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ing
Your new presentation assistant.
Refine, enhance, and tailor your content, source relevant images, and edit visuals quicker than ever before.
Trending searches
-매일 같이 주변에서 봐왔으면서도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화장'에 대해 조사하면서 생각보다 '화장'의 역사가 아주 길고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자연 친화적인 재료, 돼지기름, 녹두, 콩 껍질, 쌀겨 등이 화장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고 지금 존재하는 화장품들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돼지기름은 크림의 원료가 되었고 미묵에 사용되었던 나무재는 눈썹 그리는 데 이용된다-이 신기했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화장을 어떻게 지웠나라는 질문이 조사하기 전에 가장 궁금했었는데 녹두 같은 곡물이 세정제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이렇게 화장의 역사에 대해 조사하며 이런저런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 선조들이 화장을 시작할 때 단순히 치장하는데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피부 보호 등의 중요한 기능을 고려하여 여러가지 자연의 재료들을 지혜롭게 사용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다른 나라에 그 기술을 전파할 만큼 화장이 진보되었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화장'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일단 여성들은 직장인, 주부, 학생 가리지 않고 화장을 합니다. 남성들 또한 연예인이나 특수 직업 때문에, 그리고 취미로서 화장을 하고,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화장을 하니, 화장이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넓고 깊게 관여되어 있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일 것 입니다. 저희는 이런 '화장'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 조사 및 탐구해보기로 했습니다.
조선시대 전기의 지배층은 고려시대 초기의 지배층처럼 검약을 강조하였습니다. 아울러 유교를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 내외법이 강조되어 자유연애와 외출이 금지되었습니다. 여성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성의 화장이 부덕한 행위로 간주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화장품 생산이 위축되거나 화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장 개념의 세분화가 촉진되었습니다. 양갓집 여성들의 생활 화장과 기생·궁녀 등 특수층 여성들의 의식화장이 더욱 뚜렷해지고, 여느 여성들의 생활화장도 청결 위주와 혼인, 외출 시의 화장으로 세분화되었습니다.
화장도구:경대, 거울, 연지, 분, 향, 면분, 밀기름, 비녀, 참기름, 모시실, 족집게, 얼레빗, 참빗, 양칫대, 비누, 세숫물, 휘건, 수건 등
외제화장품과 아울러 입체화장기법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는데, 사회적 물의가 적지 않았던 신여성과 기생 중심으로 신식 화장이 신속히 보급되어 화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용하기 간편한 신식 화장품과 색채화장이 도입·보급되는 과정에서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의인소설인 여용국전이 여성의 화장을 국가정치에 비유하여 권장하고 있고, 화장품과 화장도구가 18종이나 등장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또 숙종 때 화장품 행상인 매분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화장품의 생산·판매가 산업화할 조짐을 보일 정도로 다양하게 대량 소비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일시적이긴 하나 궁중에 화장품 생산을 전담하는 관청인 보염서가 설치된 적이 있고,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때 일본에서 발매한 아사노쓰유(아침이슬)라는 화장수 광고문안 가운데 조선의 최신제법으로 제조한 것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장품 제조기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여인상이 달랐는데, 소실이나 기생으로는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것 같은 눈썹, 복숭아 빛 뺨, 앵두 같이 붉은 입술, 구름을 연상하게 하는 머리, 가는 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며느리나 아내로는 얼굴은 둥글고 통통하며, 살빛은 흰 편이고 흉터나 잡티가 없고, 머리숱이 많고 검으며, 인중은 길고 입술색은 붉은 빛을 띄어야 아들을 잘 낳으며, 건강하고 성격이 원만하고 성실한 여성을 추구하였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여성은 미인이나 박명하고, 후자의 여성은 유자상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소실과 기생 중심으로 분대화장이 보급되었고, 여염집 여성들은 깨끗하고 맑은 피부를 간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대부분 담장에 그쳤습니다.
우리나라 화장의 역사는 한반도 동 북한 지역에 있던 옥저와 읍루 중 읍루인의 역사에서 시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읍루인의 생활방식은 산림 사이에 살아 몹시 추워 항상 토굴 안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겨울에 을 발라 동상 예방을 한 것이 우리나라 화장의 시초입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수공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산업화가 늦어져 외국의 화장품 기술에 비해 뒤떨어졌습니다. 1922년에 제조허가 1호로 출범한 박가분의 경우를 들어 보면, 인기를 얻어 하루에 5만 갑이나 팔렸다고 하지만 생산방식이 재래식에 머물렀고, 남성분의 부작용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수입되었던 백분은 납부 작용이 적어 국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그 결과 국산화장품이 불신감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돼지기름: 돼지기름은 동상, 해 그을음, 눈 그을음의 예방 및 피부의 연화작용이 뛰어나 유럽에서도 크림의 원료로 오랜 기간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읍루인 역시 피부의 보습과 보호를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돼지기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에도 원시 화장의 흔적이 보이는데 인간이 되고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을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피해 동굴 속에서 생활하도록 한 것은 고대사회의 지배층이 흰 사람[백색피부]이었으므로 하기 위한 주술이라 해석됩니다. 지금도 흰 피부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쑥과 마늘:쑥과 마늘이 미백효과가 우수한 미용재료임을 감안한다면 고대의 한국인들이 겨울에 피부를 보호할 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굴 속에서 100일을 지내게 한 것은 햇볕에 그을리는 것을 피함으로써 기미, 주근깨, 점 등 멜라닌 색소를 미연에 방지하고 쑥과 마늘을 먹게 했다는 것은 쑥과 마늘의 미백효과로 더욱 희고 깨끗한 피부로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쑥을 달인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를 건강하게 하고 희게 하며 찧은 마늘을 꿀에 섞어 얼굴에 골고루 펴 바른 뒤 씻어내면 피부미백효과 외에 잡티·기미·주근깨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문물에 있어 당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당시 당이나 일본에서 유행하던 홍화장이나 화전, 면엽과 같은 당대의 다양한 기교적인 화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얼굴을 희게 하고 입술에 연지를 바르는 풍속은 통일신라 시대에 보편화되었다고 보입니다.
1. 연분바르기 2. 볼에 연지 바르기 3. 눈썹그리기 4. 화전 찍기/그리기 5. 면엽 찍기 6. 사홍 덧그리기 7. 입술에 연지 바르기
우리나라 화장의 시작은 자연환경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화려한 색채보다는 희고 깨끗한 피부를 선호하여 단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얻어진 순수한 재료로 조금 투박하고 단순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녹두:세정제로 사용
누에고치:분을 바르기 위해 사용
홍화:연지를 만들 때 사용
쌀:분의 재료로 사용
출처: 월간조선
통일신라에 이르러 문무왕대에 "부녀의 복식 제도를 당과 동일하게 하라"는 교지가 내린 뒤, 의상과 함께 중국 여인들의 짙은 색조화장이 도입되어 전대에 비하여 화장이 화려해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는 신라에서 이어져 확연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의 문화를 수용하고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삼국시대보다 화장술은 더욱 화려해지고 제조기술은 다양해졌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각종 화장도구와 화장품 용기가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화장용기는 주로 토기 ·목제로 파손되기 쉬워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는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되어, 화려하고 견고한 화장품 그릇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유병 ·향수병 및 연지 합 ·분합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특히 화장합인 청자상감모자합은 신라의 토기화장합(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 화장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경남 밀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경남 밀양 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송은 박 익(1332~1398)의 무덤 석실 내부에서 고려 후기의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반달형의 가는 눈썹은 이전 시기와 동일하지만 붉은색 저고리를 착용한 여인의 붉은 입술 색에서 당시 상류층 여인들이 고려 중기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화장법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인의 화장을 중국 측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다. 또한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고 했는데, 이들 기록만으로 보면 고려인의 화장이 담장(수수하고 엷게 한 화장)에 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이 기록자들이 송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짙은 화장을 했던 송나라 여인들보다 엷다고 표현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삼국시대는 상고시대의 화장 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한문화를 효과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화장 문화를 융화 발전시킨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국 중 중국과 지역적으로 가장 인접한 고구려는 신라나 백제에 비해 화장 문화의 유입이 빨랐습니다.
고려시대의 화장 문화는 중국, 특히 원나라에 크게 전파되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고려와 원은 왕실끼리의 혼인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고려의 문화가 대량으로 원에 전파되어 고려양(고려풍속)이 유행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 초에 제도화된 기생 중심으로 짙은 화장, 즉 분대화장이 성행했습니다. 분대화장은 반지르르한 머리, 눈썹과 연지화장 외에 백분을 많이 펴 바르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짙은 화장이었는데, 기생을 분대라고 부를 만큼 기생의 상징적인 치장이었습니다. 분대화장 역시 평면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생들의 직업적인 의식화장이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습니다. 여염집 여성들은 엷은 화장을 고수하여 고려시대부터 화장경향이 이원화되고, 기생들의 분대화장으로 인하여 화장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수서에는 백제 여인을 묘사한 내용이 있는데, 고구려 여인들과 달리 분은 바르되 연지는 하지 않는 화장법을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의 옛 문헌 화한삼재도회는 본인들이 백제로부터 화장품의 제조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 화장 문화의 수준은 고도의 화장 기술의 표현과 진보된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여인들이 연지를 이마에 발랐다는 기록이 있고,"연지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쓰이고 천황 18년(610) 9월로 고구려의 중 담징이 그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한 기록에서 고구려는 일본에 연지를 전파할 정도로 연지가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은 가늘고 눈동자는 표현이 되지 않았으나, 눈두덩이의 붉은 화장은 현대의 아이 섀도와 유사한 형태로, 중국의 화장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화장법입니다. 연지를 이용한 화장법이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직업을 구별 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무인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고 금당으로 머리를 꾸몄으니- 이렇듯 무녀와 악공이 이마에 동그랗게 연지를 그렸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남녀 모두 얼굴을 가꾼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색조화장을 했으며, 남성들도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꾸었습니다.
색조 화장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에서 남성인 화랑들도 여성들 못지않은 화장을 하고, 갖가지 장신구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또한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 외에 산단(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색분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신라 시대의 눈썹 화장품으로는 미묵이 있었는데, 이는 나뭇결이 단단한 굴참나무, 너도밤나무 따위의 나무재를 유연에 개어 만들었으며 눈썹 그리기에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하여 여성 눈썹화장의 관심은 한층 덜 한 것으로 보이며 눈썹 화장품에 대한 기록은 신라 시대로 거슬러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이전의 눈썹 화장품의 유무는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692년에 한 승려가 일본에서 연분을 만들어 주고 상을 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화장품 제조기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7세기경에 신라에서 이미 연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 화장품 발달사에 유례없는 대발명이었습니다.
신라를 비롯하여 고구려·백제에 4∼6세기경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신봉됨으로써 청정 ·청결이 강조되고 목욕이 대중화되었습니다. 목욕의 대중화는 목욕용품의 발달을 촉진시켰는데, 쌀겨 목욕으로 피부미용이 향상되었습니다.
서민층에서는 팥 ·녹두 ·콩 껍질 등으로 만든 원시비누, 즉 조두를 사용한 결과 날 비린내가 몸에 배어, 이를 가시게 하기 위하여 향수 ·향료를 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신당서》에 신라 여성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눈썹 그리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김 유신의 누이동생이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삼국유사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앞서의 설명과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의 여성들이 불교의 영향으로 엷은 화장을 했으며, 평면화장에 그쳤던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색조화장으로 쓰인 연지의 주원료는 주사 또는 홍화입니다. 홍화는 중국에서 전래된 생화초이며 7월경 개화한 꽃잎이 붉어지자마자 새벽에 따서 절구에 찧고 베로 짜서 그늘진 곳에서 천천히 말리고 가루를 만들어, 물 뿌리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체로 친 후 환약처럼 만들어 이것을 쓸 때에는 기름에 개어 솔로 그리거나 둥근 연지도장을 찍었습니다.
화장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명을 명확히 하기 위해 화장의 정의와 기능을 간단히 요약해보았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인공적인 꾸밈을 시도해 다른 사람의 호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대인 관계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시각적으로 자기 자신을 감추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먼저 ‘감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결점이나 약점을 숨기는 것이고,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을 더욱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이 나타내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이 두 가지 욕구를 외모의 ‘변형’으로 한정했을 때 화장보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없다. 물론 이외에도 문신을 새기거나, 가발이나 가면을 쓴다거나, 성형수술을 하는 등 다른 변신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원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좀 더 친숙한 변신 사례가 화장이다. 일상적인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예로서 화장에 대해 살펴보자. 화장은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결점을 감추고, 피부를 보호하는 한편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가꿔 가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화장을 하는 이유를 단순하게 아름다움의 추구로 한정짓는 시각은 중대한 착오다. 역사적으로 화장은 단순하게 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포괄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고대의 화장은 어떤 영적 존재와 접촉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사람들이 신이나 정령과 교류하기 위해 그들의 용모를 꾸미던 의례가 화장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술적 기능은 현대에 와서는 거의 소멸되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을 받길 원하는 욕구는 원시사회에도 존재했는데 문신이나 신체 도색 등은 오늘날 화장의 시초가 된 것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날의 ‘기능성 화장품’뿐만 아니라 과거의 화장도 피부를 보호하는 등 실용적인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 많다. 예부터 가장 중요한 화장품으로 여긴 백분은 단지 얼굴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외선을 산란시켜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고대 일본에서는 치흑이라고 해서 치아를 까맣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는데, 충치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자료 출처:네이버 블로그-에뷰리의 블로그,
네이버 지식in, 구글(사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