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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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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윤

on 19 Marc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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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part.1 안중근 의사

동의단지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다음 시간에 만나요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의병활동
본관은 순흥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을 응칠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다.



의병활동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노에프스키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탐방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가위바위 보!
찬성 반대 나누기
part.1 안중근 의사
<토론 주제>
독립 운동을 실현하고자 친구를 속여 돈을 절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범죄를 저지른 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바람직하다
동의단지회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순국
이토 히로부미 암살 그 뒷 이야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악착 같이 돈을 벌며 독립운동자금을 벌던 황해도 의병장 출신 이석산의 이야기이다.

이석산에게 오랜 친구가 찾아왔고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필요하니 "100원 만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당시의 100원은 현재의 400~500만원의 가치를 지녔다. 이석산은 "알다시피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은 돈에는 손을 쓸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날 밤 도둑이 들었고, 친구는 총구를 겨누며 이석산에게서 돈을 빼앗아갔다.

심한 배신감을 느꼈던 이석산은 이후 신문에 실린 친구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친구는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었다. 앞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러시아 정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을 찾는다는 것.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고, 안중근은 이석산을 떠올렸다.

안중근은 "석산은 1만금이라도 빌려주겠지만 내게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이 발간되면 그도 위험해지겠지"라고 생각했고, 결국 돈을 훔쳤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후 뤼순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은 "2000만 형제, 자매가 나의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의지를 불태웠고, 1910년 31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서프라이즈 중-
찬성 vs 반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다 분노하며 바람직하다고 손들 것이다.하지만 왜곡된 역사를 알고 있거나 잘 모르는 외국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엄연한 범죄행위이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래서 반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찬성측: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바람직하다

반대측: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각 측의 토론부 5명은 다음 모임까지 안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근거를 구체적으로 조사해와서 토론에 차질이 없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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