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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과제

조선후기 근대 태동기
by

yeji kim

on 7 Decembe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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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근현대사 과제

근대 태동기? 근대가 태동하는 시기? 근대적 요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정치의 구현 합리적 경제활동을 통해
누구나 자유로이 이윤 추구 사회 각 계층이 법 앞에 평등함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과정으로 를 갖추는 시작 단계 근대적 요소 근대적 요소 에 대해 알아볼까요? 우리는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되었으며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과 서민문화가 발달하면서
민중의식이 성장했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을 '근대태동기'라 부른다. 조선시대 근대 태동기 하면 떠오르는 인물! 바로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 어린 고종을 대신해 대원군의 자격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하응!


그는 세도정치로 엉망이 된 조선 후기에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박차를 가했다.


불안정한 조선후기시대에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지만


궁극적으로 '전제왕권강화'를 심화시키고 그로인해
근대화를 늦췄다는 비난 또한 듣고 있다. 전제왕권을 옹호하였던 대원군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비하여 선택한 정책! 통상수교거부정책 그는 서양세력이 통상을 요구해 오자 그들이 경제적 교류를 앞세워
우리나라를 침략한다고 보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내세웠다. 위정척사운동 이러한 대원군의 뜻과 같은 맥락의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잘못된 것을 배척하고 바른것을 지킨다. 조선 내 유생들은 서양열강의 통상요구와 개항,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 등의
대내외 정세의 변화에 맞서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화사상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문물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 온건 개화파 급진 개화파 김홍집 어윤중 동도서기론 주장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 개혁 주장 문명개화론 주장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급진적 개혁 주장 김옥균 박영효 갑오개혁 주도 갑신정변 주도 이와 반대대는 개념의 19세기 후반 어지러운 세계의 정세에 맞춰 조선 또한 급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 갔던 건 '개화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후기, 개화파들이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통상개화론자들에 의해 맺어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 통상개화론자 북학파의 실학정신을 이어받았고 이후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통상개화론자. 이들은 무분별하게 서양의 문물을 베껴오는 것을 개화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서양이나 외세의 문물 중 장점만을 취해 우리에게 이득이 되도록 하는 것 진정한 의미의 개화라고 하였다. 운요호사건 운요호의 모습 일본 국내에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함 통상수교를 반대하던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조선 국내에 개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 일본은 이러한 조선 국내 상황을 기회로 삼아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운요호를 파견 강화도의 조선군들이 한강을 올라오려는 운요호에 경고사격을 하자 이것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 조선 최초의 불평등조약

이 조약은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불평등한 조약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배제하고 침략적 활동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 제 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에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일 때는 모두 일본국 관리가 심의한다.' 강화도 조약은 쇄국정치를 펼쳤던 조선이
처음으로 외세와 최초로 근대적인 조약을 맺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주체적인 개화를 원했던 통상개화론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조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 침략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띄고 있다. 강화도 조약 제 7관
'조선국은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함을 허가하여 그 위치와 깊이를 상세 조사하여 지도를 만들어 양국의 선객들이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조선의 해안측량권을 가져가는 것은 군사적 목적이
깔려있는 것으로 이 조약외에도 '원산'에 항구를 개항하는 것 또한 군사적 목적이 숨어있는 조약이다. 역시 이 조약들 또한 불평등 조약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친 쇄국정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쇄국정책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ㅎㅣ려 두둔하는 편이다. 이르고 빠른 개방은 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친 쇄국정책이 조선의 세계를 향한 눈과 귀를 멀게 했던 것은 아닐까? 통상개화론자들이, 당시 정부 인사들이 조금만 더 국제정세에 눈이 밝았다면, 손을 뻗어오는 외세들의 숨은 속마음을 더 재빠르게 알아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주체적인 개화를 꿈꿔왔던 통상개화론자들의 생각엔 동의한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개화의 방향과 정도를 정했다면 더욱 똑똑한 개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친 쇄국정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쇄국정책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ㅎㅣ려 두둔하는 편이다. 이르고 빠른 개방은 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친 쇄국정책이 조선의 세계를 향한 눈과 귀를 멀게 했던 것은 아닐까? 통상개화론자들이, 당시 정부 인사들이 조금만 더 국제정세에 눈이 밝았다면, 손을 뻗어오는 외세들의 숨은 속마음을 더 재빠르게 알아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주체적인 개화를 꿈꿔왔던 통상개화론자들의 생각엔 동의한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개화의 방향과 정도를 정했다면 더욱 똑똑한 개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급진개화파의 3일천하 급진개화파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급진적인 개화를 주장한 이들로 기존의 질서,제도를 모두 허물고 새로운 신문물,신제도 등을 받아들이는 급진적 문명개화를 주장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위로부터의 개혁을 결심하게 됨 갑신정변의 배경 이를 위하여 일본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였지만 거절당함. 개혁에 필요한 정치자금의 확보가 어려워진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하여 활로를 찾고자 함. 갑신정변의 전개 갑신정변을 일으킨 핵심인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한 청이 조선에 파견하였던 군대의 절반을 철수시킴 이 때를 틈타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공사로 부터 협조와 지원을 약속받음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킴 하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함 갑신정변은 그 자체로 큰 의의를 가진다고 말한다. 중국에 대한 전통적 사대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던 점. 왕의 전제정치를 넘어서 근대 지향적인 정치구조를 수립하고자 한 점. 등을 통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갑신정변이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들이 생각했던 이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ㅎㅣ려 근대국가수립은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맞긴 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근대국가수립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점점 압박해오는 외세의 세력에 맞서 조선 내의 체제를 정비하여야 했던게 우선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청과의 사대관계를 끊으려 했다는 점을 가지고 자주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청을 대신해 일본에게 의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갑신정변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너무 일본에 의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때도 일본은 조선을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땐데 그러한 점을 간과한 점이 너무 아쉽다. 그리고 똑똑하고 유능한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에게 이용당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1차개혁 -정부와 왕실분리
-의정부 8아문으로 개편
-과거제 폐지
-청국 연호 폐지
-신분제 철폐
-연좌제 폐지
-은본위제 채택
-조혼 금지및 과부재가 허용 1차개혁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갑신정변 이래 개화파가 추구해온 개혁구상이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2차개혁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 구성
-홍범14조 발표
-행정구역 개편
-군사 경찰제도 확립
-사법제도 근대화 3차개혁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 1차갑오개혁의 개혁기구인 '군국기무처'의 모습. -연호 제정
-소학교령 발표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제3차 갑오개혁, 즉 을미개혁이다.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세력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퇴색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 의해 민비가 학살(을미사변)된 후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되다시피 하였다. 결국 갑오개혁 또한 일본의 간섭을 피하지 못하였고 거기에다가 일본에 의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인사들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야욕을 알지 못했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갑오개혁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발판을 마련한 것만은 확실하다. 갑오개혁은 조선이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갖추어야할 겉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본에 정치적으로 예속되는 결과를 가지고 올 만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조선후기 개화기때 우리의 자주성을 가지고 개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피해자가 조선,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개화파 지식인들은 아닐까? 이러한 갑오개혁의 결과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의 이유로 전국에서 반일 의병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고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 친러내각을 세워지게 되었다. 이에 친일 갑오정권은 무너졌고 갑오정권에 참여했던 개화파 인사들과 관료들은 역적으로 몰려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군국기무처는 초정부적인 회의기구로써 개혁을 단행하는 기구였다. 주권수호와 자강개혁의 꿈 설립배경 을미사변, 아관파천등을 통한 조선 국내의 자주성 훼손 이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서 1896년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활동 서재필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개최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독립협회의 창립목적을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하였다. 독립문 건립을 통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국내외에 뚜렷이 밝고자 하였다. 민중계몽을 위해 강연이나 토론회를 열던 독립협회는 이권수호를 위한 자주국권운동을 위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의회설립운동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의 성공적 개최를 계기로 정치단체로서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 후 법률과 재판에 의한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 등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 을 전개하였다. -참정권운동
(의회설립운동) -기본권 획득에
대한 운동 독립협회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면서 민중개혁까지 도모하고자 하였던 단체였다. 국민계몽과 국민의 민권을 신장시킴으로써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였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에 고종은 박정양을 등용하였고 박정양은 독립협회와 협력하여 의회설립과 내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그것의 일환으로 중추원 의관의 과반수를 독립협회에서 선발한다는 '중추원 관제 개편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의회가 설립될 전단계까지 도달하였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인해 강제로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입헌군주제의 꿈도 사라졌다. 그러나 이전의 어느 사건과 단체보다 민주적이고 자주적이었던 독립협회가 외세의 압력도 아닌 전제왕권을 옹호하였던 조선 내의 보수세력에 의해 해산된 점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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