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
_한병철 「타자의 추방」
신자유주의
사물은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오직 가격으로만 표현할 때 투명해진다. 돈은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물의 통약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완전히 철폐한다.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_한병철 「투명사회」
인스타그램
남의 눈길은 중요하지 않다. 나만의 시선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흔히 한국 소비자는 타인지향성이 강하다고 알려져왔지만, 이제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나랜드에 살고 있는 '나나랜더'들은 남의 시선, 사회의 통념에도 굴하지 않는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성세대가 의미 있다고 했던 삶에 반기를 들며 자기만의 무민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한다. 못생긴 것이 더 엣지 있다고 여기는 '어글리' 열풍은 이러한 변화의 한 증거다.
_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9」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그것은 바로 세계와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이며, 명료함에 대한 갈망이다. 인간의 처지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고양이의 세계는 개미핥기의 세계가 아니다.
_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_한병철 「피로사회」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부단히 동일화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아토포스의 부정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바로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경험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소크라테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명칭)로 인지한다. 이 말은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는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다는 뜻이다.
_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베이글녀’, ‘과즙녀’, ‘애완남’, ‘뇌섹남’ 등 ‘~녀’, ‘~남’은 개인을 특정한 형태로 축약해 버린다. 이상형을 물었을 때 한눈에 그려지지 않는 모호한 대답이 돌아오면 언제나 “연예인으로 치면 누구?”라는 추가 질문이 덧붙는다. 이상형 시장에서 개인의 고유성은 사라진다.
_박소정 「연애정경」
나는 그를 모든 종류의 평가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 분류될 수 없는 그 사람은 언어를 흔들리게 한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없다. 모든 수식어는 거짓이며, 고통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 사람은 무어라 특징지을 수 없다(아마도 이것이 아토포스의 진짜 의미인지도 모른다).
_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세계가 온통 여기가 되어버림으로써 저기는 제거되고 만다. 여기의 가까움은 먼 곳의 아우라를 소멸시킨다.
_한병철 「시간의 향기」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연애를 할 때
정말 좋은 상대는
같이 있을 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에요.
함께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하는 행동을 보면
그가 나를 얼마나 배려하는지
이 관계에 얼마나 성의를 보이는지
알 수 있지요.
_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오늘날 나르시시즘점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시켜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우울증
수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두 범주로 쉽게 나뉠 수 있다. 한쪽은 모든 여자에게서 자기 고유의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찾는다. 다른 쪽은 객관적인 여성 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첫 번째 부류의 집착은 낭만적 집착이고, 그들이 여자에게서 찾는 것은 그들 자신, 그들의 이상이며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실망한다. 왜냐하면 이상이란 우리가 알다시피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_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생산적인 관계의 깊이는 드러난 모든 마지막 진실 뒤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궁극의 최종적 진실이 있음을 예감하고 이를 존중하는 데서 나오며 ... 인격 전체로 연결된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_게오르그 짐멜 「사회학」
이러한 파국적 사건, 외부의 침입, 완전히 다른 자의 침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 재앙의 변증법은 영화 「멜랑콜리아」의 구성 원리로도 작동한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맬랑콜리아는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흉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와 각성의 효과를 낳는 부정성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아는 그것이 멜랑콜리의 특수한 형태인 우울증을 치유하는 행성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이름이다. 그것은 저스틴을 나르시시즘의 늪에서 건져내는 아토포스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 앞에서 말 그대로 활짝 피어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포스적 타자는 묵시록적인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에는 묵시록만이 우리를 동일자의 지옥에서 건져내어 타자를 향해 해방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당신은 무엇이든 바꿀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선택하고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기에.
_론다 번 「시크릿」
생산성
왓칭은 신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려준 선물이다. 나는 기자이기 이전에 평범한 직장인이다. 나와 학생들이 변화를 체험했다면 누구든 왓칭을 통해 신기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우주의 원리는 누구에게나 쉽고 공평하게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_김상운 「왓칭」
시크릿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수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나는 오늘날 성과주체의 심리 상태에 대해 상론하기에 앞서 먼저 규율적 주체의 심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자아는 규율적 주체다.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이다. ...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역시 오직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토대로
조직되어 있는 억압적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
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수있다"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의
내적 영혼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온다.
_한병철 「우울사회」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면서 마침내 나는 왓칭(관찰)만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이 해결된다는 우주 원리에 완전히 눈을 떴다. 그건 고통을 만들어준 신이 고통 해결의 열쇠로 인간의 손에 쥐여준 선물이었다.
_김상운 「왓칭」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왓칭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긍정의배신
긍정적 사고는 고용주의 손에 의해 19세기의 주창자들이 짐작도 하지 못했을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낸 출판사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기업 시장으로 눈을 돌려 "기업 임원 여러분, 이 책을 직원들에게 주십시오. 커다란 이익을 낼 것입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광고는 영업사원이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이 파는 상품과 자기가 속한 조직에 새로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며, 내근 직원들의 효율성도 높아져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동기 유발이 채찍으로 사용되면서 긍정적 사고는 순응적인 직원의 품질 보증서가 되었고, 1980년대 이후 다운사이징 국면에서 고용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채찍을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_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시크릿」은 언론으로부터 비교적 따뜻한 응대를 받았지만, 식자층의 경악과 조롱을 받았다.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문젯거리가 풍부했다. DVD에는 쇼윈도에 진열된 목걸이를 보고 감탄하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다. 그저 목걸이를 '끌어당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게 전부였다. 책 내용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동안 체중을 줄이려고 애썼던 저자는 음식 때문에 살이 찌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음식이 살로 갈 것이라는 '생각' 탓에 실제로 체중이 는다는 것이다.
_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그는 아직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아직 코끼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_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타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질성을 절대적으로 원초적인 에로스의 관계 속에서, 즉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 속
에서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_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수있을수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과거와 미래의 동일성이 아니라 양자의
차이가 시간의 의미를 이룬다. 시간은
변화이고 과정이며 전개인 것이다. 현재
속에는 어떤 실체도 담겨 있지 않다. 현재는 오직 이행의 지점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되어간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_한병철 「시간의 향기」
애무의 갈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난다.
쾌락의 강렬함 역시 감각의 공유 속에서도 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이용가능한 현재는 동일자의 시간이다. 반면 미래는 절대적으로 경이적인 사건을 향해 열린다. 우리가 미래와 맺는 관계는 아토포스적 타자, 즉 동일자의 언어 속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다. 하지만 오늘날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모든 재앙을 차단한 긍정성,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에로틱한 갈망은 타자의 특수한 부재에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무로서의 부재가 아니라 "미래 지평 속에서의 부재"다. 미래는 타자의 시간이다. 동일자의 시간인 현재의 전면적 지배는 부재의 소멸을 초래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정보는 시간적으로 공허하며, 결여적 의미에서 무시간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적 중립성 때문에 정보는 저장해두었다가 임의로 호출할 수 있는것이다. 사물에서 기억을 제거하면 정보가 되고 더 나아가 상품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없는 비역사적 공간으로 옮겨진다. ... 시간이 붕괴하여 그저 점점이 분산된 현재의 연쇄로 전락한다면, 시간이 지닌 모든 변증법적 긴장도 소멸할 것이다. 변증법은 그 자체가 이미 강렬한 시간적 사건이다. 변증법적 운동은 시간 지평들의 복합적 착종, 즉 이미 일어난 것들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 변증법적 추동력은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적 긴장에서 생겨난다.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현재는 긴장이 넘친다. 반면 오늘의 현재에는 아무런 긴장도 없다.
_한병철 「시간의 향기」
추락
고대의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안락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 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리비도의 경제는 투명성을 알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_한병철 「투명사회」
상처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_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급습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락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연애정경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이 시집도 잘 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G는 어떤 소개팅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나간다. G는 배우자를 자신이 직접 고를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라고 보기 때문에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좋은 연인을 만나 시집을 잘 가려면 연애를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다. G의 연애관에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연애가 이토록 장려되던 때가 있었던가. 연애를 하지 않는 자는 패배자로 규정되는 시대다. 마치 마일리지를 쌓듯 연애를 많이 해서 누적되는 경험에 가치를 부여한다. 연애를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종의 연애 정상화 현상이다.
_박소정 「연애정경」
즉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환상이다. 어떠한 환경 밑에서든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습관인 것처럼, 그들은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_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연인이 없다는 것은 결핍되고 비정상적인 상태이며,
연애 경험은 스펙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거나
잘 할수록 좋다. 개인에게 연애는 '잘' 해야 하고
'많이' 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다.
_박소정 「연애정경」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 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_한병철 「투명사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_한병철 「피로사회」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뒤에 가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두려움
탈연대화와 전면적인 경쟁이 초래하는 개별화는 두려움을 낳는다.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_한병철 「타자의 추방」
건강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협 대신 노예 상태를 선택한다. 그는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신체적 우위에 있는 쪽이 꼭 투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죽음의 능력"이다. ...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
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대학을 나와야 하고, 예뻐지기까지 해야 한다. 차를 사야 하고, 집을 사야 한다. 이런 내가 대학을 가는 순간 세상의 평균은 또 한 치 높아진다.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
의 자리에 등극한다. 만일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넘어서
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_한병철 「피로사회」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지금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의사가 물었다. 눈먼 사람이오,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그냥 눈먼 사람, 여기에는 그런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물었다, 눈을 멀게 하는 데는 눈먼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하오.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_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아마도 사랑은 잠정적으로만 부정성의 절대적 시련, 즉 타자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이타적 태도일 것이다.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성과 타자성에 관한 모든 가정 속에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극좌주의가 들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충실한 사랑이란 실제로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 것이다.
_알랭바디우 「에로스의 종말」 서문 「사랑의 재발명」
반면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이러한 연습 이외에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곧 음악 감상, 독서, 사람들과의 대화, 경치 구경 등에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_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_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
에로티즘의 핵심은 언제나 구성된 형태들의 해체다. 다시 말하면, 뚜렷하게 구분된 개별자들의 불연속적 질서를 구성하는 사회적, 규칙적 형태들의 해체.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바로 그날 테레자는 길거리에서 넘어졌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휘청거렸다. 거의 매일 넘어지고 부딪히고 그렇지 않으면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참기 어려운 추락 욕구를 느꼈다. 그녀는 지속적인 현기증 속에서 살았다.
넘어지는 사람은 "날 좀 일으켜 줘!"라고 말한다. 토마시는 변함없이 그녀를 일어켜 줬다.
_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는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_G. W. F. 헤겔 「대논리학」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사웅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있다.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_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충실한 마음은 그 자체로 시간 속에 영원을 들여오는 결론의 형식이다. 충실함이란 시간 속에 감싸여 있는 영원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하지만 영원이 바로 인생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은 증명해 준다. 사랑의 본질은 충실함, 특히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충실함이다. 그것은 근복적으로 행복인 것이다! 그렇다. 사랑의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_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충실함
섹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도덕보다 더 강력하다. ...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_한병철 「투명사회」
비밀
아감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전시는 모든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 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제의는 유혹의 질서에 속한다. 사랑은 제의적 형식의 파괴, 제의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이러한 형식의 해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_장 보드리야르 「치명적인 전략」
제의적 성격을 상실한 사랑은 결국 포르노에서 완성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사람들은 프로필에 잘 나온 사진과 개인 정보를 공개해 사적 자아를 공적 영역에 전시한다. 연애는 SNS를 만나 사적 자아를 공적 수행으로 변환한다.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특정한 사진 구도와 데이트 양식을 보노라면 연애는 더 이상 사적 관계로만 존재하지 않고, 규격화된 문법에 맞춰진 전시 행위로 여겨진다.
_박소정 「연애정경」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_한병철 「투명사회」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_한병철 「투명사회」
연애의 스펙화 역시 연애가 공적 영역으로 나오게 된 데 큰 몫을 했다. 연애에 많은 계산이 동원될 만큼 연애가 어려워진 시대에 내가 어떤 연인을 만나는가는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자기 계발하는 주체로서 연애 또한 잘 가꾸어 나가야 하는 영역이다. ... 연애는 점차 친밀성의 영역에서 외밀성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_박소정 「연애정경」
에바일루즈
정보들은 중심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우리에게 물밀 듯이 닥쳐온다.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
_한병철 「향기 없는 시간」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욕망의 종말을 재촉한다.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결여의 부정성이 욕망을 자라게 한다. 욕망의 대상인 타자는 선택의 긍정성 속에 붙잡히지 않는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환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과도한 가시성은 상상력에 유익한 것이 못 된다. 그리하여 시각적 정보를 최대화하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환상을 파괴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하지만 환상은 불확정적 공간 속에 거주한다. 정보와 환상은 서로에 대해 대립적인 힘이다. ... 결여의 부정성을 통해 비로소 아토포스적인 이질성을 지닌 타자가 생성된다. ... 정보는 그 자체가 타자의 부정성을 해체하는 긍정성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카프카
오늘날에는 과도하게 가시적인 이미지들의 어마어마한 더미가 눈 감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미지들의 빠른 교체도 눈 감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을 감는 것은 일종의 부정성으로서 오늘날처럼 긍정성과 과도한 가시성이 지배하는 가속화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 ... 사색적인 머무름은 결론의 형식이다. 눈을 감는 것은 바로 결론의 표지다. 지각은 오직 사색적인 안식 속에서만 종결을 이룰 수 있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인간이 사물들의 사진을 찍는 것은 사물들의 의미를 없애기 위한 것이죠. 내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감기예요.
_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가슴 아픈 일이군요. 그러나 집을 나가 독립하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인간은 반대쪽으로 결연히 도약해야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거든요. 인간은 자신이 떠난 고향을 찾기 위해서 타향으로 가야만 해요.
_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다의성과 양가성, 비밀과 수수께끼의 유희는 에로틱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_한병철 「투명사회」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_한병철 「투명사회」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
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서 휘발되어버린다.
_장 보드리야르 「치명적인 전략」
주의를 집중해 봐요, 이제 전등 스위치를 내릴 테니까,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자. 아무런 차이도 없어. 아무런 차이가 없다니, 무슨 뜻이에요. 아무런 차이가 없다니까, 똑같이 하얗게만 보여, 마치 밤이 없는 것 같아.
_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지금 이대로 살아가자는 거요, 지금은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소, 나는 내 아파트가 어떻게 되는지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볼 생각이오.
_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_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하지만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정치는 단순한 사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따라서 투명사회는 포스트정치와 일치한다.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이다. 지향점이 없는 정치는 국민투표로 전락한다.
_한병철 「투명사회」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담배는 전 유럽에서 기적의 영약으로 이름을 날렸다. ... 의학 서적들은 고창에서 광견병에 이르는 모든 병에 대한 담배의 치유력을 신봉했고, 담배를 방부제이자 두통의 영약으로 권했다. 딱한지고. 당대의 천식 환자들이여! 의사들은 담배 연기를 치료제로 추천했다. 진주처럼 희고 반짝이는 치아를 자랑하고 싶거든 담뱃재로 이를 문질러라. 기억력이 나쁘다? 16세기 의사들은 담배를 권했다. 그 연기가 '기억의 거처인 뇌로 올라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_타라 파커-포프 「담배, 돈을 피워라」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_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사건은 상황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일으킨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킨다.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단절의 부정성에 있다. 사건적인 성격을 통해 사랑은 정치 또는 예술과 결합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변신의 부정성, 완전히 다른 것의 부정성을 성애는 알지 못한다. 성적 주체는 늘 동일하다. 그에게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우연한 사건에 의해 촉발된 정체성의 변동이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무수한 감정의 원천인 내적 변신과 만남(가끔은 첫눈에 강렬하게 반하기도 하는 만남)으로 인해 야기된 솟구치는 환희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환희는 우리를 예전의 삶에서 끄집어내어 별안간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간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새로운 사람이 될지 모르고, 그래서 만남은 진정 놀라운 모험이 된다.
_장클로드 키우프만 「각방예찬」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 살고 있다.
_한병철 「타자의 추방」
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갯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_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_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을 버려라.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사상 유례없이 정확하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_크리스 앤더슨 「와이어드」 2008년 7월 16일자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그러한 과학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고, 해석학적이기보다 폭로적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가설적인 이론적 모델은 데이터의 직접 비교에 자리를 내준다. 인과 관계는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이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하는 근본적 결단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ㅡ혹은 존재해야 하고ㅡ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사물들의 흐름을 일정한 형태로 빚어내고, 이들이 범람하지 않도록 경계를 만들어준다. 오늘날 정보의 더미는 형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아토피아의 부정성에서 나온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리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_한병철 「투명사회」
1. 이 발제는 어디까지나 제가 이해한 바대로 재구성한것이다. 내 언어로, 더 쉬운 언어로 재구성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이 이해한 바와 다를 수 있다. 언제든지 이야기해달라.
2. 본 발제는 단순 강의식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했다. 최대한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진행할 예정이고. 중간중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달라.
3.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선행연구를 먼저 분석하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러다보니 정말 많은 저작들이 인용된다. 일부는 비판을 위해서 인용되고, 일부는 논지 강화를 위해서 인용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비판하기 위한 인용은 대부분 생략했다. 생략한 부분에서 궁금한 점이 있어도 이야기해 달라.
4. 개인적으로 강준만과 한병철을 좋아하는데, 인용이 많은 작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많이 인용했다. 「에로스의 종말」 자체의 내용도 있고, 한병철의 다른 작품에서도 인용했다. 그냥 떠오른 책에서도 가져왔다. 재능있는 작가들의 검증된 문장들을 함께 즐기기 위함이다. 다같이 음미했으면 좋겠다.
첫번째 질문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 대신 연애, 에로스라는 단어를 넣어도 무방.)
두번째 질문
이 책 「에로스의 종말」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 책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좋았는지)
인생이란, 흐느낌과 훌쩍거림, 그리고 미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 훌쩍거릴 때가 가장 많다.
_오 헨리 「크리스마스 선물」
세번째 질문
이 책 「에로스의 종말」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 책인가.
네번째 질문
"사랑"이란 무엇인가.
다섯번째 질문
점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