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의 정신분석은 구시대 유물인가?
- 페미니즘, 맑시즘, 정신분석학
부르주아 개인주의에 바탕한 정신분석학과 집단적 계급주체를 앞세운 맑시즘의 갈등.
맑시즘과 정신분석을 오가며 모두를 교란하는 페미니즘.
초기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그 역할을 함. 특히 줄리엣 미첼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입장에서 정신분석학을 도입하려 시도. 그러나 공산진영의 몰락 이후 줄리엣 미첼 아후에 맑시즘, 정신분석, 페미니즘을 연결하려는 이론적 시도는 거의 없다.
- 주체의 해체와 포스트페미니즘
- 페미니즘 이론에서 망각된 정신분석
자아심리학과 후기 프로이트주의에 의해 주도되는 정신분석에 의해 정신분석이 탈정치화 됨.
버틀러, 제시카 벤자민, 주판치치, 조운 콥젝 등.
- 페미니즘과 신유물론/과학의 만남
엘리자베스 그로츠, 카트린 말라부, 로지 브라이도티, 도나 해러웨이. (유행)
왜 지금 다시 정신분석 페미니즘인가?
분열적 주체에 대한 포스트 이론들이 도전받고 있는 현 페미니즘 지형.
포스트페미니즘의 주체의 불가능성 이론은, 현재 부상한 렏팸들에 의해 ‘세련된 이론’과 ‘정치의 무능함’으로 비판됨.
그러면서 동시에 포스트페미니즘에 의해 폐기처분된 여성주체성(실체적이고 경험적인)이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성기고 허술한 이론과 함께 다시 부상. 분리주의 페미니즘.
또한 신유물론과 실재론들의 급부상 속에서 페미니즘 정치성의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가라앉음.
결국 페미니즘의 정치성을 되살리고, 그리고 정체성과 정체성의 불가능성의 긴장을 다시 보고자 하려는 기획.
2 정신분석 페미니즘의 등장
페미니즘적 시각을 보이는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 낸시 초도로우, 도로시 디너스타인, 캐롤 길리건
정신분석적 페미니스트들: 줄리엣 미첼,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 제시카 벤자민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이론가들: 제시카 벤자민, 주디스 버틀러
3 왜 페미니스트들은 정신분석을 읽었는가?
-생물학주의에 대한 비판
-분석의 중심에 있는 성
-정신성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이론(구성주의적)
-무의식적인 것의 우위성
1) 프로이트의 스캔들:
모든 성적 ‘일탈 행위’, ‘도착’ 등이 정상적 인간 섹슈얼리티 발달의 단계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의학계에 큰 스캔들이 된다. 유아 섹슈얼리티를 인정하지 않은 당대의 학계의 분위기 때문이다.
유아 섹슈얼리티는, 가령 아이가 어머니(최초의 양육자)와 맺는 관계에서 이미 섹슈얼리티가 존재하게 된다 내용이 중심적이다. 아이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열려있는 신체의 구멍(입)이 물질적 만족으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됨으로써 신체의 구멍인 입은 유아에게 성감대가 된다. 이렇게 입이라는 구멍 주위를 자극하여 현상하는 것이 구강충동이다. 물질적(신체적) 욕구(배고픔) -> 음식 등을 통한 만족 -> 충동의 현상 -> 만족을 느끼는 성감대로 기능하면서 다양한 대상들을 허용
유아의 구강충동의 대상은 음식 외에도 다른 것들을 허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젖가슴, 공갈젖꼭지, 손가락 등 다양할 수 있다. 이것들이 부분대상이다.
부분충동의 장소: 구강, 항문, 눈, 귀
페미니스트들의 정신분석 비판
2) 유아 섹슈얼리티에서 ‘정상’ 섹슈얼리티로의 이행
다형적이고 도착적인 유아 섹슈얼리티는 필연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성기적 섹슈얼리티로 안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성분화’가 일어난다. 프로이트에 성적 만족과 만족의 대상과의 관계는 관계적인 것이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다. (본능과 충동) 그런 한에서 프로이트는 성과 섹슈얼리티의 생물학적 본질주의로부터 멀어진다. 즉 유아 섹슈얼리티가 ‘정상’ 섹슈얼리티로 이행하면서 겪게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덕분에 유아는 비로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의 ‘발견’을 여전히 해부학적(생물학적) 운명에 맡기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다시 회귀하는 듯 보였고, 이 지점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기에 이른다.
- 여아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복잡하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서 '정상적인 여성(수동성과 모성)'으로 발달하는가?
- 왜 여아는 근친상간금기도 없이 충만한 사랑 대상인 어머니를 증오 대상으로 바꾸는가?
- 왜 여아는 자신의 성기를 남아가 느끼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결핍'으로, 즉 '손상받은 것'으로 느끼는가?
(결핍으로 인식하려면 결핍 이전에 먼저 존재했어야 하는 것인데?)
- 왜 클리토리스적 능동성을 질과 관련한 수동성으로 전환해야 하는가?
-베티 프리단: 프로이트 이론의 빅토리아적 성격, 생물학적 결정론 비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프로이트보다는 후기-프로이트학파 치료사들 비판. 의기소침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현 상황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치료사들의 실천 비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근본 원인인 근친상간금기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 가족형태변화 주장.
-케이트 밀레트: 파이어스톤처럼 프로이트 자신보다도 후기-프로이트학파의 치료사들 비판. 남성의 성적 공격이 “성적 대상의 저항을 극복할...생물학적...필요성”에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한 후기 프로이트 학파 치료사들을 강력히 비판. 페니스 선망은 남성의 자기중심주의의 실례(치료사들은 여성의 출산능력을 찬양하는 대신 그것을 페니스 대체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병적 시도로 해석. “프로이트의 논리는 여성의 놀라운 업적인 출산을 남성기관에 대한 추적 정도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줄리엣 미첼
- 저서 『여성의 지위』에서 미첼은 맑스주의 페미니즘 입장을 포기한다(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로 선회).
“예전의 마르크스주의 방식의 실수는 다른 세 요소[출산, 섹슈얼리티, 자녀의 사회화]를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생산 활동으로의 진입 요구는 가정의 폐지라는 순전히 추상적인 구호와 함께 등장했다. 경제적 요구가 여전히 주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다른 세 요소에 대한 일관적인 정책, 즉 특별한 시기에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주된 역할을 떠맡을 수 있을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심리성적 발달은 생물학적 운명의 냉혹한 구현이 아니라 생물학의 ‘사회적 해석’과정이다.”
- 『정신분석과 페미니즘』(1975)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페미니즘적 재해석
“정신분석 안에는 분명 철저히 성차별주의적인 것이 있으나 여성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은 여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성애 경향을 가진 작은 아이가 어떻게 여자가 되는가를 이해하려 한다. 성적 차이의 구성이 정신분석학 과업의 중심에 있다.”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당한다고 보았고 가부장제를 들여다보는 이론을 사용하고자 했다 가부장제를 보려면 아버지들을 봐야했고 프로이트를 보는 것은 아버지들을 보는 것이다.”
미첼은 오이디푸스 상황의 보편성과 근친상간금기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이것들이 인간 사회의 가부장적 속성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 정신분석(자아심리학류)에 반대하는 미국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영국/유럽 페미니즘을 소개하려는 목적. (미국 페미니즘의 무지를 비판)
미국 페미니즘이 빌헬름 라이히와 랭의 영향하에 있다고 본다. 빌헬름 라이히는 사실상 프로이트의 섹슈얼리티 이론을 탈성화시킨 장본인. 성과 문명의 양립가능성, 화해, 조화 등을 강조한다. 로널드 랭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반정신의학을 주장. 그 당시 융의 경우도 리비도를 탈성화시키고 대신 실체화 시킴. 프로이트에 의해 강력히 비판되는.
- 미첼은 페미니스트들이 프로이트를 왜곡시킨 데에 대한 강력한 비판: “인간의 삶에 있어서 섹슈얼리티의 중요성을 발견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 뒤에 이 저자들(프로이트를 왜곡하고 피상적으로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 각자는 결국 섹슈얼리티를 ‘삶 에너지’처럼 일반화된 개념으로 전환함으로써 그것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삶 에너지’는 일반 원리로서, 애초에 프로이트가 그것으로부터 섹슈얼리티를 구제했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섹슈얼리티가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후기-프로이트주의와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탈성화(desexualization)’ 비판. 그러면서 후기 프로이트학파가 결국은 프로이트 이전으로 반복해 퇴행했다고 비판.
- 특히 카렌 호나이를 비판하는데, 미첼은 호나이의 표면적인 급진주의가 실제로는 꽤 반동적이라고 주장. “호나이는 남성 정신분석가(프로이트)는 어린 소년이 어린 소녀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것처럼 여성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며, 여성은 종종 자신들의 진정한 본성에 반해 남성의 환상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기로 굴복한다고 주장한다. 호나이의 의도는 괜찮았지만, ‘진정한 본성’에 대한 이러한 호출보다 더 여성 정신분석의 미래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없다.” 내적 자아를 가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
결국 비판의 요는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기술을 처방으로 오해하고, 심리적 삶보다 ‘현실’의 가치를 우위에 두”며, “무의식 그 이상을 부정하고, 합리성 외에 정신의 어떤 속성도 부정하는,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경험주의”라며 비판한다.
라캉은 1957년 강연에서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을 강의한다. 여기서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비판하며, 라캉만의 새로운 기표와 기의 관계를 정립한다. 이 논문이 중요한 이유는, 기표가 물질적임을 주장함과 동시에, 이 언어의 구조와 기표가 성차 구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모델(첫번째 그림)은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인 관계이며, 각각의 기표들의 차이로 인해 의미가 형성된다는 기표의 우위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런 기표의 고전적 모델은 라캉에 의해 반박된다.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이지만 일대일 대응이 되고 있는 형태로 관계하지 않는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라캉이 직접 든 화장실의 예(두번째 그림)에서, 하나의 동일한 문(기의)과 두 개의 서로 다른 기표가 가능함을 보인 것이다.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이라는 한 쌍의 기표는 그 상호관계에서 하나와 다른 하나가 완전히 서로 배제적(A는 B가 아니다)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이 이해되는 것은 ‘의미화 연쇄’(즉 기표들이 학습됐던 맥락, 즉 언어 습득, 배치와 구조의 습득)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성분화와 관련지어 라캉은 설명한다. “기차가 역에 도착한다. 남매인 어린 소년과 어린 소녀가 객실 창가에 마주 앉아 있다. 기차가 멈춰 서면서 창밖으로 역의 승강장을 따라 서 있는 건물들이 보인다. ‘저기 봐, 숙녀용 쪽이다!’ 소년이 말한다. ‘바보야, 신사용 쪽인거 안보여?’ 소녀가 대꾸한다.” 두 아이는 각자 오직 하나의 화장실만 볼 수 있다. 즉 아이들은 소쉬르의 고전적 모델로 사물을 본다. 즉 단어들이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범위를 한정할 수 있는 ‘사물들’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성의 해부학적 차이에 따른 심리적 결과’는 이 일화 속 상황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객실 한쪽 또는 반대쪽에 앉아있다는 생물학적 소여를 통해 각각의 성은 하나의 구조 안에 배치되고, 그래서 그 구조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물학적 차이들은 그 차이들이 주체를 기표의 놀이 속으로, 소쉬르적 모델, 즉 일대일 대응 모델을 수용하는 한 알 수 없는 놀이 속으로 밀어 넣는 한에서만 남성과 여성에게 중요할 뿐이다.
하나의 현실과 그것을 보는 두 개의 위치, 즉 두 개의 위치라는 구조가 바로 언어이지만 주체는 두 개의 위치를 동시에 점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분열증이거나, 전지적 관점을 가진 신이 될 것)
요구는 언제나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기표가 대응할 것이라는 상상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만족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욕망은 요구에 포함되지 않은 분절articulation 이전의 욕구의 일부이다.
요구에서 욕구를 뺀 차이가 욕망(채워지지 않는 결핍).
갤럽이 보기에 미첼은 페미니스트의 자리를 욕망하는 자로서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언어 바깥은 없으므로) 그럼으로써 미첼은 전체적인 자아라는 전통적 개념에 도전하지 못한다. 욕망을 언어에 기반해 이해하지 못한 불충분함 때문에, 욕망의 지배를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우연의 산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으로써 비판하고자 하는 ‘합리적 자아’를 오히려 끌어들이는 모순을 범한다.
사실 프로이트와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 성과 관련한 핵심은 탈기체화와 성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경험을 실체화/기체화하는 기존의 본질주의적이고 생물학적인 페미니즘을 비판함과 동시에, 성을 문명의 추동력으로 보며 성에 내재한 모순을 지워버림으로써 두 성의 조화와 화해를 이론화한 자아심리학과 융심리학을 비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