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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ㄱ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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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e jeong

on 28 Septembe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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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ㄱㄱㄱㄱ

단군신화 & 주몽신화
강독 및 연구사 단군신화는?! The Myth of Dankoon

once upon a time there is a god who look below the
sky. Contents 단군신화 강독
단군신화 연구사
주몽신화 강독
주몽신화 연구사 단군연구사 한국문헌신화는 대개 건국신화로 한국신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초기부터 인식되어옴.
연구성과가 가장 많이 축적된 영역.
그러나 건국신화연구는 그 동안 개별작품론을 제외하고 유형론과 구조론으로 나누어짐.
유형론은 한국 건국신화를 일광이나 난생화소, 곰화소 등을 지니고 있는 유사문화권 단위와 비교해 북방계 혹은 남방계로 유형을 분류.
구조론은 구조주의나 기호학에 근거를 둔 연구로 서사적 기율의 발견에 관심 가짐. 기초정리 고조선 건국 신화 문헌 정리 고조선 건국 신화에 관한 문헌 전승은 적어도 통일신라 시기에 고기류의 문헌들이 마련되면서 1차적으로 형성.
고려 초기에 전대 역사서가 편술되면서 이들 고기류가 근거가 되어 삼국사의 본기 즉 조선본기, 혹은 단군본기가 이루어짐. 그 과정에서 단군후예설이 추가되어 이승휴가 이를 수용하면서 제왕운기(1287)를 마련함. 이 후 고려를 거쳐 조선의 유가들에게까지 계승됨. <단군계승형> 1차적으로 형성된 고기류의 고조선 건국신화는
관찬 정사의 흐름과 달리 삼국유사로 수용 전승되는
계보를 이룸. 삼국유사는 환인에 제석이라는
주석을 덧붙인 정도. <국인추대형> 또한 여말선초에 사대부들의 ‘자주’의
전승에서 주도성으로 인해
조선조의 가장 일반적인
고조선 건국 신화 전승이 됨. <단군선인형> 유가와는 달리 도가에서는 조선조에 와서
새롭게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학집>의 전승은 특수한 비주류 전승임. 조선시대의 단군연구사 15세기 조선 건국기의 단군연구 조선 건국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사료에서 우리나라 개국조로서의 단군론을 구축하려던 시기. 동시에 중국과의 연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자조선을 주목함. (조선시대 민족 정체성의 문제는 단군 대 기자의 경쟁 여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됨) 16세기 단군연구는 도학파의 성장과 함께
관념적 유교보편주의 경향을 따름
(주자학적 명분론을 강화시킴) 17세기 양란을 겪은 후 민족이란 자기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 단군에 특히 관심을 모은 시기.
조선 초기의 단군 대 기자의 이중성을 극복하면서
단군 중심의 자주적인 인식을 촉발하는
새로운 틀의 단군연구를 마련. 18세기 주자학에서 벗어난 이단적인 경향을 보이는 도가사학이 단군 문화의 이해에 매우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어 냄 19세기 일제하에서 민족의 구심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범 단군주의적인 상고사관을 구축하고 더욱 거시적인 민족주의 단군연구로 체계화함. 신채호,
이능화 – 신교론을 더욱 체계화하여 단군신교가 조선 고유의 신앙이 됨을 밝히고자 함
20세기 근대화의 추구와 자주성 고취에 대한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단군 연구도 기자중심의 사대사상은
배척을 받고 실학파들이 수용한
단군 중심의 자주 사상이 수용됨.
또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대종교의 성립과 더불어 발전하게 되는데 대종교는 단군 정신의 중흥이라는 이념에 따라 한국 상고사 전반의 체계를 단군 중심을 새로이 엮게 됨.
이 과정에서 허목, 홍만종, 이종휘 등이 자주적 단군에 대한 연구를 역사 인식론으로 수용함.
특히 허목은 조선 최초로 현실론적 단군 정통론을 제기함. 환인-신시-단군으로 이어지는 계통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성과 근원성을 굳건히 함. 또한 홍만종은 단군이 옛날
구궐종족 시대 때 처음으로 군장이 되어
의식, 주거, 예법 등 문화를 연 것으로 봄. <순오지>
이종휘는 신사가 중심이 되는
고대 신앙을 바탕으로 단군을 연구함 <신사지> 조선시대 이후의 단군 연구사 제 1기 (1894~1919) 식민사관에 의한 연구기 안정복이 편찬한 <동사강목> 등 몇몇 조선조 학자들이 소신 있는 역사의식을 갖추어 나타내지만 본격적인 학문적 접근은
식민사관에 의한 연구로부터 시작 제 2기 (1920~1945) 식민사관과 근대 민족사관에 의한 연구기 최남선, 신채호, 정인보 등이 민족적 자존이라는
의식을 갖고 전개한 근대 민족사관에 의한 연구 시작.
신채호 – 단군연구의 세 단계 변천과정을 보여줌
[제 1기] – <독사신론>에서 단군의 신화적 이해,
단군의 발상지, 태백산의 해석문제 등 보여줌
[제 2기] -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신교적인
단군연구를 함
[제 3기] – 대종교의 인식을 근대사학으로 끌어올림.
신채호는 대단군 조선시대를 삼신론이
기초가 되어 전개되는
신화와 역사 공존의 시대로 봄. 제 3 기 (1946~1970) 실증사학적, 근대 민족사관에 의한 연구기 광복 후 김재원이 중국 산동성 무씨사당 화상석을 바탕으로 획기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발표해 단군신화의 연구 분위기를 고조시킴.
김지용, 김태곤, 장주근 등에 의해 민속학적인 단군 연구가 이루어지고 이강오, 이능화, 김경효 등에 의한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 고찰 등이 주목됨. 특히 김광일, 이부영 등에 의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이 문학연구에 큰 도움을 줌. 양주동, 서정범, 강길운 등의 단군연구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등이 이루어짐.
단군신화의 문학적 고찰은 <조선문학사>에서 최고의 문학으로 거론한 것이 주목됨, 이후 황패강은 ‘단군신화의 한 연구’(1967)에서 우리 고대인들의 생활과 우주 인식에 대한 민족서사시로서 평가, 환웅을 문화영웅으로 논술하고 한국 서사문학의 원형으로서 금기모티프, 재생, 탈피모티프를 거론함. 이어서 김봉영은 단군신화를 민족의식이 강렬한 가치있는 우리 문화의 기원신화임을 강조함.
제 4기 (1971~1980) 실증사학적, 종교학적 연구기 1970년대에 현용준은 ‘한국신화에서 본 세계구조’에서 구조주의적 고찰의 접근을 시도함.
장덕순은 <한국문학사>에서 단군신화의 서사문학의 전승적 기능으로서의 화소()와 3가지 모티프의 특성을 언급함
김광순은 ‘시조신화의 양상’(1975)에서 단군신화와 여러 건국시조신화, 성씨시조신화들을 비교, 고찰함. 또한 이어령은 단군신화가 한국서사문학의 원형이 되어 영웅서사시에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고 역설함. 강귀수는 <단군신화의 연구>에서 단군신화가 국문학의 원초형임을 시사, 국문학의 서정, 서사작품과의 상관성을 상세히 나타냄 제 5기 (1981~현재) - 다각적 연구기, 종합적 연구기 1980년대에 이광풍은 노드럽 프라이(N.Frye)의 신화비평이론을 응용하여 제의구조와 순환구조의 성격을 나타냄, 현용준은 단군신화를 무속신화와 비교하고 갈등구조의 원형과 한문학의 원류가 된다고 강조함. 한편 정종대는 조신설화의 구조와 관련 지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이론을 응용, 비교, 고찰함. 3대의 분석
제1대 - 해모수 천제의 태자로서 천제의 명을 받아 부여의 고도에 내려왔다. 이 점은 천제의 서자인 환웅과도 비슷하다 하겠으나,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환웅은 하계에 내려온 일차적인 동기가 본인이게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해모수는 ‘아침이면 정사를 보살피고 저녁이면 하늘에 올라간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주 지상계에 정착한 존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모수는 당초 유화를 왕비로 맞아 천상에 동반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하계의 존재가 천상계에 들어오는 것을 금기로 다루었던 민속설화의 발상과 무관하지 않다. 유화가 금와왕의 별궁에서 잉태하여 알을 낳음으로써 천제자 해모수의 역할은 끝난 것처럼 그 뒤의 행적은 전혀 볼 수 없다. 그는 당초 ‘태자’라는 신분 때문에도 하계에 정주할 수 없는 천신적 존재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제의 명으로 하계에 강림한 것은 하계의 여인에게서 영용한 지도적 인물을 낳아 그로써 새 왕국의 장을 열게 하고자 한 천제의 경륜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제2대 - 주몽
천제자 해모수와 하백녀 유화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는 자신의 고귀한 출자와 관련하여 남다른 긍지와 포부를 품고 있었다. 이같은 자의식은 일찍부터 어머니 유화로부터 일깨워져 왔던 결과로 보인다. 후에 주몽은 모친 유화와 부인 예씨를 동부여에 남겨 둔 채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개국하였다. 비류국의 송양왕의 시험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주몽은 국정 수행의 과정에서 천상에 올라가 천제를 뵙고 주사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주몽은 여타의 건국 시조왕들과는 달리 유체를 하계에 묻지 않은 천신계의 신성왕이었다고 하겠다. 제3대 - 유리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서 취하여 잉태케 한 예씨의 몸에서 난 아들로 주몽은 아들의 출산을 미처 보지 못하고 부여를 떠나 유리는 편모 밑에서 자랐다. 후에 부친이 숨겨둔 단검을 증표로 찾아가지고, 부친을 찾아 고구려로 간다. 유리 또한 주몽의 자식답게 활을 잘 쏘았다. 그는 송양의 딸을 비로 맞았으나 다음해 송씨가 죽자 화희와 치희 두여인을 계실로 맞고 그 사이에서 ‘황조가’를 읊었다. 유리에 이르면, 그의 선대인 해모수와 주몽에게서 볼 수 있는 신화적 권위는 없으며, 애증의 감정을 주체 못하는 인간왕의 모습이 역력하다. 주몽신화와 동명신화의 관계에 대한 연구
동일한 신화로 보는 견해
별개의 신화로 보는 견해
이 견해는 부여의 건국신화로 전하는 동명신화 기록을 고구려 건국신화인 주몽신화의 잘못된 기록으로 봄으로써, 동명신화의 독자성은 무시해버린 채 이를 주몽신화의 이본 정도로 취급하는 시각이다. 고구려 건국신화 내지 그 시조인 주몽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부여 건국신화와 그 시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사실상 거의 정설화되어 있다. 이병도
<논형>을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 나타나는 부여 시조의 전설이 모호하여 신빙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다음, 거기 기록된 부여시조 전설은 확실히 고구려 시조전설을 거꾸로 전한 것이라고 단정함. 동명왕이 부여에서 도망하여 엄호수를 건너 탁리국에와서 왕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을, 거꾸로 후자에서 전자로 도망한 것처럼 잘못 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김상기
<논형>에 나오는 부여 시조 설화인 동명설화는 고구려 시조 설화가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고구려의 동명설화가 일찍이 중국에 전전하는 사이에 본말이 엇바뀌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기문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다시 고구려에서 백제가 나왔다는 사실은 모든 문헌에서 일치하는 바이니, 건국신화를 고찰하려 할 때도 고구려보다 부여가 먼저 언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부여의 건국신화만을 따로 논의한 적이 거의 한번도 없었음을 반성하면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논자는 부여 건국신화가 후일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전혀 동일한 내용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한 나머지,<대동운부군옥>에서의 해석을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보아, <탁리> 내지 <색리>는 <고리>의 와전이며 <고리>는 고구려 표기라고 추정하였다. 이 견해는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주몽신화를 전혀 별개의 신화로 보자는 주장이다. 기록상 동명신화는 엄연한 부여 건국신화이고, 주몽신화는 고구려 건국신화로 되어있으니, 각기 그 독자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견해는 아직 정설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교과서와 개론, 통사류에는 거의 반영되지 못하고 있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꾸준이 표명되어 동일시 견해에 대한 반명제로서 작용하고 있다.
김정학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신화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화가 전승과정에서 변화 윤색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부여 부족이 가졌던 시조신화가 부족의 분열과 함께 고구려 부족의 시조신화로 되었고, 다시 백제부족의 시조신화로 전화되었다고 하여, 원칙적으로 동명신화와 주몽신화를 구분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홍직
부여와 고구려 두 나라 모두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여 건국하였다는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시조에 대한 신성관도 일치하고 있어, 얼마든지 양국의 건국설화가 대동소이할 수도 있는 법인데,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하나의 독자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동일시 의견을 내세운 이병도의 설을 비판하였다.

첫째, 피해 나온 나라이름의 경우
-이병도 : 다양한 표기들 중 <위략>(3세기)의 “고리”를 선택, 이를 “구려(고구려)”라고 해석
→선택하기로 들면 마땅히 그 선행 기록인 <논형>(1세기)의 “탁리”를 취해야 함.

둘째, 건넌 물 이름의 경우
-이병도 : 여러 표기 가운데서 이번에는 <논형>의 “엄호수”를 선택한 다음 이는 아마도 “엄니수”의 잘못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데까지 논리를 비약시킨 끝에 그러니 이것은 광개토대왕비에서 주몽이 건넌 것으로 소개된 “엄리대수”라고 해석
→견강부회한 감이 짙어 튼튼한 고증은 못됨 김철준
북부여, 고구려(졸본부여), 동예(동부여), 백제(남부여)가 분열하기 이전단계의 전부여족이, 애초에는 북중국의 어느 원주지에 있다가, 그 생활권이 무너지면서 각 부족별로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동명신화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제 1차 분열시의 신화가 북부여족의 동명신화(고리국신화)요, 제 2차의 것이 고구려의 동명신화, 제 3차의 것이 고구려의 방계로서의 백제의 온조설화라는 설명이다. 주몽연구사 단군신화 번역본과의 차이 지적 Sandalwood
직역)백단향 (영문사전 표기)
한역)박달나무
- 실제 박달나무는 영문으로 birch라고 표기한다.
이는 원본을 영역하는 과정에서 sandalwood라고 오역한 것을
바로 잡아 번역한 것으로 사료된다.

This was done in 2333 B.C.
직역)"이것은 기원은 233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한역)"이 일은 4283년 전에 있었다."
영역에 대한 직역이 아니라, 더 알기 쉽도록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주몽신화 번역본과의 차이점 지적 Lo and behold
사전상)자! 보시오
번역본)이게 어찌된 일인가?
번역본에서 매끄럽게 하기 위하여 의역을 함.

bade
사전상)bid의 과거형. ~하라고 말하다.
번역본)명령하다.
bade는 옛 글투로써 영문번역판에서 쓰인 단어다. 고로 현재 영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한글 번역본에서는 명령하다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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