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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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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 신

on 16 Decemb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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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명성황후 시해사건

역사교육과
201316270
신나라

목차
1.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서술 내용
2.을미년의 잔혹사
- 국내외정세
- 전개
3.작전명 '여우사냥'
- 시해배후
- 시해장소
- 시해방법
4.명성황후 생존설
5.결론
6.Q&A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서술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금성출판사)
을미년의 잔혹사
국내외 배경
전개
결말
국외 정세
일본 :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친일내각을 수립하며 조선의 지배야욕을 드러냄
러시아 : 삼국간섭을 통해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을 견제하고 입지를 넓혀나감.
후에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러시아가 아관파천을 일으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 대립의 시작
국내 정세
명성황후의 인아거일책
: 러시아를 동원하여 일본을 몰아낸다는 계획. 삼국간섭에 굴복한 일본의 약세를 틈타서 실행한 조치. 친러내각 수립.
-> 명성황후 시해의 원인
사건 전개
결말 및 조치
을미사변의 주모자는 누구인가
1) 흥선대원군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
명성황후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던 대원군이 권력쟁취를 위해 황후를 시해한 것.
But, 대원군의 경복궁 출발 지체, 일본인의 경복궁 침입, 일본공사관의 문서위조 등을 보면 대원군이 배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있음.
을미사변의 주모자는 누구인가
2) 미우라 주모설
주한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의
단독적인 결정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설.
But, 시해기간이 짧고,
사건 계획의 주도면밀함에서 보았을때
개인이 행하기 어려움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

—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 〈에조 보고서〉

-일본 "대원군과 조선인(훈련대)의 소행"
-여론이 좋지않자,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7명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
->형식적 구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

-폐서인 조칙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의 계기


역사상 고금미증유의 흉악한 행위, 을미사변의 전말
작전명 '여우사냥'
1) 누가 주모했나
2) 어디서 시해당했나
3) 어떻게 죽어갔나

시해 장소
1. 곤령합 복도
‘왕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에 섞여 누가 왕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의 곤령합에서 뜰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왕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가 본국에 보고한 ‘사건 경위 보고서’
2. 곤령합 뜰
‘왕비는 뜰 아래로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혀 쓰러졌고 살해범들은 왕비의 가슴을 짓밟으며 몇 차례나 칼로 찔렀다. 그리고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까지 살해했다’

- 주한 영국 영사 힐리어가 사건 사흘 뒤 궁녀와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한 여의(女醫) 등 현장에 있던 조선인 4명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

3. 장안당
‘왕후폐하를 장안당(고종황제의 침전) 뒤편 뜰로 끌어내 살해한 뒤 (시신을) 곤령합 옥호루에 내려놓았다’

- 주한 일본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시해사건 2개월여 뒤인 12월 21일 본국 외무성 부상에게 보낸 보고서
어떻게 시해당했나
을미사변의 주모자는 누구인가
3) 이노우에 (일본 정부)
- 미우라를 천거한 것이 이노우에

“이노우에가 왕비 시해의 주모자이며 미우라는 희생양에 불과하다” - <<노스 차이나 해럴드>>

- 일본 내 위상을 보았을때 이노우에의 주도가 곧
일본정부 주모
명성황후 생존설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아주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 로바노프는 일본군이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처럼 일본군도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 라돌린 보고서
“왕(고종)은 여전히 왕비(명성황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1986년 2월11일 아관파천 나흘 뒤인
2월15일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
뷰클럭에게 보낸 문서.
결론
1.을미사변은 일본이 조선내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사건이다.
2. 일본에 의해 왜곡,은폐된 곳이 많아
좀 더 확실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는 國母를 시해하면 죄가 발각될까 싶어
대원군과 내통한 후 한밤중에 孔德里(공덕리)로 가서,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인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 황현 <매천야록>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시해 계획
-> 훈련대와 대원군을 가담시키려함
-> 훈련대가 급작스럽게 해산하는
바람에 거사를 앞당김(10.10->10.8)
-> 예정 시간은 새벽 3시였으나 대원군을
끌고오느라 새벽 5시로 지체됨. 예정과
달리 목격자가 많이 발생.
참고문헌
강범석, 『왕후모살』
김문자,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 지식산업사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황현 저, 조준호 역, 『매천야록』
Q&A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경, 대원군 집 근처에 사는 조선여인이 가톨릭 공관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주교인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타게 요청했다. 그녀는 나에게 일본인들이 조금전 대원군을 잡으러 집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 러시아 보고서중 묘텔의 증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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