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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앗시리아의 정복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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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재 한

on 22 Ju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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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제 7장 앗시리아의 정복 시대

제 7장 앗시리아의 정복 시대
주전 8세기 중엽부터 히스기야의 죽음까지
3조
한기재
허선임
대니맨킨
박창원
배문기
전요한
이지혜

A. 앗시리아의 진출: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다정복
1.이스라엘 몰락의 시작
2. 이스라엘 왕국의 말기(주전737-721년)
3. 앗시리아의 위성국 유다: 아하스 (주전735-715년)
B. 독립을 위한 투쟁: 히스기야
1.히스기야의 정책과 그 의의
2.히스기야와 산헤립
C. 주전 8세기 말엽의 유다 선지자들
1.국가의 위기 사태와 선지자들의 메시지
2.선지자들의 설교 효과
A. 앗시리아의 진출
남유다
북이스라엘
바벨론
우라르투
이집트
디글랏발레셀 3세 (주전745-727년)
서부지역 정복사업
북쪽 우라르트 왕국에 대항
바벨론의 왕위 차지
북부 산악지방 까지 진격


무정부 상태
정변으로 인한 참혹한 내란 지속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에 진출
므나헴(주전745-737)
[친 앗시리아 정책으로 자주적 독립 포기 → 국민의 반감]

브가히야(주전737-736년)
[므나헴의 아들, 선 왕 므나헴에 대한 반감으로 군관이었던
베가에 의해 암살]

베가의 왕권 장악
[반 앗시리아 세력 주도 → 유다와 전쟁 → 멸망 가속화 ]
당시 이스라엘의 내부 붕괴
계속 되는 정변 → 법과 질서의 붕괴
*앗시리아의 정복 사업이 시작 - 1. 이스라엘 몰락의 시작
사회적 범죄 → 형제,계층간 연합의 붕괴
이교신앙의 병폐 → 여호와 신앙과 민족성의 붕괴
2. 이스라엘 왕국의 말기
베가의 통치 아래 아람과 연합
남유다에게 연합 가담 제의
앗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침공
남유다의 제의 거절
연합군의 남유다 침입
남유다의 위기
앗시리아에 원조 요청
앗시리아에 의해 연합군 격파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베가를 죽이고 앗시리아에 항복
디글랏발레셀의 뒤이어
살만에셀 5세가 왕위에 오름
호세아가 이집트와 교섭하고 앗시리아에 공물 바치기를 중단
주전724년
살만에셀의
북이스라엘 침공
화친했던 이집트 지원 없었음
2년만에 사마리아 함락,
주전722년 북이스라엘 멸망
앗시리아의 다음 왕 사르곤2세 때
여러 지방의 반란이 일어남
반란을 제압한 뒤 반란지역의 종족을 사마리아로 이주
이들의 후손이 사마리아인
3. 앗시리아의 위성국 유다: 아하스(주전735-715년)
1. 혼합주의적 신앙
아하스는 디글랏빌레셀 앞에서 충성을 다짐하고 앗시리아의 신들에게 경배를하고 수용했다.

→ 이교 관습들이 성행

→ 유다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배교의 시대
2. 경제적, 사회적 상황
이방 신상 앞에서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하스
(대하28:1-4)
웃시야에 의해 탄탄히 다져진 경제적 기반 덕분에
급격한 경제적 파탄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이스라엘을 멸망 시켰던 사회적 병폐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하스의 이교 정책 → 율법의 붕괴 → 사회적 기강 위협

부유층들 → 사치, 부정부패

성직자 계층 → 보수에 따라 신탁 변경
아하스
(주전 735-715)
멸망
히스기야
(주전715-687년)
히스기야의 정책과 그 의의
d. 히스기야의 개혁
a. 국내적 요인
b. 국제적 요인
히스기야와 산헤립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여호와 신앙인으로서 이교에 대한 종교적 반감
선지자들의 경고에 따른 국내 개혁의 필요성 절감

다윗신앙, 시온신앙에 비춘 현 상황에 대한 불만
앗시리아의 정세
바벨론의반란
소아시아 정복사업
우라르트 왕국 제거
갈그미스 반란
앗시리아
사르곤 2세(주전721년)
팔레스타인
군사작전 x
이집트의 정세
c. 반란의 소요: 히스기야와 사르곤
히스기야 정책의 배경 (반앗시리아 정책)
이집트의 전환기
주전8세기 중엽 무너졌던 중앙정부
(22왕조~24왕조)

주전716/15년경
이디오피아 왕 피안키에 의해
제25왕조 창건
주전710/9년 이집트 전체 통일
이집트
아스돗
이집트의 재기
아스돗의 반란
아스돗 → 유다, 에돔, 모압에게 반란가담 제의

※ 유다는 반란 가담 찬성 반대 두입장으로 나뉨
(이사야의 격렬한 반대)

※ 사르곤의 세력 절정기
이방관습 배제, 여러 우상 제거
지방 산당 폐쇄시도
종교적개혁
정치적 개혁
북이스라엘 백성을 개혁에 참여 시도
→ 에브라임의 거절
→ 앗시리아의 벧엘 성소 재조직
실패
사회적 개혁
왕의 도장이 찍힌 그릇이 이 시기의 것이라면,
재정,행정상의 개혁
매매와 조세 징수의 부정을 바로잡으려 노력
a. 반란의 발발
소아시아 원정 정복 중에 사르곤2세 사망
산헤립이 다음 왕위 계승
이 때 바벨론과 서부지역의 반란
이집트의 반란 지원
반란이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지역으로 확산
상당규모의 연합세력 형성
히스기야 - 팔레스타인 연합세력의 주모자
b. 주전 701년의 산헤립의 침공
바벨론 반란 잠시 평정
두로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침공
두로의 항복 → 반란 와해 → 아스돗, 모압,에돔,암몬 항복
아스글론,에그론, 유다 항전 → 앗시리아의 보복

→ 히스기야는 항복하고 많은 양의 조공을 바침

(성경지명: 아라랏)
c. 히스기야의 만년
701년의 침공 이후
바벨론의 지속적인 반란 → 바벨론 연합과의 전쟁에서 앗수르 패배 → 히스기야의 또 한번의 반란 → 바벨론 평정 후 유다 침공(주전688년) → 히스기야의 항전
→ 디르하가의 지원(이집트 왕)
예루살렘의 구원
이듬해에 히스기야의 죽음(주전687/6년)
다음 왕 므낫세 앗시리아와 화친
히스기야의 독립투쟁 실패
에그론
c. 주전 8세기 말엽의 유다 선지자들
1. 국가의 위기 사태와 선지자들의 메시지
※ 주전 8세기 말엽의 유다 선지자
a. 유다의 정신적 위기

사회적 병폐, 이교들과의 혼합주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기강 헤이

민족적 투쟁심 꺾임

맹목적 다윗신앙으로 위기 외면
주전 8세기 말엽의 사건들
유다의 맹목적 신앙을 흔들어 놓음
여전히 맹목적 광신으로
자멸적인 국가반란을 꾀하는 무리
불신앙으로
앗수르에 고개를 숙이는 무리
b. 선지자 이사야 : 그의 생애와 메시지
국가적, 민족적 위기 상황 속에서
민족을 이끌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국가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퇴폐한 상류 계층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앗시리아는 그 도구가 될 것
소수의 사람들만 남게 될 것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밭 비유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 침공으로 인한 위기 때 (주전 735-733)
아하스는 앗시리아에게
원조를 요청하며 국가 독립 포기
(끝내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음)
이사야는 연합군은 유다를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며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지 말고 여호와의 약속을 믿을 것을 강권
이사야
국가
그러나 이사야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음
다윗가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새로운 통치자의 출현과
심판을 통해서 깨끗하게 된 남은 자의 출현을 기대
C. 이사야 그 후의 활약과 메시지
이후 아하스의 통치기간 중에는 국가 정책에 영향력 끼치지 않음
히스기야 때 이집트와 블레셋인들이 반란을 꾀함(주전714-712)
이사야는 이집트에 의존하지 말것을 강권
반란이 분쇄 되었을 때
유다가 피해를 모면한 것으로 보아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임
사르곤이 죽고 팔레스타인 전면적 반란(주전 705년)
히스기야는 이집트와 교섭
이사야는 이집트와의 교섭을 반대
경건치 못한 국가 지도자들은
이사야를 비난
이사야는 포기하지 않고
주전701에 반란에 대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국가의 위기가 찾아오자
반란을 규탄하고 포기할 것을 강권
히스기야의 또 한번의 반란과 산헤립의 두 번째 침공 (주전688년)
이 때 이사야는 앗시리아의 교만이 지나쳐
여호와께서 유다를 앗시리아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라고 확신함
유다 최악의 위기에서 히스기야 왕의 편을 들며 예루살렘이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함
히스기야는 굳건히 버티어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으며
이사야의 말은 사실로 입증됨
이 후 활동에 대한 기록 없음
이사야와 국가의 충돌
d. 미가의 메시지
미가에게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처럼 악했고 이에 대해 신랄한 파멸의 메세지를 전하였다.
미가는 이사야 보다 훨씬 과격하게 유다의 멸망을 선포
하지만 미가 역시 다윗언약의 소망은 붙잡고 있었다.
2. 선지자들의 설교의 효과
앗시리아에 의한 민족의 굴욕에 대한 국가 신학 옹호
유다 개혁의 추진력 부여
장래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 부여
a. 선지자들과 국가 신학
b. 선지자들과 개혁운동
c. 선지자들과 민족의 소망
선지자들의 설교는 히스기야의 개혁에 큰 힘이 되었다.

사회 경제적 폐습에 대한
경고는 개혁에 윤리적 성격을 부여했다.

선지자들의 제자들로 인해 선지자들의
설교가 문서화 되어 후대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국가의 위기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의문 제기

이사야는 현 상황을 시내안 언약에 근거해서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다. (인과응보)

죄에 대한 징벌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

또한 그 분의 약속의 실현을 위한 깨끗하게
하는 연단이었다.
A
B
C
유다의 현재는 하나님의 약속에
조건에 미치지 못하였고
약속의 성취는 심판의 날 너머로
밀려났다.

심판의 날은 약속 성취의
서곡으로, 연단과 정화의 날로
이해되며 이로 인해 민족적
소망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 같이 현재의 국가 너머로
밀쳐진 약속의 소망은
나라의 멸망 후에도
존속 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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