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섹슈얼리티의 영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겉보기에는 완전 무성적인 말의 교환외엔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런 메시지는 겸손하게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의미없는 말의 교환이 그 교환 자체를 sexualize 한다고 볼 수 있음.
만일 정중하게 상대방에게, "죄송한데 저랑 오늘 집에 가서.."라고 말하면 훨씬 덜 섹슈얼하게 느껴지고, 그런 말의 교환은 asexual하다. (어떤 경우 그런 정중함은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섹슈얼리티는 결코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이다. 이런 간접성으로만이, 이런 허구를 통해서만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5:12
푸코와 들뢰즈는 욕망과 쾌락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성과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즉 그것은 '결여'나 '억압'과 강하게 붙어 있어서 그들의 철학적 사유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룬다.
들뢰즈에게 문제는 성이 아니라 '욕망과 물질적 신체'이고, 푸코에게 문제는 억압적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쾌락과 그것의 (권력을 경유한) 활용'이 된다. 그런데 정말로 성이 기껏해야 담론의 효과라거나 결여된 신체적 만족을 둘러싼 어떤 것일까?
성이라는 것이 탐구되지 않고 페미니즘 미학이 가능할까?
성에 대해 불모였던 철학이 또 다시 성을 폐기한다면 그것은 오래된 철학적 전통과 동일한 제스처 아닌가?
성대신에 젠더가 자리를 차지하고, 성차 대신에 담론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실재, 신체, 물질, 감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동시대 페미니즘도 성을 폐기함으로써 이와 같은 이중 부정의 상태에서 우울한 회의주의로 피상적인 유희에 만족하거나, 소박한 실재론으로 돌아가는 철학적 태만도 보인다.
“성이라는 역설적 지위는 말하자면 유니콘의 지위와 반대다. 즉 성은 [유니콘처럼] 그것이 경험적으로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없는 어떤 존재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험적으로 성이 존재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가 그것을 꽤 잘 식별하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 성의 이데아, 성의 본질이다. 우리가 ‘이것이 성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알아본 것일까? 플라톤은 심지어 가장 저급한 것들, 진흙이나 먼지와 같은 것들도 자신들에 상응하는 관념들(이상적 본질들)을 갖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성은 어떠한가? 성의 이데아가, 성의 순수한 형상이 존재하는가? 답은 부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성이 존재의 사슬에서 진흙이나 먼지보다 심지어 ‘더 낮은’ 데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성을 낮은 차원의, 그리고 ‘더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더 근본적인 스캔들 – 즉, 우리는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 – 에 대한 반응이고 ‘해소’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2021), pp. 46~47.
주판치치가 프로이트를 통해 발견한 것은, 푸코가 프로이트를 겨냥하여 비판했던 소위 성에 대한 ‘억압 가설’이 아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수다한 ‘성적인’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그것에 당황스러워하고 감추려고 (혹은 도착적으로 노출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주판치치에 따르면 우리가 성적인 것을 마주할 때 당황하여 감추려 하거나, 반대로 위반적으로 노출하는 이유는 성이 “단순히 거기에 있는 어떤 것, 즉 섹슈얼리티가 보여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기에 없는 어떤 것 – 만일 그 어떤 것이 존재했다면 성이 실제로 무엇인지 결정하고 무엇이 성에 대해 ‘성적’인지를 알려줄 어떤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었는데 없었다.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함’의 형식으로만 우리 의식에 등록되는 지식의 한 형식이다. 그런 이유로 말실수, 농담, 기발한 꿈, 고차원적인 정신적 형성물(예술) 등은 모두 무의식의 작동을 보여주는 탁월한 예들인 것이다(음담패설은 왜 그리도 재미있고, 꿈에는 왜 그리도 성적 내용이 난무하는가). 무의식은 의식의 규칙과 관계없이 잡다한 표상들을 연결시키는 기계이며 정신이 왜곡이나 장애물의 형태로 자신을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통념상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성과 무의식을 저급한 욕망으로 들끓는, 혹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순수한 본능으로 이야기하면서 이 둘의 모종의 관계 혹은 그것들의 동질성을 설명하곤 했지만, 사실상 그 둘은 전연 동일한 것이 아니며 바로 지식의 (‘알지 못함’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관계되는 두 항인 것이다. 이 ‘알지 못함’은 단순한 모름과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청영역을 벗어난 초음파를 듣지 못하는 것은 전혀 우리에게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은 과학기술이 아니었다면 ‘우리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청이 지각되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로 다가온다. 지식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즉, 모르는 것을) 알아채는 일은 (신체가 아는 지식을 포함한) 선험적인 지식의 구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로 전달되는 문자적 지식 그 이상의, 지각되고 감각되는 우리의 신체와 심리 경험의 구조 자체로 여겨져야 한다. 인간 주체에게 문제가 되는 그러한 것들은 주체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인 방식이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의 형식 그 자체는 지식의 구조적 결여가 드러날 때만이 (즉, 무엇인가가 대단히 잘못되어야) 우리에게 인식되고 지각된다는 측면에서 인식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되는 그것은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존재론적이다. “무의식과 섹슈얼리티의 관계는 어떤 내용물과 그것을 담는 용기의 관계가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그 자신의 존재론적 불확실성 속에 있는, 무의식의 바로 그 거기-없음과 관계하는 것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2021), p. 30.
따라서 성이 그토록 제도적인 규범의 대상이 되거나 의식이 무의식으로 쫓아내야할 억압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저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식의 한계, 지식의 구조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초월적 가상(환영)?
초월적 변증학에서 이론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초월적 가상을 일으키는 사태를 일컬음.
이론이성은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지성의 판단을 통일하는 과제를 갖고 있으나, 이런 이론이성이 지성의 판단을 통일하는 일을 넘어서 지성 개념을 현상너머로 확장시킬 때, 거짓된 형이상학적 결론이, 즉 초월적 가상(환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합법적 규제적 이성 원칙이 현실에 대한 대상적(객관적) 주장과 혼융되었을 때 일어난다.
가장 핵심적인 환영들이 영혼(오류추리-이성적 심리학), 세계(이율배반-이성적 우주론), 신(이상-이성적 신학)이라는 이념.
이중 이성적 우주론, 즉 세계에 대해 그것의 총체성을 사고 할 때 우리 이성은 불가피하게 이율배반에 빠지게 됨.
이율배반이 중요한 이유?
신과 영혼과는 달리 세계는 분명히 부분적으로나마 우리의 경험의 객관적 대상이므로 불가피하게 이성이 빠지는 이율배반이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전체, 현상들의 총체, 현상들의 궁극적인 조건(무조건적인 것)을 사유하려고 시도할 때 이율배반이라는 초월적 환영이 생긴다.
조운 콥젝은 <성과 이성의 안락사>에서 이성이 이율배반에 빠지는 경우에 하나를 추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sex)이다. 성에 대해 우리가 사유할 것이 강제되면 이런 논리적 요구는 성이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기체없음'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성적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즉 우리는 '경험되지 않음으로써 경험되는 사태'를 마주하게 된다. 라캉은 이것을 근원기표, S1, 팔루스 기표로 부른다. 근원기표로서의 팔루스는 "실재를 언어적 총체성이라는 가상으로 봉합하면서도 그 자신은 언어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 팔루스/근원기표/S1을 우리는 여하간에 다루려고 하는데(그래서 욕망이 가능하게 되는데), 성이란 이 근원기표가 봉합하지 못하는 실재의 출현을 다루려는 주체의 (논리적)
시도이고, 오로지 두 가지 방식만 있다. 남성의 방식과 여성의 방식.
여성공식과 남성공식모두 이율배반적이고 양립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 팔루스 함수에 종속된다는 점, 즉 거세된 존재라는 점이 핵심이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수학적(첫째, 둘째) 이율배반과 역학적(셋째, 넷째) 이율배반으로 나뉜다. 수학적 이율배반은 동질적 세계(우주)에 대한 정립과 반정립으로 이루어지며, 역학적 이율배반은 이질적 세계(현상과 예지)에 대한 정립과 반정립으로 이루어진다.
콥젝은 바로 여성공식과 남성공식이 각각 수학적 이율배반과 역학적 이율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
1) 수학적 이율배반과 여성 공식
수학적 이율배반(첫째)
정립: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계로 둘러싸여 있다.
반정립: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하다.
정립은 반정립의 이성의 실패(종합하지 못함)때문에 거짓이라 주장하고 반정립은 지성의 실패(경험하지 못함)때문에 거짓이라 주장함.
칸트의 해결: 둘 모두 공통전제는 세계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세계가 그 자체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표상(배진적 계열)에 독립해서는 실존하지 않으므로 전체로서도 실존하지 않는다. 즉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아닌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1) 수학적 이율배반과 여성 공식
수학적 이율배반(첫째)
"어떤 현상도 그것들을 우리의 경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성의 규칙들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정립기각)
여성공식(위)
"어떤 x도 언어의 규칙의 종속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언어의 규칙에 종속되지 않는 단 하나의 x도 존재하지 않는다.)
1) 수학적 이율배반과 여성 공식
수학적 이율배반(첫째)
"세계의 현상들의 계열에서 배진이 무한(infinite)하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indefinite)하게 진행한다." 현상이 한계가 없다는 진술은 현상들이 경험불가능한 방식으로 무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상 안에서 이성의 규칙에 따라 경험의 가능성 내에서 무한정한 것으로서 유한하게 존재함을 의미한다. "세계의 지위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비규정적이다. 모든 현상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반정립 기각)
여성공식(아래)
"모든 x가 팔루스 함수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1) 수학적 이율배반과 여성 공식
정리:
여성의 경험적 특질들,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비-존재다) - 무한판단
여성공식에서 이율배반의 원인은 '한계의 결여'이다. 그 한계의 결여는 언어 내에 위치한다. 즉 언어는 이 '한계의 결여' 떄문에 '비-전체'이다.
2) 역학적 이율배반과 남성 공식
수학적 이율배반에서 일어나는 상충은 시공간 내의 계열적 시초의 여부와 관계하는 반면, 역학적 이율배반에서 일어나는 상충은 세계 내의 무조건적 인과성으로의 소급(이성의 규칙)을 통해 가능해지는 존재론적 가능근거에 관한 것.
정립: 자유는 가능하다.
반정립: 자유는 없다.
칸트의 해결, 세계를 자유인과성이 근거하는 세계와 자연인과성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나누면서 해결한다.
2) 역학적 이율배반과 남성 공식
수학적 이율배반은 '한계의 결여'가 한계로 작용하여 둘 모두 거짓이었던 반면, 역학적 이율배반은 '한계가 부과된다.' 어떻게? "기계적 인과성의 영역에서 자유를 제거하거나 분리하는 것은 역학적 편에서 [수학적 편에 있었던] 근본적인 비일관성, 절대적 궁지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제 자연인과성을 따르는 현상계의 원인성의 총체, 즉 '전부'는 가능해진다. 자유를 배제했으므로. 자유는 정의상 (현상계에서 배제된 이상) 경험될 수 없다(초월적 자유). 자유 인과성에 의해 하나의 계열을 시작한다고 해도 그 계열은 현상계의 자연인과성을 따를 것이다(경험적)
2) 역학적 이율배반과 남성 공식
현상계의 자연인과성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 즉 자유를 배제함으로써 세계는 모두 자연인과성에 종속될 수 있다.
남성공식: 팔루스 함수에 종속되지 않는 최소한 하나의 x가 존재한다.
모든 x는 팔루스 함수에 종속된다.
남성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세계는 비로소 닫힌 체계로서 가능해진다. "팔루스에 종속하지 않는 저 하나는 "구성적인 것으로 ,즉 부정적 참조점으로, 또는 나머지가 그렇게 구성되도록 만드는 한계로 기능한다."
여성에게 이성/언어의 한계는 '한계의 결여'로서 언어 내부에 설치되지만, 남성에게 이성/언어의 한계는 초월적 존재(자유, 혹은 원초적 아버지)를 외부에 세움으로써 언어 외부에 설치된다. 남성은 결여가 결여되었다.
정리:
여성은 자신을 둘로 쪼개고, 남성은 세계를 둘로 쪼갠다. 여성은 한계를 내부에 설치하고 남성은 한계를 외부에 설치한다. 정신분석에서 성차는 이 한계를 다루는 주체의 두 가지 방식을 이를 따름이다. "팔루스 함수는 남성적이지 않다. 우리가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 지각하는 것은 그것의 서로 다른 구현 방식이다."
이성애주의도 아닌데, 왜냐하면 라캉의 성구분은 실재에 대한 주체의 두 가지 관계 양식이지, 두 성 사이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49)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가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백인 여성들에게 질문했을 때 그녀는 바로 이 인식 체계의 모순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녀 자신의 ‘비-존재’의 존재는 규칙을 심문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심문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녀는 스스로 개별적 존재로서의 ‘흑인’이자 ‘여성’임을 실정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수많은 젠더들이 끊임없이 자기-증명을 시도하고 있다면, 어떤 면에서 그것은 정확히 소저너 트루스가 행한 규칙의 심문이 아니라 규칙 내의 안정적인 기입이자 안착을 시도하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그 기입이나 안착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들로 하여금 안착을 시도하도록 하는 원인이 정확히 무엇일지 생각하는 일이다.
이제 짧게 젠더 이론과 성차 이론을 비교해볼게요. 여기서 개념적 차이를 보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가령 LGBTQ+같은 것 말이죠.
여기서 보이는 젠더들은 무엇일까요? 이런 종류의 젠더와 성이 어떻게 다르다는 걸까요? 우선 제가 보고있는 이런 수많은 젠더들의 문자열에서 보게 되는 문제는, 이런 방식의 알파벳 나열이, 부지불식간에, 남성과 여성을 역설적이고 사후적인 방식으로 자연화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저 젠더들 사이에서 또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젠더들 사이에서 다시 나타나서 마치 매우 자기증명적이고 해부학적인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이건 당연하게도 정신분석이 말하는 정체성 구성 방식과 가장 거리가 먼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꼭 맞는 사례는 아니지만, LGBTQ+ 관련 낱말들에 관한 포괄적인 리스트를 적어놓은 웹페이지를 보면요, 거기 이렇게 나옵니다. “이 홈페이지 작성자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정체성의 용어들은 까다롭기 때문에 모두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설명을 우리는 계속 작성하려고 하는 거랍니다.”
여기서 보이는 문제는, 이 문구는, 마치 언어가 단순히 우리가 현실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그 자체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요, 성이라는 교착이 이미 언어에 들어가 있고 그 때문에 언어가 횡단되는[위반되고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게 프로이트-라캉의 통찰인데요. 성은 말해져야할 어떤 영역도 아니고 [지시가능한] 기체도 아닙니다. 그건 말하기의 내재적 모순, 혀를 꼬이게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많은 정체성들로 성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즉 이 불가능성은 계속 되돌아올 겁니다. 그것이 저 LGBTQ+의 +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짧게 말해, 정신분석에서 성차는 항상 이 +에 있습니다. 저 교착은 어떤 포지티브하고 상징적인 것을 피해가기거나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가 걸려넘어지는 장소, 즉 정체성의 결여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LGBTQ+의 가장 짧은 버전은 M+가 될 것입니다.
정체성은 저 순수 차이(이미 안에 들어있는 차이, 불가능성)이 외재화되는 방식들이라는 겁니다. 외재화 되더라도 저 차이는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오직 반복되는 하나의 성적 차이가 있을 뿐이고, 젠더가 정체성으로 구성될 때 노출되는 것이 바로 이 차이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아니라, 그런 남녀 차이화의 불가능성입니다.
프로이트의 근본적인 통찰은, 섹슈얼리티가 본질적으로 정체성을 와해시키고 방해하는 것이지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성정체성는 그 자체 모순인겁니다. 성적 차이는 다양한 젠더들로 해체되거나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도 이미 항상 이 섹슈얼리티 때문에 방해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캉이 말하듯, 성차는 성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둘로 분열되기가 불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공간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성정체성들은 이미 방해된 결과물이고 (이분법적 성이든 젠더들이든), 우리가 방해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중심에서부터 방해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 프로이트는 섹슈얼리티, 이 성이 우리 삶의 비참함의 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항상 작동하고 있는 것 말이죠. 그러나 그는 그것의 해결이 다른 방향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성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른 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황폐화될 것이고, 이렇게 복잡하고 꼬인 것들을 파고드는 길(성의 기체 없음과 그것의 무의미함, 무의식)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그 구조가 비슷해서 가지고 와 봤는데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농담입니다. 버스 안에서 싸움이 일어났어요. 뒷좌석의 흑인들이랑 앞좌석의 백인들 사이에서요. 운전기사가 화가나서 버스를 세워서 사람들을 내리게하고는 사람들을 줄세워놓고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싸움들 좀 그만 하세요, 내가 보기엔 당신들 모두 초록색이오. 그러니 옅은 초록피부사람은 앞에 앉고 짙은 초록피부 사람들은 뒤에 앉아요.”
내가 말하려는건, 이 농담이 어떤 중립화, 예를 들면 단순히 세 번째 성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들이 차별의 영속을 멈추게 하는 데 오히려 비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성차를 망각하거나, 근본적 의미에서의 성차 개념을 버리기로 결심하면, 아마도 이 버스 안의 승객처럼 될 위험이 있는 겁니다. 비성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차별받을 거라는 거죠.
정말 결론을 말해볼게요.
진정으로 해방적인 운동은 결코 단순히 인정이나 차이나 서로 다른 정체성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해방적인 운동은 이런 차이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1물결처럼 참정권을 위해 외치는 것은, 우리의 차이들과 상관 없이 투표할 권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길로 가는 경로는 중립화, 중성화, neutralization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이 절대적 차이(성차)를 가동시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차이를 가동시키지 않고서는 어떤 해방운동도 가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성으로서 가동하는 것입니다. 라캉의 주장처럼 남성, 여성, same difference동일한 차이. 이것은 문자그대로 말해야 하는데,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게이, 트랜스 섹슈얼, same difference. 이것의 의미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교착이 동일하다는 것이고, 정확히 그것이 우리를 결국에 어떤 싸움을 위해 결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