를 시작
4. 네안더(1650~1680)
1) 계약 신학의 영향을 받아 '언약의 노래'를 작사하여 많은 감화를 끼침
5. 게하르트 테르스팅겐(1697~1769)
1) 독일에서 상업을 하다가 경건주의 집회에서 회심,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집회 인도자가 되었음
2)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
3) '가톨릭의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감정을 강조,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더욱 강조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은 체계적인 움직임 속에서 진행되기 보다는 '개별적'이고 '단편적'이며,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특별히 화란은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일찍이 '돌트 회의'에서 극단의 칼빈주의가 알미우스 같은 신학자들의 반대를 받으면서 두 신학체계를 추종하는 자들 사이에 융화적인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
슐라이어마허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한 신학적 원리인
'인간학으로써의 신학'
을 공개적으로 주창했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는 17세기의 교회의 성장을 목적으로 1세기의 기독교의 모습에서 '문화적 상관성'을 찾아서 17세기의 기독교와 시대의 문화(계몽주의)와의 결합을 위한 신앙과 신학을 '개종' 혹은 '개혁'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문화적 상관성'이 '교회의 성장'(교회의 목표를 성장에 둠)에 큰 영향을 주고있다고 생각함.
14. 바우르(1792~1860)

헤겔의 발전 이론을 '신약성경 연구'에 적용
하였다. 헤겔의 이론을 받아들인 그는
'튀빙겐 학파'
의 창시자로 모든 역사적 발전은 '정, 반, 합'의 변증법적 원리에 적용된다고 하였다.
13. 헤겔(1770~1831)

슐라이어마허 이후에 독일 신학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헤겔'에서부터였다. 헤겔은 '우주를 절대자 곧 신의 세속적인 발전'으로 보았다. 이 발전은 마음 스스로 놀리적으로 생각해 내는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데, 세 단계 발전이 있다고 보았다. 즉
'정, 반, 합'
의 단계이다. 이것은 소위
변증법의 원리
였다.
그의 논리는 인간론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신관도 변증법적인 원리에서 이해되었다.
'정'은 '하나님 아버지', '반'은, '성자', 그리고 '합'은 '사랑의 성신'
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진리가 발전 단계를 거쳐 형성된 것처럼 인식되게 하였고, 이는 완성을 위해 발전하는 진리의 상대성을 몰고 왔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절대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슐라이어마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12. 슐라이어마허(1768~1834)

그는 칸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9세기 초반 근대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라는 것은 교리나 합리적 설득, 행위의 체계로 대체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에 대해 자신의 유한성 곧 의존성을 느낀다는 것이며,
이 의존의 감정이 바로 모든 종교의 기초이자 신과 인간의 깊은 심연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은
'절대의존의 감정'을 '종교의 씨'라고 규정, 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을 통해 나타난 인격적인 그리스도와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 보다는 주관적인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나폴레옹 1세
프랑스 혁명(불란서 혁명, 1789)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의 횡포'와 더불어 18세기 말 교회와 신앙에 절대적인 적대감과 아픔울 주었던 사건은 '프랑스 혁명'(1789)이었다. 혁명군에 의해 장악된 프랑스 정부와 의회는 군주를 몰아내고 왕과 황후를 죽인 후 '교회 폐지령'을 내리고 '이성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노틀담 사원과 지방의 교회당에 이성의 상을 세우고 경배하도록 했다. '기독교의 월력이 폐지'되었고, 일주일을 10일로 수정하였으며, '교회의 종들을 녹여서 대포와 동전'을 만들었다. '교회 예배는 금지'되었고, 대신에 열흘마다 한 번씩 정치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흥겨운 잔치와 무도회가 번갈아 가며 열렸다. 후에 '나폴래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으면서 가톨릭과 화해하여 교회의 예전을 회복시켰으나, 교회가 입은 상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프랑스 혁명의 공격 대상은 '로마 가톨릭 교회'였지만, 개신교들도 침체 분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격 : 기본적으로 반종교적 합리주의적 경향
주장 : 자유, 평등, 박애
신학 : 점차 소뮈르 학파 이후 합리주의적 경향이 확산
1. 정치적 통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로마제국은 정치적인 통일국가로서 그 기반에는 '관용, 인내, 화합, 동화'등의 국가 정책기지로 삼아 통일제국 내에서의 '자율성'을 인정하였다.

2. 문화적 통일
알렉산더 대왕(B.C 4) 이후 전파된 그리스문화의 보편화 작업은 '그리스-로마'문화를 형성하여 단일문화권안에서의 복음전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3. 언어의 통일
'희랍어'(그리스어-헬라어)가 당시 세계적인 '공용어'로 사용 되었기에 복음 전파를 위한 언어 소통이 됨.
로마제국의 형성 요소
4. 교통의 발달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통의 발달은 기독교의 확장과 발달에 영향을 줌(동-서양의 활발한 교역)

5. 다원주의적인 종교정책
로마제국은 제국 내의 모든 국가와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정책을 취하였다(이후, 황제숭배 문제와 기독교의 충돌이 있었으나 그 전까지는 복음 전파의 기회가 많았다).

6. 유대종교
유대종교는 기독교의 못자리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유대종교는 '디아스포라'이후 생겨난 '회당'에서 큰 기여가 있었다. 결국 '유대인 공동체'와 '회당'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초기의 교량 역할을 하였다.
사도시대
사도시대 예루살렘 공동체
1)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중심 도시
2) 초대교회가 처음 설립된 곳
3) 기독교인들에게 중심적인 도시
4) 지도자 : 베드로와 야고보
5) 오순절에 120명의 성도들이 회집된 곳
6) 이후 베드로의 설교로 3,000명의 회심자가 생김
7) 70년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합락 이전까지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야고보의 주도하에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의 중심지
안디옥 교회(바울의 선교)
1) 시리아 지방의 안디옥을 세계의 선교 센터로 만듬(A.D. 44-68)
2) 예루살렘 멸망 이후 초대교회의 중심지가 됨
3) 안디옥 교회는 초기부터 이방세계에 대한 복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사도 요한의 선교
1)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세계 선교의 요람지로 만듬(68~100)
교회를 위협한 2세기 이단
303년 칙령을 선포하고 교회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모든 성경을 공개적으로 불사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일신론의 두 경향

1) 데오도투스(190년경)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와 성령으로부터 나신 '단순한 사람이시며', 세례를 받으실 때 그에게 하나님의 '뒤나미스'(능력)가 내려왔고 부활로 '양자가 되어'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신 분 : 동력적(dynamic), 양자론적(adoptionist)단일신론

2) 노에투스(200년경)
'그리스도께서 성부이시며 성부께서 태어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그러나 아들 혹은 로고스라는 인물을 필요없게 만들면서 하나님을 성육신의 주체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1)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곳
2) 지중해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
3) 지적 중심지로 모든 철학 학파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기독교 신학자]
1) 클레멘트(?~215) : 최초의 신학자
2) 오리겐 : 클레멘트의 제자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
: 가톨릭교회라고 하면 천주교라고 인식하지만 이것은 잘못 된 것이고, 천주교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공교회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아리우스(Arius)
1)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2) 삼위를 계급관계로 인식
3)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간주
4) 성자의 영원성을 부인
변증가 '져스틴'(100~165)
1) <제1변증서>, <제2변증서>, <트리포와의 대화> 3개의 변증서를 저술
2)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를 유기적으로 설명하여 구약과 신약의 연계고리를 이론적으로 전개
3) 철학을 공부하였고, 그의 사상은 '로고스 사상'이다.
4) 영지주의와 말시온 사상을 반대
5) 이레니우스의 사상에 영향을 줌
1. 팔레스틴에는 안토니의 수도생활

2. 그리스에는 파코미우스의 형식 도입

3. 이탈리아와 고울 지방에는 초기에는 개인적인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공동체의 수도생활이 채택
아일랜드의 수도원(켈틱교회)
1)안토니 수도원의 엄격한 특성과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혼합된 형태
2) 아일랜드 기독교는 특히 수도원 중심
3) 초기에 '성 패트릭'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어 활성화된 교회들이다.
4) 이 지역의 수도사들이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복음화 시킴
5) 영국으로부터 유럽대륙을 복음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함.
6) 복음 전파의 열정으로 가득 찬 수 많은 수도승들을 선교사로 파송
7) 서구 유럽의 암흑기에 아일랜드는 제2의 팔레스틴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의 요람지 역할을 했다.
암브로스의 설교로 개종
416년 카르타고 종교회의
1) 펠라기우스 정죄
2) 교회는 죄와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
3) 교황 이노센트 1세도 결정을 확정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
1) 카르타고의 결정을 재확인
2) 이 회의에서는 '영원한 사망의 예정이론'에 대해서만큼은 정죄하였고 대신 어거스틴이 거부했던 선행을 강조함.
3) 오렌지 종교회의는 의미가 축소되었던 '인간의 선행'을 다시 강조함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영향을 준다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중생의 교리가 번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데오도시우스 1세 사후, 395년 제국의 동서 분리
에라스무스의 제자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1) 제도화된 교회
2) 수도원 운동
5세기에 접어들면서 더 많은 수도원들이 생김
1) 카시아누스에 의해 '마르셀래스'에 세워진
'성 빅토르 수도원'
2) 성 로마누스와 성 루피티누스에 의해 '세인트 클라우데'에 세워진
'코트 트 수도원'
3)
'레린스 공동체'
는 급성장하여 수백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유인하였다. 이로 인하여 주위의 무인도 섬들까지도 은자들의 은신처로 메워졌다.
4) 아일랜드를 수도원으로 성역화 시킨
'성 패트릭'이 '레린스 공동체'에서 훈련을 받고 파송
되었다.
성 패트릭(387~461)
1) 브리튼 남서해안 지역에서 태어남
2) 16살 때 아일랜드 해적에 남치되어 6년간 노예로 종살이
3) 탈출 뒤 2개월간 대륙에서 해메다가 고향 브리튼으로 돌아옴
4)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 '레린 수도원'으로 입단
5) 14년간 훈련을 받고 난 다음 아일랜드 선교사 감독으로 파송
6) 30년간 선교를 통해 아일랜드를 복음화시켜 성자들의 섬으로 만듬.
복음주의 운동
복음주의자들의 운동
1. 사회개혁
존 하워드(1726~1790)
(1) 1774년 형무소의 비참한 환경을 개혁하기 위해 영국의 전 형무소를 방문하여 열악한상황들을 문서로 작성하여 의회에 보고함
(2)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방문하여 형무소의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
(3) 전염병의 방역을 위해서 헌신
(4) 병에 걸려 남러시아에서 사망

2. 노예제도 반대 운동(클라팜파)
(1) 하더스필드의 교구 목사
'헨리 벤'(1725~1797)과
그의 아들이며, 클라팜의 교구 목사인
'존 벤'(1759~1813)
을 중심으로 선행의 뜻을 두고 영국 및 연방의 노예제도 철폐에 영향을 미침.
(2) 19세기 초 클라팜파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이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윌리엄 월버포스'(1759~1833)
였다.

3. 자선단체 설립
(1) 자원단체(voluntary societies)는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적이고 인도적인 자선을 베푸는 사업을 수행
(2) 웨슬리가 1699년에 설립한 '기독교지식 권장협회'를 통해 끊임없이 책을 출판
(3) 1799년 런던에서 초교파적인 '종교소책자협회'가 설립
(4) 경건주의는 1710년 할레의 '칸슈타인 남작 제단'을 통해 대대적인 성서 출판과 염가 보급의 모범을 보임
(5) 유사 단체들이 곧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미국'등에 설립되었다. 이들의 사역으로 인해 성경의 대중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4. 주일학교
(1) 빈민과 무학자를 위한 조직적이고 성공적인 대규모 기독교 교육 사업은 1780년의 주일학교였다. 이것은 국교회 복음주의파 평신도인
'로버트 레이크스'(1735~1811)
에 의해 창설되었다.
중요함
중요함
근대선교
1. 근대 개신교 선교의 발흥
1)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복 활동에 따라 실론, 자바, 포르모사에서 선교사역을개시
2) 메사추세츠 인디언에게 선교하던
'존 엘리엇'
의 노력으로 1649년 국회의 법에 의해 영국 최초의 해외 선교 기관인 '뉴잉글랜드 복음전파회'가 설립 이 기관의 비용으로 엘리엇의 인디언 성경과 다른 작품 출간
2) 1701년 외지복음전파회가 설립
3) 독일 경건주의는 1705년 이후 '할레-덴마크 선교단'을 낳았다.
4) 1732년 모라비아 교단이 괄목할 만한 사역을 시작했다. 퀘이커 교도들도 또한 선교 활동을 했다.
5) 구두공이었던
윌리엄 케리(1761~1834)
는 지리상의 발견(제임스 쿠크의 탐험 항해)에 자극을 받아, 꺼지지 않는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의 노력으로 '침례교이교도복음전도협회'가 결성되었다. 케리는 그 기관의 최초의 선교사였다. 그리고 케리는 '인도 선교사'로 가게되어, 1793년부터 1834년 숨을 거둘 때 까지 한 번도 인도를 떠나지 않았다.
6) 회중교회의 목사였던
'보그'(1750~1825)
의 노력으로 1795년에 초교파적인 '런던선교회'가 결성,
한국의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머스 목사'(1839~1866)를 파송한 것도 이 런던선교회 였다.
7) 1799년에는 성공회를 주축한 교회선교회가 결성
8) 1818년에는 영국 '웨슬리감리교회'가 설립
9) 스코틀랜드에서 1825년 외국 선교국을 상설기관으로 실치하고 자유 연합교회에서도 선교회의 조직과 더불어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의 서상윤을 만주에서 만나 그의 도움으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존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바로 이 선교회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10) 아프리카 선교는 19세기 중엽에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하여 아프리카 캐척의 선구자인
'리빙스턴'(1813~1873)
의 활동으로 아프리카 선교가 점화되기 시작했다.
11) 태평양 선교의 발단은 '제임스 쿠크'(1728~1779)의 탐험 항해를 자극하여 영국 안에서 미지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관심을 고조 시켰다.
12) 개신교의 중국 접근은 중국 선교의 개척자 역할을 담당했던 '노섬벌랜드의 로버트 모리슨'(1781~1834)에 의해서 였다. 모리슨은 1819년에 성경 전체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공적을 남겼다.
13) 중국의 '아편 전쟁'(1839~1842)의 불행한 사건 가운데서도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허드슨 테일러'(1832~1905)였다. 테일러는 내륙까지 진출하였고, 그가 창설한 '중국내지선교회'는 오늘날의 '해외선교회'(O. M. F)로 발전되었다.
중요함
중요함
중요함
중요함
중요함
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한 소개
중요함
3) 기독교가 '진화론'에 타격을 받은 직후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성경에 대한 비평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고등비평'이 그것이다.
고등비평은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원자료를 추적하여 어떤 자료들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명기가 예레미야 후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의 역사적 신빙성을 거부하는 등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론들의 근거를 남겼다.

4)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등장으로 영국 교회가 긴장감에 놓여있을 때 새로운 교파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플리머스 형제단'과 '구세군'이었다.
(1)
플리머스 형제단
: 교회가 신약성경의 모범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불안과 부패는 신약교회의 모범으로부터 교회가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다른 교회의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 넬슨 다비, 뉴톤, 조지 뮬러)
(2)
구세군
: 1865년 시작되었으며,
'윌리엄 부스'
와 그의 아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감리교회의 한 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그리고 하층 계급 사람들을 구원하자는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군대식 조직으로 단체를 활성화 하였고 전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

5) 19세기에는 이단들의 등장도 많았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가 미국에서 출현 하였고, 영국에서는 '그리스도 형제단'이 나타났다.
1차 전쟁(1618~1620)
2차 전쟁(1625~1629)
3차(1630~1635),4차(1635~1648) 전쟁
필립 멜랑히톤(1497~1560)
1) 인문주의 영향을 받음(에라스무스의 제자)
2) 1519년 루터와 칼슈타트(1480~1541)와 함께 라이프찌히 논쟁에 참여
3) 1521년 《신학강요(신학통론) Loci Communes Rerum fheologicarum(1521)》를 저술하여 개신교 최초의 조직 신학의 기초를 수립 이후 많은 종교회의에 참석

신학의 발전적 경향
1) 율법이해 : 율법의 제3사용을 인정해 '아그리콜라'의 율법폐기론과 논쟁(1528~1534)
2) 예정론 : 전적 예정론에서 동시발생적 원인론 주장
3) 성찬론 : 점차 칼빈의 주장을 따라감(영적 수용 강조)
4) 선행은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증거로서 '영생에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
5) 멜랑히톤은 1553년판 <신학강요>(신학통론, Loci Communes)에서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수정하고, 구원의 믿음이 선포된 말씀과 성령 그리고 인간 의지의 공동 작용의 산물이라고 가르침(신인협동설, synergism)
필립파와 엄수파의 갈등
멜랑히톤이 '이신칭의'만 보존된다면 다른 것들(비본질적인 것-adiaphora)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1548년 '라이프치히 잠정안'에 동의함으로 발생하였다.
- 비질적인 것들 : 주교제도, 견신례, 종부성사, 고해 제도 일부, 성직자 결혼, 종의 사용, 독특한 옷 사용

결국, '마티아스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와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는 멜랑히톤을 비판했고 남 독일에서 잠정안(라이프치히 잠정안)을 반대했던 '요한네스 브렌츠'가 이끈 '아디아포라 논쟁'에 합류, 멜랑히톤을 옹호하는 '필립파'와 비판하는 '엄수파'사이의 갈등이 시작됐다.

멜랑히톤에 대한 엄수파의 평가 : '크립토 칼빈주의'(Crypto-Calvinism) 곧, 슬며시 들어온 칼빈주의
17세기 정통주의
1. 개신교 스콜라주의
1) 루터와 멜랑히톤의 주장을 종합하려는 시도
2) 내용은 엄수파였으나 방법은 필립파로, 로마 가톨릭이나 다른 개신교와는 구별을 강조하면서 루터란내의 타협을 모색한 신학
3) 철학적 사유의 사용으로 '아리스토텔레스식'을 채용하고 로마 가톨릭과 예수회 신학도 채용
4)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학

[특징]
1) 성경 영감의 교리 : 성경이 어떤 의미와 방법으로 영감을 받았는지 연구
2) 성령께서 저자들에게 직접 영감하셨다는 '축자적 기계적 영감론'을 주장
3) 사도는 성령의 비서들, 혹은 성경의 필사자에 불과하다고 봄
4) 엄격한 고백주의 전통 : 혼합절출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됨.

2. 17세기 혼합절충주의
1) 다름과 틀림의 구별 = 오류와 이단의 구별
2) 중추적인 교리와 부수적인 교리의 구별 : 구원에 관련한 것이 절대적인 교리
3) 이단은 중추적인 교리를 부정 / 오류는 부수적인 교리를 부정
4) 최초 5세기 동안의 합의로 중추적 교리가 모두 결정된 시기로 보며, 5세기 이후의 교리를 절대화하면 초대교회의 구원을 거부하게 된다고 주장.
5) 가톨릭과 개혁파는 이단이 아닌 '오류'라고 주장
프린스턴 신학교 출범(1812)
1) 미국 장로교회는 높은 학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목회자 양성을 필요로 함
2) 노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1812년 뉴저지 프린스턴에 교단 신학교 설립
3) 높은 학문적 자질 / 3년 간의 신학 교육 / 시험을 통한 평가 / 철저한 경건생활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학의 기준, 헌법 정책'으로 삼음
5) 설립 교수진 : 아키발드 알랙산더, 사무엘 밀러, 찰스 핫지
6) 신학적 경향 : 다양한 신학적 도전에 응전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성경적 신학에 기초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하려함
7) 두 가지 도전 : 지나친 부흥주의에 의한 '주관주의 신학'&'진화론과 성경 고등비평'에 영향 받은 '자유주의 신학'
[새로운 사회적 상황]
1)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신흥 부호의 등장
2) 대규모 이민 : 1900년까지 서유럽에서 1400만명 이주 / 이후 동유럽 남유럽 이미
3) 종교 사회의 다원화 : 유대인과 로마 가톨릭 신자의 증가

[진화론의 대두]
1) 다윈의 진화론이 1859년 '종의기원'으로 발표
2) 진화론에 대한 긍정적 신학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코쉬'(James McCosh),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에보트(Lyman Abbott), 제임스 우드로(James Woodrow)등이 진화론을 신학적인 진리라고 주장
3) 1925년 테네시 데이턴의 고등학교 교사인 '존 스코프'의 재판

1. 자유주의 신학
1)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고등비평의 도입
2)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찰스 브릭스의 1891년 취임연설에서 '성경 무오설'을 거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개정을 요구

2. 프린스터 신학자들의 반격
1) 알랙산더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가 '성경의 영감과 무오 교리'를 옹호함
2) 워필드의 영감교리
(1) 이성의 필요성 : 진정한 믿음은 바른 이성에 기초해야 한다
(2) 영감의 범위 : 성경의 축자적 무오에 대한 교회의 역사적 신앙을 주장
(3) 영감의 방식 : 기계적 영감이 아닌 유기적 영감
(4) 영감의 대상 : 성경 사본이나 번역본이 아닌 '원본'에 해당
3) 장로교 총회의 입장 : 1892년 포틀랜드 총회에서 브릭스의 자유주의를 정죄 '포틀랜드 성명서'는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를 지지

3. 신비주의와 세대주의 대두
1) 오순절 운동의 발흥 : 1901년 캔자스주 토피카의 벧엘 성경대학의 은혜집회에서 시작되어 안수와 방언 운동을 통한 영적 체험과 주관주의 신앙운동
2) 세대주의 : 1840년 경 영국의
'넬스 다비'
(1800~1882)의 7세대 구분에 따른 전천년설 보급을 위한 1875년 이후 7차례 미국과 캐나다 방문 집회 / 스코필드 성경, 무디성경학교, LA 성경학교 등을 통한 비관적 종말론과 배타주의적 문화관 보급
3) 보수적 장로교회의 응전 : 1910, 1916년 총회 결의 - 신학생들에게 다섯 가지 기독교 교리 고백을 요구함
(1) 성경 무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이적

4. 19세기 신학자들의 웨스트민스터 신조 개정 요구
1) 반다이크가 1889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신조를 개정할 것을 요구함
2) 브릭스는 시대적 사조에 맞추어 현대인의 의식과 조화되도록 신조 개정을 요구

5. 근본주의 논쟁
1) 등장 : <근본적인 것들:진리의 증언> 발행으로 미국 전역에 배포
2)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 진화론등 현대 과학, 사회 복음주의 비판
3) 참여자들 :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제임스 오르(James Orr),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인 버렐(D. J. Burrell), 찰스 어드만(Charles R. Eerdman), 벤저민 워필드(B. B. Warfield)와, 성공회 주교 뮬(H. C. G. Moule), 세대주의자 스코필드(C. I. Scofield), 부흥사 토레이(R. A Torrey), 남침례교 신학자 멀린(Mullins)
등 영국, 미국, 캐나다 출신의 64명의 보수주의자들은 로스앤젤레스의 부유한 실업가
라이맨 스튜워드(Lyman Steward)와 헨리 스튜워드(Henry Steward) 형제
의 후원을 얻어 1910년에서 1915년 사이 「근본적인 것들: 진리의 증언」(The Fundamentals: A Testimony of the Truth)이라는 12권의 책을 출판

6. 현대주의자들의 도전
1) 1923년 총회 : 근본주의적 입장을 재확인
2) 1924년 '어번 확인서' - 1274명이 서명, 노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총회의 결의의 위반, 교회가 교리 문제로 싸우는 것을 무의미한 행위라고 주장
3) 1925년 진화론을 둘러싼 스코프 재판(원숭이 재판)
프린스턴 신학교의 좌경화
1) 실천신학 교수인 '스티븐슨'이 새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양한 신학 사상의 수용으로 인하여 좌경화가 시작

2) 학장을 지지하는 소수파(어드만, 로에췌, 데이비스, 스미스) VS 보수주의적 다수파(메이첸, 윌슨, 보스, 핫지, 앨리스)

3) 1925년 변증학 교수인 '그린' 퇴임 이후 후임 결정에서 갈등

4) 이사회는 신약 교수인 '메이첸'을 후임으로 임명했으나 소수파의 설득으로 총회가 결정을 유보

5) 총회는 '스티븐스'과 소수파의 견혜를 따라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로버트 스피어'를 경선없이 교수에 선출하고 메이첸과 앨리스의 승진을 불허
프린스턴 신학교(자유주의 신학 수용)
웨스트민스터 신학교(1929)
메이첸의 사상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1.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1) 1912년 '기독교와 문화'라는 연설에서 보수주의적 신학을 드러냄
2) 1923년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주장
3) 1929년 7월 필라델피아 위더스푼 홀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
4) 자유주의적 선교정책을 극복하고자 메이첸이 독립선교부 조직
5) 1936년 북장로교 총회가 이를 문제 삼아 메이첸의 목사직을 정직, 메이첸과 100명의 목사들이 탈퇴하여 '미국장로교회'조직

[사상]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의 영감과 무오 등 전통 프린스턴 신학을 변호
시민자유 운동의 전개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주장하여 '금주법'제정을 시민의 자유에 대한 침혜라고 보고 반대함
3차 부흥운동(1850-1900)
무디(D. L. Moody)의 3차 대각성운동(1870년)
1) 금연, 금주 등 절제 운동
2) 장로교 예배의 변화로 원고 설교의 도입과 다양한 절기를 준수하며 합창 중심의 찬양과 설교 중심에서 의식 중심의 예배로 변모
3) 점차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해 들어옴
4) 복음전파와 외국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함
5) 3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젊은 신학생들과 의학도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주었다.
6)
언더우드

아펜젤러
가 바로 이러한 선교 비전의 열기에 편승하여 1885년 개신교 복음을 들고 인천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갈등으로 인한 '신학파'와 '구학파'의 분열
1) 신학파 : 신학적 관용주의, 부흥운동 지지, 엄격한 신조주의 거부, 자유로운 성경해석, 노예제도 강하게 반대
2) 구학파 : 부흥운동의 주관주의 거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 철저, 노예제도 철폐에는 소극적
3) 1837년 총회에서 '신학파'를 제명
4) 초교파적 단체들과의 교제 단절
5) 신학파는 1837년 여름 뉴욕 어번에서 '어번선언'을 발표
6) 구학파가 무시하자 1838년 새로운 총회를 구성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지리적 양분
남북 장로교회의 분열
1) 1836년 장로교 총회는 '노예제도' 문제에 대한 논의를 무기한 연기함
2) 노예제도 폐지 문제로 침례교(1844), 감리교(1845)가 남북으로 분열
3) 장로교는 1850년 신학파 총회가 노예제도를 정죄하자 남부 노회가 반발, 총회가 남부 노회들을 징계하자 1857년 남부 21개 노회가 북부에서 분리함
4) 1860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분리가 가시화됨
5)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5월 총회에서 156대 66으로 노예베도 폐지를 결정한 결정에 반발해 남부의 보수파 교회들이 총회를 탈퇴함
6) 1861년 12월 총회를 탈퇴한 남부 교회들이 조지아 주의 오거스타에서 '미연방장로교회' 결성
남북전쟁(1861)
부흥운동의 공적
1) 부흥을 통해 조직된 소그룹 모임인 자발적인 회조직으로 외국 선교회 조직이 활성화되었다는 것
2) 이들이 공헌한 것은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한 사업과 성경의 반포에 기여했다는 것
3) 도덕성의 회복과 인도주의의 향상이었다. 이들 부흥회는 사람들의 건전한 삶을 위해서 금주, 절제, 성수주일, 노예제도 폐지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부흥운동의 부정적 측면
1) 회중교회의 분열(자유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대 때문)
2) 분열된 회중교회는 1851년 '유니테리언'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칼빈의 예정론'을 심하게 공격하였다.
19세기 스위스 교회
1) 정통 기독교가 버림을 받고 프랑스의 '이성주의자들'의 사조가 밀려들고 있었다. '자연종교'가 범람하여 성경의 진리를 대신하였고, 칼빈의 신학은 퇴조해 버린지 오래되었다.
2) 16세기 말엽에 일어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소시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인 '소시안주의'혹은 '유니테리언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이때 다시 성행하여 19세기 초 스위스의 대부분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볼프강 폰 괴테(1749~1832)
18세기가 지나면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에 대한 요청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감정의 요구대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발전하게 되었다. 순수한 사고보다는 일단은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 감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쾨테는 이러한 경향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독일어권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개혁 이래 무섭고 악마적인 요소가 예술 작품에 스며들었다'고 할 정도로 '반개신교적'인 반면에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다.
19세기 이단의 등장
1) 크리스천 사이언스
2) 여호와의 증인
3) 몰몬교
4) 영국에서는 '그리스도 형제단
성경에 대한 비평의 물결
1) 고등비평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원자료를 추적하여 어떤 자료들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명기가 예레미야 후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의 역사적 신빙성을 거부하는 등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론들의 근거를 남겼다.
자유주의 신학의 범람에도 복음의 진리 증거의 노력

1. 헹스텐베르크(1802-1869)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며, 치명적인 자유주의 악영향에서 벗어나 종교는 삶의 내면과 경건미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

2. 카일
헹스텐베르크의 영향을 받아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뛰어난 주석가였던 카일이 있었다.

3. 웅켄
참된 경건주의를 주장하며 형식적이고 극단적인 루터교회의 차가운 신앙을 실감하고 함브르크에 일대 개신교 혁신을 가져왔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
1)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의 '다원주의 종교현상'을 탈피하고 '유일신론'을 주장하였다.
2)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죄와 용서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주장하였다.
3)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유대주의적인 배타주의나 국수주의를 버리고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4)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실현'을 주장하였다.
5)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의 부패한 삶에 반대하여 개인적인 도덕성의 순결을 주장하였다.
6)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사회정의의 보편성과 공동체성을 주장하였다.
7)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하부구조에 속한 힘없는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팜필루스(Pamphilus, 240~309)
1) 오리겐의 제자로써,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2)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를 다녔다.
3) 성경의 사본과 주석을 편집하였다.
4) 가이샤라의 도서관을 진흥시켜 후일, 유세비우스와 제롬이 공부하는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5) 성경의 정확한 번역을 시도
6) 막시밀리안 박해 때(310년) 순교
7) 그의 제자 '유세비우스'가 순교록을 집필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팜필루스 유세비우스, Eusebius of Caesarea, 260~340)
1) 팜필루스의 제자
2) <교회사>를 집필(323년 완성)
3) 오리겐 전통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
4) 콘스탄틴 대제의 명령으로 정경을 집성(기준 문서로는 '무라토리 단편, 페쉬토 역본, 고대라틴경)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 오리겐의 제자
2)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3) 사벨리안주의와 천년왕국설에 대하여 배격
4) 오리겐주의의 대표자로써 올바른 교리정립을 위하여 노력함.
오리겐주의와 대치된 안디옥의 신학
1.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1) 260년 안디옥의 주교가 됨
2) 팔미라 왕국의 체노비아 영왕의 통치 아래에서 영향력을 떨침
3) '동력적 단일신론자들'과 유사한 견해를 주장
4) 오리겐주의자들의 삼위일체론적 복수주의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
5) 성육신을 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로고스가 내주한다고 주장함
6) 268년 오리겐의 전통을 대표하는 주교들의 교회회의에서 정죄된 후 주교직에서 쫓겨남.

2. 루키안 장로(Lucian)
1) 오리겐과 마찬가지로 70인경과 복음서의 본문에 관한 연구를 함
2) 오리겐의 알레고리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성경 본문을 좀더 문자적으로 해석
3) 아리우스(Arius)와 그의 보호자였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가 루키안에게서 배운 제자들 이었다.
4) 마지막 박해 때 순교함(데오클레시안)
1) 데오클레시안은황제의 전제정치를 쉽게 만들기 위해서 옛 로마의 정치적 권위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원로원'을 폐지하였다.

2) 데오클레시안은 다음으로 비잔티움을 수도로 하여 1453년까지 계속 존속하게 될 로마제국의 형태를 창조하였다.

3) 아내와 자녀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사형시킴
아리우스 논쟁
[문제 제기]
1) 아리우스 논쟁은 아마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하였다.
2) 바우칼리스농촌 '교구'감독을 맡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였던 아리우스는 로고스가 '무존재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라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3)피조물인 로고스는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변화에 종속되고, 선하게 될 가능성과 악하게 될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하였다.
4) 아들(로고스)이 존재하지 않던 '시간'(곧 '때')이 있었다고 가르쳤다.

[논쟁]
1)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Alexander, 312~328)는 아리우스와 다른 교사 간의 논쟁에서 제기된 이 견해를 듣고서, 아리우스의 견해가 그릇되며 그는 더 이상 그 견해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2)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다소 체계적으로 정리한 <탈리아>를 썼으며. 아리우스는 유세비우스와 함께 아리우스를 복권하도록 편지 공세로 압력을 넣었다.
3)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주장 곧 '로고스'(성자)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주장 하며, 성자가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발생하며, '무존재로부터'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며, 불변하고 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4)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알렉산더의 주장이 '두 명의 동등한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비판하였다.
5) 결국 이 문제는 성자에게 적용된 '게네토스'라는 헬라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됐다. 게네토스는 전통적으로 '낳음을 입은'으로 해석되는 단어로 포괄적이고 모호한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존재하게 된 것'을 가리켰고, 따라서 '파생된' 또는 '발생된'것을 가르켰다.
6) 사실상 아리우스와 알렉산더는 로고스를 중간지점으로 삼음으로써 불변하는 신과 변하는 피조물 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아주는 전통적인 위계 체제가 존속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 하였다.
7) 이렇게 아리우스 논쟁이 심화되자 제국의 모든 주교들은 소아시아 니케아에 소집하였는데, 이 모임이 최초의 세계교회회의(the Ecumenical Council,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되었다.
325년 5월에 열린 이 공의회는 그 신앙고백으로 정통신앙의 기초를 규정한 공의회로서 기독교 전승에 살아남아 왔다.(니케아 공회)

[추가적인 사항]
1) 니케아 공의회는 핵심 의안인 아리우스주의 외에 다른 문제인, 지역 수준을 넘어서는 공적인 교회 조직을 규정하는 내용의 교회법들을 통과시켰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후 세 아들에게 분할 된 조국
1.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2) : 브리타니아(영국), 갈리아, 스페인
2.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2) :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3. 콘스탄스(Constans) :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부
352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제국의 군주가 됨. 361년 사망
361년 율리아누스가 군주가 됨 그러나 363년 페르시아 원정 중에 전사
요비아누스(363~364) -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결과로 발생된 두 가지
1) 니케아 신학의 승리
2) 서방과 동방간의 분열의 불씨를 남겼고, 동방 자체에도 유서 깊은 알렉산드리아 교구와 새 제국의 수도 곧 콘스탄티노플 교구간의 긴장의 불씨를 남겼다.
3) 382년 로마 전체 회의에서 '정경 목록' 작성
고트족의 기독교 개종
1. 울필라스(Ulfilas)
1) 311년 가파도키아 포로의 후손으로 태어난 울필라스2) 청년 시절에 기독교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
3) 341년 니코메이다의 유세비우스에게 고트족 주교로 임명받음
4) 아리우스주의자 였던 울필라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제국의 정통신앙이었던 '호모이오스'(Homoean)파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5) 7년간 동족들을 상대로 사역하다 박해가 일어나자 동료 기독교인들을 이끌로 로마 영토로 피신하였다.

2. 서고트족의 개종
1) 서고트족의 최종적인 개종은 376년 그들의 왕 '프리티게른'(Fritigern)이 훈족에게 쫓겨 민족 전체를 이끌로 로마 영토로 들어온 뒤 백성 전체를 교회에 가입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졌다.

결국 고트족들의 신앙은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민족이 되었다.
교황 레오1세 의 사상
1) 사도들 가운데 베드로의 수위권을 주장
2) 법률상 베드로의 후계자들인 교황들은 베드로가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말할 수 있도록 최고 지도자이자 교사인 그의 지위를 계승한다고 가르침
[교황 레오 1세의 활동]
1) 레오 1세는 '유티케스'(유티커스, 유티키우스) 논쟁이 벌어졌을 때 콘스탄티노플 주교 '플라비아누스'(Flacian)에게 '공한'(Tome)를 보내어 논쟁에 간섭하였다.
결국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이 문서는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정통신앙에 대한 규명으로 채택되었다.
2) 훈족 '아틸라'(Attila)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오고 있을 때 그가 맡은 외교 임무에 대한 옛 기록에 따르면, '왕(아틸라)은 기독교의 최고 성직자를 만난 데 크게 만족하여 전쟁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쓰고 있다.

수도원 운동의 특징
1) 수도원주의가 원래 '농민 계층'에서 발생했다.
2) 수도원 운동은 헬리니즘 문화가 덜 물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내력지방' 사람들의 개종과 함께 성장했다.
3) 수도원주의는 '은둔 운동'이었다.
4) 본능적으로 '사막'을 지향하였다. 즉 도시, 읍, 촌락으로부터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이탈을 추구하였고, 그로써 정상적인 교회 생활로부터의 이탈까지도 추구하였다.

[은둔의 의미]
1) 홀로 있고 싶은 욕구를 반영
2) 세속에 대한 배척과 심지어 문명과 문화에 대한 경멸을 극대화한 몸짓
3) 어떤 지역에서는 지주와 세리의 강압에 찌든 농민들의 끊임없는 도피의 표현
서방에 수도원주의가 최초로 보급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자신과 그의 저서인 <안토니우스의 생애>로서, 이 책은 즉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360년경).
서방에서 수도원 조직들에 대한 최초의 암시는 '투울의 마틴'이라는 이름과 연관된다.
391년 이후, 이교 예배를 금지 공포
암브로시우스의 견해를 반영한 데오도시우스 1세
데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아누스 3세가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에베소 회의를 열도록 소집함
칼케돈 공의회의 정의(Definition)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지닌 한 분이자 동일한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prosopon)이자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다. 그러나 그는 "두 본성"으로 존재하는데, 이 두 본성은 한편으로는 혼동되지도 변화하지도 않고(유티케스에 반박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되지도 않고 분리할 수도 없다(네스토리우스에 반박하여).
(유스티누스의 조카)
유스티아누스 1세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제국을 만들겠다는 집권 초기부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 이교주의를 불법화함
2) 기독교를 믿지 않고 있던 모든 불신자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명령하는 엄한 칙령을 내림
3) 이교주의의 학식과 충 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520년)
4) 사마리아인들을 심히 박해
5) 유대인의 종교적 권리와 시민적 권리를 크게 제한
6) 마니교와 아리우스주의와 다른 이단 종파들을 불법화함

그러나 결국 교회를 통일하려던 그의 시도는 실패함.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를 둘러싼 논쟁들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교회'를 분열시켰다. 그런 논쟁들은 '서방교회'(로마)와 '동방 교회'(콘스탄티노플)의 사이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독립적인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를 형성시켰고, 에디오피아와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 '단성론적 신조'를 따르는 '민족 교회'를 만들어내었다.
568년 이후에 이탈리아에서의 '비잔틴 세력'은 '롬바르드족'의 침밉으로 말미암아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와 중부의 대부분을 점령하였고, 제국의 총독이 거주하였던 라벤나를 일시적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의 제국 영토와 고립시키기도 하였다.
제롬은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편을 들었다.
도나투스주의(Donatism)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시점에 아프리카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 분열은 두 명의 인물을 긱점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로마 세계에서 다른 지역 교회들과 사귐을 갖고 있다는 뜻에서 '가톨릭'이라 불리던 집단은 '카이킬리아누스'가 이끌었고," 그의 경쟁자는 "'순교자들의 교회'를 이끈 '도나투스(Donatus the Great)라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슬람이 로마의 속주였던 북 아프리카를 정복하였을 때가 되어서야 사라졌다.

[특징]
1)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의 전승을 따라 순교자 소명과 그것이 구현하는 세상에 대한 배척 정신을 가짐
2) 도나투스파들 스스로가 로마 세계에서 옛날의 순교자 교회의 정신과 전통을 유지해온 유일한 그리스도인 집단이라고 생각
3) 배타적이고 청교도주의적 정신을 가진 집단
4) 현재(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대에) 로마의 당국자들 즉 '세상'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가톨릭 교회가 '오염되었다'고 생각 따라서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가톨릭 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었다.
5) 가톨릭 교회는 그 순수하지 못함과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타협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박탈당하였으며, 따라서 구원의 영역 밖에 있다고 봄
6)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세례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도나투스파 집단에 가입한 가톨릭 교도들은 다시 세례를 받았다.
도나투스주의자들과 어거스틴사이의 논쟁
콘스탄티누스가 등장 했을 때 도나투스주의는 이미 아프리카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이 발생하게 된 요인
1)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공, 북 아프리카에 밀려 닥칙 피난민
2) 로마의 함락의 의미에 과한 논쟁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관심을 아프리카 교회 내부의 문제들에서 세계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로 돌리게 함
3) 로마에서 시작되어서 이탈리아 남부를 거쳐 시칠리아로 확산되고 있었던 '종교적 개혁 운동'의 지도자인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됨.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의지는 인간 속에서 언제나 자유롭게 남아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할 수도 있고 즐거워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 때 인간 쪽에서도 같이 손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대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른바
‘신인협력설’
이 이렇게 해서 탄생.
정치적으로 국가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등장한
인물인 '그레고리 1세'
[그레고리의 사상]
1) 죄, 심판, 그리스도 안에서의 속죄 같은 주제들 주위를 맴돌며, 어거스틴의 결론들을 발전 시켰다.
2) 인류가 아담의 죄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것은 인간 누구나가 정욕을 통해 잉태되는 사실로써 입증 된다고 보았다.
3) 개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이러한 상태에서 구출되며,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한 은혜들은 세례를 받을 때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통해 받게 된다.
4) 그럼에도 세례 받은 뒤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보속'(satisfaction)을 치뤄야 하는바, 이는 어떠한 죄도 속죄 없이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5) 보속에 반드시 필요한 방법은 사랑안에서 행하는 '선행'으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우선적인 은혜와 그 은혜에 협력하려는 인간 의지가 있어야 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6) 이러한 보속은 '회개'(고해)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나머지 둘은 고백(죄 지은 사실을 시인함)과 통회- 라고 하였다.
중요함
샤를의 업적
1) 행정 체계를 세움
2) 종교적인 구심점
3) 정치적 통일
4) 교회의 수호자로 자임
5) 교회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안녕의 증진을 위해 노력
6) 학문을 즐김으로 '궁정학교'를 개설
9세기 비잔틴 제국(동방교회)의 주요 종교문제
1. 바울파(Paulicians) 문제
1) 레오 3세 당시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남부'에 확고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던 집단.
2) 마니교, 영지주의 또는 마르키온주의 이원론을 생각나게 하는 형태의 기독교를 가르치고 실천함
3)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우주는 악의 세력의 피조물인 반면에, 영혼은 선한 신으로부터 유래한다고 가르친 바울파는 구약성경을 배척하였고, 성육신의 물리적 실재를 부인하였고, 따라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것을 무시하였으며, 기독교 예배에 물질적인 것, 무엇보다 성화상을 사용하는 것을 강력히 정죄하였다.
보름스 정교협약(the Concordat of Worms)
1122년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사이에 채택된 조약.

1) 독일에서는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에 대한 임명이 자유롭고 교회법에 따른 형태로 이루어짐
2) 그들을 선출할 때 왕이 참석하는 것이 허용
3) 논란이 발생할 경우 왕은 대주교와 그외의 주교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함.
4) 왕은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권한은 잃게 되었지만, 왕의 '홀'을 댐으로써 교구에 딸린 여러 가지 세속권한들을 부여할 권한은 유지
영국 '서임권 논쟁'
1)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1119~1124)와 왕 '헨리 1세'(1100~1135)은 서임권 문제로 투쟁을 하였으나, 왕은 자신의 세속권을 가지고 새 주교를 임명할 권리를 유지하되, 수도대주교가 성직권의 상징물인 '반지'와 '지팡이'를 그에게 부여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종결
십자군 운동을 불러 일으킨 자극 '세 가지'

첫 번째,
동로마 제국 황제인 '미카엘 7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힐데브란트)에게 '셀주크'에 대항하는 지원을 요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레고리는 1074년에 '원정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서임권 투쟁으로 계획은 연기 되었고, 나중에 '우르반 2세'에 의하여 부활되었다.

두 번째,
전임자(미카엘 7세)보다 강력한 지도자였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셀주크의 족장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열적인 다툼이 공세를 취할 기회라고 여겨, 잃어버린 아시아의 영토를 회복하는 일을 도울 서방의 기사들을 모집할 지원을 우르반 2세에게 호소함

세 번째,
1095년 11월 우리반 2세는 프랑스 동부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선언. 그러나 우르반 2세는 한 발 더 나아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완전히 회복하는 사업으로 변화 하였다. 그래서 우르반 2세는 성지 순례라는 옛 이상을 이교도에 대한 '거룩한 전쟁'이라는 좀더 새로운 이상을 결합하였다.
십자군 운동 '기사단'

1) 성전 기사단(Knights of the Temple)
1119년 '위그 드 페이앙'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시토 수도회'의 규율에 근한, 규율을 마련해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강력한 지지를 힘입어 1128년 교황의 승인을 얻었고 곧 서방의 큰 인기를 누렸다.

2) 성 요한 구호소 기사단(Hospitallers, Knights of St. John)
1070년경 이탈리아의 아밀피의 상인들은 예루살렘에 '구호소'를 세웠는데, 그 부근에 있었던 '성 세례 요한 교회'의 이름을 따랐다. 이 구호소는 병든 자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그 대원장인 '레이몽 뒤 퓌'에 의하여 군사적 수도회가 되었다.

3) 튜튼 기사단(Teutonic Knights)
1190년에 독일인들에 의하여 창설, 이들의 주요 일은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1226년부터는 프로이센에 있었다. 그곳에서 기사단은 이교도인 '슬라브족'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과 독일의 식민지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였다.
1184년 '왈도파'(발도파)와 '카타리파'는 '베로나 공의회'(Council of Verona)
에서 이단을 총괄적으로 정죄한 교황 '루키우스 3세'의 교서 <아드 아볼렌담>에 의하여 파문당하였다.
'도미니크'와 '프란치스코'의 차이

도미니크 :
나무랄 데 없는 젊은이였으며, 중년의 나이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가장 잘 접근 할 수 있을까를 계획하고 그 목적을 위한 방편'
으로서 청빈을 택하였던 엄격한 설교자

프란치스코 :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자신의 동료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을 닮기 위한 방법으로 청빈을 채택'
하였던 쾌활한 젊은이.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저작과 신플라톤주의와 아랍과 유대의 요소들이 합쳐진 복잡한 혼합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대학의 발전
'대학'(university)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우니베르시타스 스콜라리움'(universitas scholarium, 학자들 혹은 학생들의 조합), 그리고 '우니베르시타스 마기스트로룸'(universitas magistrorum, 선생들 혹은 교사들의 조합)이라는 이름에 나타나 있다. 이 조직의 출발은 1200년 경으로 잡을 수 있다.
위대한 독일 신비주의자들은 세 사람 모두 '라인란트'에서 도미니크회 수녀들과 '베긴회'를 목회하며 돌보았고 종종 자기 나라 말로 하는 설교와 소책자들을 이런 종교적인 여공동체에 베풀었다.
두 권력(교황 VS 황제)사이의 '평행주의' 옹호자 '단테'
단테는 1308년과 1311년 사이에 씌어진 그의 라틴어 논문 <군주론>에서 단테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나의 보편적 제국, 특히 로마 황제의 제국만이 문명화된 행동의 본질인 저 평화적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교황의 통치가 영원한 축복에 필수적인 것처럼, 이런 제국의 힘은 인간의 세속적 행복에 필수적이다. 이 각각의 권위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각자의 고유영역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아비뇽 교황청의 심각한 문제
교황청의 사치와 호사는 줄지 않은 채 교황청의 아비뇽 이주로 중부 이탈리아 교황령으로부터의 세금이 대부분 끊어지게 되자 상황이 더욱 악화 되었다. 아비뇽 교황들은 중세에서 가장 복잡한 '중앙집중적 행정체제'를 발전시켰으며, 이 강력한 관료주의적 기계는 교황의 수입을 늘리는 데만 몰두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주된 수단은 '임명세'(새로운 성직 임명자의 첫해 수입 모두를 세금으로 하는)제도였다.
같은 시기에 교황의 배타적인 임명을 위한 직위들의 '임명보류'가 엄청나게 늘었고 공석중인 성직록도 교황의 수입원이 되었기에 이 제도는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

교황청은 지출에선 낭비하고 징세에선 공격적이었다. 그 두 점에서 교황청의 평판은 '종교개혁'까지 점점 더 나빠졌다.
르네상스의 시작 시기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와 동일한 시기다.
페트라르카의 사상적 특징
1) 성 어거스틴을 지적 인도자로 삼음
2) 플라톤을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부름
3) 키케로와 같은 '달변'
4) 인간중심 사상
5)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대
6) 플라톤-어거스틴의 '지혜'에 대한 칭송
7) 고전의 가르침과 기독교적 신앙이 조화될 수 있다는 확신
중요함
바티칸 도서관을 세워서 로마를 재건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발전시킴
인문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았음
1) 초년에는 인문주의저술가로서 명성을 얻음
2) 추기경이 된 이후에는 모든 공의회주의적 견해들을 반대
1) 고대문헌들의 수집가
2) 학문에 대해 호의적
3) 그러나 로마 아카데미를 이교도라고 탄압함으로써 인문주의자들의 분노를 자아냄.
'식스투스 4세' 부터 '레오 10세'까지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들이었으며, 로마를 꾸민 위대한 건설가들이어서 로마가 이탈리아 예술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13세기 '무어인들'은 '그라나다 왕국'에 한정되었고 네 개의 기독교 왕국인 '카스틸(Castile), 아라곤(Aragon), 포르투갈(Portugal), 나바르(Navarre)'를 세웠다.
이 국가들은 약했고, 왕의 권력은 무정부의적 봉건 귀족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나 극적인 변화가 1469년에 일어났다.
'아라곤'의 상속자 '페르디난드'

'카스틸'의 상속녀인 '이사벨라'
의 결혼으로 합쳐진 것이다. 그들의 공동 지배 아래서 스페인은 유럽 생활에서 새로운 자리를 차지했다.

1492년 그라나다는 정복되어 카스틸에 합병되었다. 같은 해에 '콜롬부스'는 '이사벨라'의 도움을 받아 '신세계'(신대륙)을발견했다.
그것은 곧 왕의 금고의 매우 상당한 수입원이 되었다.
곤잘레스(후에는 프란치스코) 히메네스 데 치스네로스(1436~1517)
1)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의 고해신부로 임명
2) 1494년 카스틸의 프란체스코회 엄수파 총장 대리
3) 1495년 톨레도의 대주교이며 스페인 최고의 성직자가 되고 여왕의 국무장관이 됨
4) 1507년 추기경과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
5) 여왕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고위직의 권력 모두를 재속 성직자와 수도 성직자의 개혁에 사용
6) 히메네스와 그의 협력자들은 신약의 첫 '그리스어 완역본'을 인쇄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출판을 위한 교황의 허가를 1520년까지 얻을 수 없었다.
7) 따라서 '신약의 제1판'은 '에라스무스의 신약'으로 1516년 인쇄업자 '요한 프로벤'에 의해 바젤에서 발행 되었다.
크리스도퍼 콜럼부스(1451~1506)
1) 1492년 이사벨라의 도움을 받아 신대륙을 발견
독일 인문주의의 지도자
1.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
1) 일찍이 '라틴어 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2) 1472년 경 그리스어를 연구하기 시작
3) 1490, 1498년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그는 '플라톤 아카데미 학자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4) 피코 델라 미란돌라 때문에 히브리 신비철학 이론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이론들이 독일에서의 그의 명성을 더하게 하였다.
5) 로이힐린은 15세기 말엽 독일에서 가장 유능한 그리스어 학자로 간주되었으며, 그리스어 연구를 증진시키는 데 끼친 그의 영향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6) 로이힐린은 '원전'에로 돌아가려는 인문주의적 욕구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런 점이 그로 하여금
독일에 있는 비유대인 학자들 중 최초로 깊이 있는 '히브리어'연구를 하게 하여 그가 구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7) 로이힐린은 '개신교도'가 아니었다.
8) 로이힐린의 지적 상속자는 그의 조카아들인 '필립 멜랑히톤'으로 이어진다.
3. 토머스 모어(1478~1535)
1) 인문주의자 이면서 동시에 문학가
2)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을 썼던 1509년 모어의 집에 머무를 때 였다.
3) 모어의 <유토피아>는 영국 인문주의자들의 저서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4) 말년에 왕가에 봉사하고 종교적 분쟁에 참여하였는데 그의 대부분의 정력을 사용하였다.
5) 그 결과 그는 순교를 당하였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신학적 차이]
1) 후기 중세기 스콜라 학자
2) 어거스틴파 수도사
3) 대학의 성서 교수
4) 수도원의 심오한 신앙적 투쟁 끝에 복음적 혁신이룸
루터
츠빙글리
1)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
2) 바울과 어거스틴 연구
3) 개인적 죄성과 고난에 대한 체험에 의한 변화
4) 교구 사제, 도시 설교자로 인문주의자들의 길을 걸음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 안에 있는 자유의 삶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
루터의 성만찬 해석
1) 문자적으로 해석,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봉헌된 떡과 즙에 임재하고, 떡과 즙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 의해 진짜로 받아들여진다
츠빙글리의 성만찬 해석
1) 성찬에서 어떤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도 부정한다. 그리스도는 떡과 잔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확실히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재세례파의 등장
1) '그레벨'과 '만츠'로부터 시작된 '재세례파'는 스스로 '참 신자'의 '회중 교회'(gathered church)라는 독립 공동체를 형성했다. 대적자들은 그들을 '재세례파'라고 별명 지었다.
2) 대적자들에 의해 명명되어진 '재세례파'는 부정확하고 선입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세례' 즉 '성인 세례'만을 인정하고, '유아 세례'의 타당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3) 이들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를 실천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4) 취리히 시의 박해로 '재세례파'의 이념은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전 지역으로 퍼졌다.
5) 그리고 재세례파 운동은 스위스, 남부 독일, 모라비아의 세 중심지에서 흘러 나갔다.

[사상]
1) 초대교회 신앙 모방 2) 유아세례 반대 3) 무저항주의
4) 국가지배 반대 5)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복종 6) 예정론 반대 7) 자력을 중시
블링거는 재세례파와 대항하였다.
메노나이트(Mennonites)
1. 메노 시몬스(1496~1561)
호프만에 의하여 네덜란드로 전해진 '재세례파'는 현명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메노 시몬스'(1496~1561)에 의하여 과격주의에서 구출되고 정화되었다. 메노는 1536년 '뮌스터 반란'로 인해 잘못 인도된 '멜키오르파들' 즉 '목자 없는 양들'에 대해 묵회적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재세례파 목회를 떠 맡아 1537년 초 안수 받았다.
메노는 운동을 재건하고 흩어진 북부의 남은 자들을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그와 '메노나이트'(Mennonites)로 불린 그의 추종자들은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 회중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초기 복음적 재세례파'의 형태가 회복되었다.

[메노나이트 사상적 특징]
1)
국가와 종교의 분리
: 국가와 종교는 별도의 영역에 존재하며,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서 상호적인 영향이 최소화 되지 않으면 종교의 순수성이 오염되고, 종교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며, 세속의 국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2)
유아세례 거부
: 본인의 신앙고백이 없는 유아세례는 유효한 세례가 될 수 없다고 봄.(유아세례 대신에 부모가 아이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아래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맹세하는 헌아식을 시행한다.)
3) 신앙은 주변적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4) 평신도들이 돌아가면서 메노나이트 목사로 목회하는 교회정치를 통한
만인제사장설 실천
5)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평화주의
: 문화, 종교를 초월한 분쟁 조정, 구제 활동을 벌임
6)
'제자도'의 강조
: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등으로 믿는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가 동반되어야 함
7) 병역을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종교적인 성격의
양심적 병역거부 실천
- 다만 이 실천도 교회내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자발적이어야 함
8)
평화, 정의, 단순한 삶, 공동체, 봉사와 섬김, 그리고 상호원조를 강조
한다.
뮌스터 반란(1534~1535)

뮌스터 반란은 재세례파가 독일의 도시 뮌스터에서 신정정치를 세우려던 시도였다. 뮌스터는 1534년 2월부터 1535년 6월 까지 18개월 동안 재침례파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재침례파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베른하르트 크니페르돌링(Bernhard Knipperdolling)이 시장을 역임했다. 이 사건은 멜히오르 호프만의 종말론적 재침례관의 영향을 받은 것인다.
종교개혁 준비기
1. 기욤 파렐(1489~1565)
1) 파렐은 파리에서 공부할 때 '인문주의 개혁자'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았다.
2) 불같은 열정, 격한 감정 그리고 사자후의 웅변가인 그는 곧 종교개혁을 선포하다가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3) 1529년 11월 파렐은 '뇌샤텔'(Neuchatel)에서 결국 종교개혁을 성사시켰다.
4) 1532년 10월 파렐은 제네바에서 개혁을 설교하였으나 실패
5) 그러나 장차 '로잔'의 개혁자가 될 온건한 '비레'를 만났다.
6) 1532년 파렐은 동역자 '피에르 올리베탕'과 '앙뜨완느 소니에르'가 베른을 등에 업고 제네바에 도착했으나. 거점 미확보로 떠났다.
7) 그러나 한달 후, 파렐은 그의 동료 '앙뜨완느 프로방'을 제네바로 보내서 제네바의 학교 교장이 되어서 개혁 교리를 전파하도록 하였다.
8) 1535년 초 파렐은 평의원들을 설득하여 개신교 지도자와 가톨릭 사제 사이의 공개 논쟁을 공인해 주도록 유도하였으나, 주교는 가톨릭 측의 참석을 금하였다. 파렐과 비레는 거의 6월 내내 계속된 토론에서 몇몇 로마 대변인을 이겼다.
9) 1536년 8월 7일 베른은 제네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이제 제네바는 자유를 얻었다. 제네바는 종교적 이유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긴 하였지만, 종교 제도가 모두 새로 조직되어야 했다. 파렐은 자신이 이 일에 적합치 않다고 느꼈다.
10) 1536년 7월 제네바를 거쳐 지나가던 젊은 프랑스 친구에게 머물러서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가 바로 '존 칼빈'이었다.
헨리 8세와 아라곤 캐더린의 이혼 문제로 시작됨.
윌리엄 틴데일(1495~1536)

1) 1522년 신약을 영어로 번역하려 했지만 런던의 주교인 '툰스탈'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자, 대륙으로 건너감
2) 1524년 루터를 방문하고 그 이듬해 퀼른과 보름스에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본문에 근거하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 상딩히 의존하여 훌륭한 영역본을 출판
3) 1526년 그의 번역 복사본들이 영국으로 유입되었고 당국은 이것을 억제하려 하였지만 헛수고 였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신흥 종단
1. 카푸친(Capuchins)
1) 카푸치오(capuccio) 라는 네 갈래 뾰족한 후드를 가진 조야하고 독특한 의상을 입은 데서 유래함
2) 1525~1528년 사이에 교황의 승일을 받은 '마테오 다 바스치오'와 그의 세 동료, '루도비코'와 '라파엘레 다 포솜브로네' 형제와 '파올로 다 키오기아'에 의해 세워졌다.
3) 이들 네 명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본래의 규칙으로 되돌아가려 한 '프란체스코회 엄수파' 였다.
4) 절대적 청빈, 철저한 육체적 금욕, 짜임새 있는 기도 생활, 단순한 복음적 도덕적 성격의 순회 설교, 환자와 극빈자에 대한 자선 활동 등에 헌신하였다.
<오시안더 논쟁>
1) 오시안더(1498~1552)는 칭의가 죄인이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 뿐만 아니라 신적인 그리스도가 실체상으로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루터파와 칼빈 모두의 반대를 일으켰다.
<마요르 논쟁>
1) 마요르(1502~1574)는 멜랑히톤의 초기 입장에 동의하여 선행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선행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팔라틴의 프리드리히 3세(1559~1576)
1) 프리드리히 3세는
1559년 선제후에 선출
되었을 때 '성만찬'에 관한 토의 연구에 의해 '칼빈 입장'을 택하게 되었다. 젊은 신학자
'올리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는 1562년 그의 영지 주민을 위해 뛰어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
했는데, 이것은 칼빈주의를 가장 호의적이고 솜씨 있게 표현한 것이다.
2)
1563년 선제후는 이것을 채택
하였다.
<일치신조>
1)
1557년 루터교 신조의 최후의 걸작인 <일치신조>가 탄생
했다.
2) 튀빙겐의 '안드레아', 브룬스빅의 '쳄니츠', 라이프치히의 '젤네커'를 비롯하여 평화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3) 이 <일치신조>는 루터의 사상과 본질적으로 일치하기는 했지만, 그 방법과 논쟁 양식에 있어서 루터 자신의 신학 작품보다 훨씬 더 '스콜라적'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일치신조>로 인하여 루터교 고등 정통주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함
[이탈리아의 소지니주의]
1. 렐리오 소지니(1525~1562)
1) 1540년대 초 개신교로 개종 후 유럽 여행
2) 1년간 '비텐베르크'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성례'에 대한 '영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멜랑히톤'과 우정을 나누며 살았다.
3) 세루베투스의 처형으로 인하여 그는 '삼위일체 문제'에 관심을 돌렸으나, 그의 성찰은 살아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다.
2. 파우스토 소지니(1539~1604)
1) 렐리오 소지니의 조카로써 취리히에서 죽은 삼촌의 원고를 수집하여 이것의 영향 아래 요한복음서문의 <해설>을 썼다.
2) 1574년 그는 바젤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그의 중요한 논문인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를 썼다.
3) 파우스토는 승천시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신성과 세계 통치권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의롭고 고난받는 종의 '직무'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본성적' 신성을 거부했다.
4) 1580년 파우스토는 폴란드로 갔으며 그곳에서 여러 사람 덕택에 소위 '준 개혁교회' 곧 반삼위일체 개신교는 상당한 발판을 확보했고, <라코비안 요리문답>(1605)으로 그들의 믿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5) <라코비안 요리문답>은 '합리주의적 사유'와 '초자연주의'를 놀랍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소지니주의 특징]
1) 신자의 도덕적 삶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2) 구원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성서에 규정된 영생의 길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책임적 준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고 최고의 모범이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을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4)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하여 루터파와 개혁교회의 정통주의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5) 그러나 전통적인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를 거부함
메이플라워(Mayflower) 호
1620년 '순례자들'(Pilgrim Fathers,필그림 파더)들은 장로윌리엄 브루스터'의 영적인 지도아래 '메이플라워 호'를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다.
12월 21일 그들은 '플리머스' 식민지의 기초를 놓았으며,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곧 현명하고 헌신적인 총독이 되었다. 그리하여 '회중교회주의'가 '뉴 잉글랜드'에 처음 이식될 때, '비분리적 흐름'과 '분리주의적 흐름'이 함께 유입되었던 것이다.
1640~1650년대 영국의 분파(sect) 운동
1) 종교적-정치적 분파
: 수평파(Levelers)와 땅 파는 자들(Diggers)
2) 강력한 천년왕국 강조
: 제5왕국의 사람들(The Fifth Monarchy Men)로 이들은 내란 기간 중 가장 탁월한 열매의 하나로 '친우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주로 '퀘이커 교도'로 알려졌다.
근대 과학과 철학의 발달
초기 종교개혁기는 우주를
'프톨레마이오스적 유형'
으로 파악했다.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공전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희랍적인 사상에 입각한 '태양중심적 체계'를 재생시켰다. 이것은 폴란드의 토르닌 출신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서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 100~170)
프톨레마이오스는 100년 무렵에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으며, 170년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은 《알마게스트(Almagest)》라는 책은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서양의 우주관, 나아가 종교관과 세계관을 지배했다. 알마게스트란 책 제목을 보면 그의 이론이 그 시대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 고전 대부분이 그러하듯 유럽에서는 사라진 반면 아라비아 지방에서는 면면히 이어져 온 그의 저서를 그 무렵 아라비아 학자들이 최고의 성과물이란 뜻의 《메지스테(Megist)》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후 제목 앞에 정관사 알(Al)을 붙여 ‘알마게스트’가 되었고, 이 제목이 훗날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그대로 쓰였다. 오늘날까지 알칼리, 알코올, 알고리즘 같은 과학 용어가 아랍어인 것과 마찬가지다. 천동설은 그가 독자적으로 발견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천문학, 특히 히파르코스(Hipparchos)의 이론을 종합하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계의 천체들은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로 자리하고 있다고 여겼다. 특히 그는 이전의 천문학적 지식을 통합해 자신의 체계를 완성한 후 천동설을 옹호하는 여러 내용을 남겼는데, 요즘 아이들이 품는 정도의 순진한 현상들이 담겨 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요한네스 케플러(1571~1630)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아이작 뉴턴 경(1642~1727)
1687년 <원리>(Principia)를 저술한 뉴턴의 결론이 가져온 영향은 심대했다.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물리적인 우주는 더 이상 자의적인 신적 행위의 장이 아니라, 설명이 가능한 하나의 법칙의 영역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기계적 원인과 결과라는 엄격한 조건 아래에서, 당대의 과학의 결론이었다.
온도계를 만들었고, 진자 원리를 밝혔으며, 역학을 실험에의한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웠고, 무엇보다도 '망원경'을 천체 연구에 응용하였다.
티코 브라헤(1546~1601)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관찰 기록을 축적하였다.
티코 브라헤가 축적한 관찰기록을 일반화시켰다.
중요함
조지 버클리(1685~1753)
물질의 실재를 부정함으로써 버클리는 세계를 거대한 메카니즘 즉 큰 시계로 보는 견해(이신론의 견해)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신론은 전지하신 조물주가 단번에 만들어 놓으시고 이제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이것 대신에 '신의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영적 활동'을 내세웠다.
이신론 공격
1) 미신적이고 교만하며, 점성술가를 찾았으며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는 기독교인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곤 하였다.
2) 재위 기간 중에 야만족들이 침략하고 홍수와 전염병이 발생하는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 그는 이 재난을 두고 제국의 신들이 분노한 증거라고 하였으며, 신들의 분노를 불러온 것은 바로 '기독교 신자들'이라고 하였다.
3) 그는 기독교 박해를 지지하였으며 로마 옛 종교의 부흥에 힘을 썼다.
호노리우스(395~423) - 발렌티아누스3세(423~455) - 막시무스(455) - 아비투스(456~457) - 마요리아누스(461) - 세베루스(461~465) - 안테미우스(467~472) - 올리 브리우스(472) - 글리케라우스(473~474) - 율리우스 네포스(474~475) -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475~476)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동고트왕국이 지배.
중세 수도원의 효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480~550)
1)520년 이테리의 '몬케카시노'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의 창시자
2) 수도원의 규칙을 새로 집대성하여 성공적으로 적용하는데 공헌
3)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기독교는 수도원 역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됨.
'이시도르 문서'와 '콘스탄틴의 기증서'가 위조문서 라는 사실을 밝혀진 시기는 1440년 로렌스 발라가 밝힘
중요함
중요함
노바티안
도나투스
변증가(Apologists)
칼슈타트(1480~1541)
1) 계급적인 교회제도를 배척하고 사회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급진종교개혁가이다.
2)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복장 착용을 반대해 농부들의 옷을 입고, 교회에서는 서로 형제라고 부르게 했다.
3) 루터의 신학박사 학위 수여해준 선배 교수
4)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했으나 후일 갈라섬
급진종교개혁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150~215)
1) 기독교 신앙을 영지주의와 접목하여 설명
2) 영지주의의 세 요소를 비판
(1) 구약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2) 하나님에 대한 공포와 징벌에 관념 주장
(3) 의지의 자유 주장
3) 기독교 헬라철학 시도(철학도 신적 기원을 갖는다)
4) 플라톤 주의
5) 알레고리해석 방법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이다.
칼슈타트
397년 카르타고 회의(어거스틴)
1) 신약 정경 목록 결정
동방교회 신약 정경 목록 확정
367년 결정
고올주의(Gaullicanism)
국왕과 국가주의자들은 교황의 권위 아래 중앙집권화된 교회의 개념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엔트(지금의 Trento)에서 개최된 종교회의로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1) 성경과 교회 전통 동시 인정
2) 성찬, 참회, 예전 인정
3) 성자숭배, 면죄부, 죽은자 기도 인정
4) 벌게이트 표준 성경
5) 신경(트렌트 신앙고백서) 공포
6) 신교백척을 위한 금서목록 작성
얀센주의(Jansenism)
1) 극도로 엄격한 신앙생활과 윤리 강조
2) 교회 “극단적인 원리주의” 공식 단죄
3) 아우구스티노 사상 강조
4)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죄와 욕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칼뱅파의 영향, 특히 예정설을 되살렸으며 일방적으로 과장된 아우구스티노의 원죄설과 은총설을 가톨릭 신학과 신심에 도입했다.
5) 얀센주의 추종자들은 신앙생활에서는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고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오랜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경건한 신앙생활에 대한 엄격성은 교회가 복음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세속의 풍조에 휩쓸리고 있다고 우려한 많은 열심한 신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으며 19세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적주의(Quietism)
1) 1675년 스페인인 '미구엘 데 몰리노스'가 저술한 <영혼의 안내서>의 출판과 함께 시작한다.
2) 몰리노스는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수동성을 주장
3) 신자는 하나님 속에서 사라지고 죽고 상실되어야 한다는 것
4) 육체와 영혼을 막론하고 일체의 행동주의는 포기되어야만 한다.
5) 기독교의 명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포함하여 일체의 육체적 혹은 가시적 수단들을 배제한 순수한 정신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
프랑스의 '정적주의' 전파
1) 과부였던 '마담 기욘'과 그녀의 고해 신부 '라콤'에 의해 명맥을 잇게 되었다.
2) 이 둘은 모두 환상 및 기타 신비 경험에 익숙한 투철한 종교적 심성을 가진 인물들 이었다.
3) 기욘은 하나님에게 진정한 희생을 드리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마음 속으로 진정 혐오하는 죄들까지도 지어야 할 때가 있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4) 라콤은 파리 대주교에 의해 투옥하고 마담 기욘은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5) 라콤은 당국에 의해 감옥을 옮겨다니다가 미쳐서 죽고, 기욘은 왕의 총신들 가운데 하나가 중재에 나서 옥을 나서게 되었다.
6) 이후 기욘은 젊은 주교 '프랑소와 페네론'을 만나, 페네론과 당시 가장 뛰어난 프랑스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인 '쟈크 베니 부셋'사이의 격렬한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중요함
가톨릭 정통
속사도
1. 이그나티우스
1) 가톨릭 용어 처음 사용
2) 일곱 개의 서신
2. 헤르마스(헐마스)
1) 공로신학
2) 선재설
3) 목자
3. 로마의 클레멘트
1) 사도적 전승 강조
2) 부활 확신
4. 폴리캅
1) 이단에 대하여 단호(말시온은 사단의 맏아들)
2) 전천년설의 입장
3) 구약보다 신약을 많이 인용함
4) 사도 요한 제자.
5. 파피아스
1) 마태복음이 원래 아람어로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주장
모나키안파
1) 동력적 단일신론
2) 양태론적 단일신론
영지주의는 '헬라파 이단'이다
정경집성
중요함
교리적 이단
모나키안
유대교적, 교리적 이단
1) 양태론적 단일신론
2) 동력적 단일신론
힙폴리투스
1) 이레니우스 제자
2) 사르지니아 섬에 추방당해 순교
중요함
395년 데오도시우스 죽음 이후 '동-서'분리된 로마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서로마 제국
공동형제단 출신
수도원 개혁 운동
시토 수도원 운동
11세기 말 모레스메의 로버트가 창설한 시토(Citeaux) 수도원이라 할 수 있겠다. 이곳의 지명이 라틴어로는 시스테리움이었으므로, 이 운동은 곧 '시토회'(Cistercian)라 불리게 되었다.

로버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명상에 전념한 신비주의자였고, 동시에 교황청 뒤에 혹은 그 위에 자리잡았던 영향력이었으며, 교회 개혁의 지도자, 제2차 십자군 원정을 가능케 한 설교가, 그리고 일체의 신학적 변화에 반대한 보수주의자 였다.
교황 니콜라오는 불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한편 필리오케(Filioque)라는 교리를 불가리아에 퍼뜨렸는데 이것은 ‘성자로부터’라는 뜻으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모두 발현한다는 내용이었다.
포티우스
와 동방 교회는 이 교리를 이단으로 간주해 격노했고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열어 교황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교황은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이혼 문제로 황제 루트비히와 반목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포티우스는 이를 이용해 필리오쿠에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상징적으로 교황의 파문을 선언하였다. 루트비히는 로마로 진격했고 동로마 제국의 승인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이 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바르다스가 실각하고 바실리우스가 무능한 황제 미카일 3세의 총애를 받았고 결국 미카일 3세도 바실리우스에게 암살 당하고 867년 9월 24일 바실리우스가 새로이 황제가 되었는데 바실리우스는 포티우스를 즉각 해임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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