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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머리를 올리고 건을 둘렀으며, 주름진 치마 위에 저고리를 착용하였다.
저고리의 선에는 다채로운 문양을 넣었다.
고구려의 치마는 허리에서부터 치마단까지 잔주름이 고르게 잡혀있으며, 주름선이 곧게 표현되었다.
이런 기본형의 주름치마 외에도 색동조각으로 배색한 것 등 독특한 A라인의 치마가 많았다고 한다.
- 남 :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부리를 오므린 바지 위에 저고리를 착용하였다.
저고리와 바지는 색에 차이를 두며, 저고리 깃과 소매는 바탕과 다른 진한 별색의 선을 둘렀다.
고구려
고구려는 북쪽에 위치해 대륙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접촉이 많았고, 고구려의 외래문화는 주변 국가에 전파되어 교섭도 활발하였다.
지형과 기후가 농사짓기에 적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렵과 방목이 발달하였고, 이는 사회기풍이 씩씩하게 되었다.
문화적영향
좌식, 온돌, 앉는 문화이다. 방바닥이 인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앉더라도 몸의 일부가 방바닥과 넓게 닿도록 앉는 것이 더 편안하고 계층이 높은 사람이 누릴수 있는 자세였다. 즉 방바닥과의 넓은 접촉에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국토의 70%정도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씨는 반도국이다.
북부지방에는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과 남쪽, 서쪽에는 바다로 둘러싸여져 있다.
평야의 비율은 적은편이며, 큰강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서쪽과 남쪽에 발달해 있다.
논이나 밭은 멀리 있지 않고 집과 가까이 있다. 따라서 물건을 담을 포켓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들은 포켓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나 모양도 아니었다.
3. 좌식문화
1. 농경문화
공통 복장
원형은 북방이민족들이 입었던 옷에서 비롯되었으며, 양팔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좁은 바지로 구성되어 말 타고 사냥하는데 편리한 의복 구조이다.
백제
지형
↑ 백제 금박 귀걸이
- 유는 저고리로서 상의이고, 고와 상은 하의에 해당한다.
- 머리에 관모, 허리에 대, 발에 이를 착용하면 의복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 포는 유와 고 혹은 유와 상위에 덧입은 것으로 의례용이나 방한용으로 입었다.
1. 상황 - 무풍적
삼국시대는 무를 숭상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삼국은 대륙의 여러 국가들과 일본과의 빈번한 접촉으로 평상시에도 결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기에 복식에 이러한 시대상이 반영되었다.
사회적 특질은 고구려와 별 차이가 없었다. 중국 남조계통의 귀족문화를 수입해 내적으로 세련된 미의식이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삼국시대
3. 기마 , 수렵생활
우리 민족의 본원지는 두만강, 압록강 이북의 만주인데, 북방계 민족의 공통된 생활양식인 기마, 수렵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이나 남방계열의 복식과는 다른 형태의 복식문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남 : 거의 고구려와 비슷한 복식을 보여주나. 포의 바탕 혹은 선에 백제시대의 문양을 넣어 구분하였다.
여 :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위에 포를 입는, 고구려의 비슷한 양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치마는 고구려의 주름치마와는 구분된 형태로써 폭이 넓게 퍼지지 않는다.
보자기의 특징은 포켓과는 달리 크기, 형태 상관없이 모양대로 싸지는 것이 특징이다.
즉 생긴 모양대로 받아들이는것이므로 우리의 문화는 포용, 배려 즉 관용이 배여있다.
걸치는 옷은 앞을 여미어서 입는 옷으로 인체를 구속하지 않고 넓은 옷으로 발달된 구조이다. 인체를 구속하는 체형형 옷과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4. 걸치는 옷 문화
2. 보자기문화
관모
2. 신분제
삼한시대에는 이미 상하의 계급이 분화되어 있었다.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생산면에서 발전하게 됨으로써 생긴 현상이다.
머리를 보호나는 역활과 함께 미적 감각을 살리고 계급 표시를 겸했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어느 복식보다도 크게 발달하였다. 관모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골품제도
반비
↑중국의 단령
←신라의 단령
신라는 골품제를 실시하게 되면서 신분관념이 뚜렷해지고, 엄격한 계급적 사회질서가 생기게 됨에 따라 복식도 계급별로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1년 평균 강우량
단령
당에서 들여온 옷으로, 골품계급에 한해서 착용되었다. 반비는 깃과 소매가 없거나 소매가 아주 짧은 겉옷으로 보통 저고리 위에 덧입는다.
표
기마유목민족에 들여온 것으로, 형태는 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으며 길이는 발뒤꿈치까지 오는 홑옷이다.
후에 조선시대 관복까지 이어지게 된다.
신라
대륙문화를 수입하는것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었지만, 후에 자신의 독창적 문화를 완성한 나라이고, 국력이 강해짐에 따라 복식도 무풍적일 뿐만 아니라 창의적 수식이 풍부하게 되었다.
당나라 여인들에게 유행했던 영표를 말하는 것으로. 여인들이 목 뒤에서 가슴 앞으로 길게 드리운 것으로 일종의 '목도리'이다.
1) 한선의 차가 크며 특히 겨울의 추위가 격심하며 그 기간이 길다.
2)일반적으로 강우량이 적고 우기와 건조기가 분명하다.
-> 급변하는 기온에 앞을 여미었다 열었다 하기에 편리한 상 하의로 구분된 절개형의,
추워도 목과 몸통, 사지까지 완전히 보존해 줄수 있는 복식형태로 발달하였다.
기후
복식
여성 저고리의 부위별 명칭
1) 깃
목을 감싸는 부분을 말한다. 모양에 따라 목판깃, 당코깃, 일반 둥근깃으로 나뉜다.
2) 동정
저고리 깃 위에 덧댄 백색감.
3) 길
몸판을 가리킨다. 앞길과 뒷길로 이루어져 있다.
4) 섶
저고리의 앞에 벌어지지 않도록 앞부분에 대는 천으로 겉섶과 안섶이 있다.
5) 고름
옷을 여미는데 쓰이는 끈이다.
6) 곁마기
겨드랑이 밑에 덧댄 삼각형 보양의 부분을 말한다.
7 )배래
저고리 소매 끝에서 진동까지의 곡선을 이루는 부분.
8) 회장
고름, 곁마기, 끝동에 다른 색의 천을 댄 것을 삼회장, 이 중 한 가지만 빠져도 반회장이라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한복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포용 정책과 더불어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해지며 복식문화가 발달했다. 관복제도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귀족층을 중심으로 당나라 복식이 우리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복식은 북방계의 호복을 기본으로 하여 중국계 복식이 들어와 우리나라 복식 구조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복식은 주로 귀족계급에 한해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복식은 삼국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복식에 대한 유물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흥덕왕 9년(834)년 제정된 복식금제령을 통해 그 당시의 복장을 재구성할 수 있다.
다문화의 시기
고려의 복식제도는 변천과정을 보아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 중기 - 당, 송의 복식이 영향을 준 시기
후기 - 원의 복식이 영향을 준 시기.
말기 - 명의 제도를 답습함에 따라 나타난 시기.
왼쪽은 몽고 궁정의 옷으로, 옆에 대임 여밈이 긴 옷이 특징이다.
오른쪽은 공민왕의 초상화로, 마찬가지로 여밈이 길다.
포
고려
족두리와 도투락 댕기는 당시 몽고 기혼녀의 복식이었던 도톨이가 발전한 것이다.
송나라 복식 절상건이 고려의 상복으로 영향받게 되었다.
포 - 신라 복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저고리 위에 입은 겉옷이다. 옷 오프닝부분에 띠를 둘러 장식했다.
상 - 고려의 귀부인들은 짙은 황색 치마를 즐겨입었으며, 길이는 매우 길었다고 한다. 조반부인은 반대로 녹색저고리 아리에 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여러겹 입어서 부풀렸다고 한다.
고려는 민족융합정책을 추구하여 나타난 나라이다.
건국 초기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잔재해 있던 신라적인 요소와 외국과의 관계를 통한 영향을
다각도로 받으면서 고려문화를 다채롭게 형성, 발전시켜 왔다.
복식에서도 우리 고유 복식과 중국 복식과의 이중구조가 공존하던 시기이다.
포는 주로 흰색이었으며, 이를 백저포라고 한다. 포에 허리띠를 매었고, 허리띠에는 5색의 찬란한 금방울을 매달거나 향료를 넣은 금낭을 찼다.
삼국시대에 있었던 깃, 도련등에 있었던 진한 선들이 고려시대에 들어와 사라지고 동정이 생기는데, 몽골에서 영향받았다.
또한 짧고 좁은 소매의 저고리가 유행하였다.
조반부인상
하연부인
ㄹㅇㅇㅇ윌
20101 강민승
20109 박영신
20111 성우림
20116 이수인
20123 전예린
20134 하은지
한국복식
왕
앵삼
왕복은 행사때 입은 면복, 평상시에 입은 상복, 국난때 입은 융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복
면복
과거 급제한 사람이 임금이 내린 어사화를 쓰고 삼일유가할때 입던 옷이다. 앵무새색 단령에 검은 선을 둘렀다.
관리들의 사무복으로 국가의 연회에 참석할때 착용하였으며, 색은 정하지 않아 왕조마다 유행색이 있었다.
유교
계층
정치
면복은 왕이 국가의 중대 의식이나 혼인을 치르는 의식, 또는 종묘나 사직에 제사를 지낼때 착용하던 복식이다.
융복
상복
군복
왕이 능에 갈때나 국난을 당했을때 입는 옷이다.
왕이 평소 집무 볼때 입던 옷이다.
머리에 전립을 쓰고 동달이와 전복을 입은 다음 광대와 전대를 띠고 화를 신으며 지휘봉인 등채를 든다.
조선은 유교사상의 예를 기본으로 한 철학이념으로 통치되었으므로 유교윤리의 가정적, 사회적 기능 중 관혼상제를 예로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따라서 복식문화도 예를 표현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가장 중시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치 체제는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였다. 려시대에 비해 중앙집권 체제가 보다 강화되었다.
왕족의 문화가 많이 발달했으며, 이에따라 복식도 화려해지고 복잡해졌다.
조선시대는 사회적 신분 질서가 엄격하였다.
신분에 따라 관직, 납세, 군역, 형벌 등이 차별되고 의식주 생활 양식에 차등이 생겼다.
복식 자체가 계급의 표시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남자
창의
학창의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품계에 따라 관복제도가 복잡하였지만, 관리복에 있어서는 신분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신선이 입는 옷이라 하여 덕망높은 학자나 도사가 입은 옷. 형태는 대창의와 같지만 가장자리에 검은 선을 둘렀다.
도포와 주의의 중간 형태로 양 옆을 튼다. 선의 위치, 무의 유무, 선의 유무에 따라 대창의, 중치막, 학창의, 소창의로 구분된다.
직령
도포
직령은 깃이 직선헝태로 곧게 생겼다는데서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여러 계층에 착용된 옷이다.
답호
도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용된 포로써 사대부들이 가장 많이 착용했던 것이다.
도포의 형태는 직령과 같으나 뒷면에 전삼이 붙어있는것이 특징이다. 상류층에 국한된 옷으로 좋은일이나 기쁜일이 있을때는 청색, 상을 당했을때는 백색을 입었다.
철릭
답호는 철릭 위에 입었던 것으로, 왕 상복으로만 착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신하들, 하급관리들도 착용하여 전복, 또는 전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철릭은 중국식의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상의하상식으로 소매는 두리소매로 상당히 넓고 고름은 저고리에 달아서 앞을 여미게 하였다. 품위가 높을수록 홍색이다.
궁중복
장삼
노의
여자 예복은 궁중을 중심으로 하여 생겨났고, 사대부가에 전파되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여인의 예복으로는 중국에서 다양하게 많은 것들이 들어와 사용되었으며 대표적으로 적의, 노의, 장삼, 원삼, 활옷, 당의 등이 있다.
대란치마
스란치마
적의
당의
노의 다음 가는 옷으로, 외명부의 부인들과 정처의 예복이었다. 옆이 트이지 않은 두루마기 형태로 노의와 거의 형태가 비슷하나, 노의에는 없는 동정이 장삼에는 달려있었다.
비, 빈의 옷으로 홍색의 원적무늬가 금작으로 놓여져 있어 적의 다음가는 예복이다. 뒷길이가 길고 앞이 짧은 모습으로 상당히 화려했으며, 태수(끝동) 길(몸판) 색에 따라 신분이 구별되었다.
궁중에서 비, 빈이 입는 치마를 대란치마라고 하고, 소례복으로 입는 치마를 스란치마라고 한다.
문양은 계급에 따라 달랐으며, 왕비는 용문, 공주는 봉황문, 양반가는 꽃무늬를 사용하였다.
왕비나 왕세자비의 행사복으로 꿩무늬를 수높은 포를 말한다. 즉 조선시대 최고 신분의 여성복식이다. 앞길이는 짧고 뒷길이는 몇척이 길며, 앞에 꿩무늬와 작고 둥근 꽃무늬를 수놓아 매우 화려하다.
당의는 여자의 웃옷으로 좁은 소매이고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것으로, 예복 중 가장 간편하면서 모양의 아름다운옷이었다.
활옷
활옷은 홍색의 길에 화려한 무늬를 수높은 옷으로, 공주의 대례복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복식
- 여자 의복: 간편함과 실용성을 강조하여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지고 소매통이 넓어지면서 배래의 곡선이 오늘날과 같이 변화하였다.
또한, 깃과 섶의 길이가 길어져 남자 저고리 같이 보였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치마는 오히려 짧아지고 통치마가 등장하고 치마말기에는 조끼를 달아 착용에 실용성을 더하게 된다.
복잡했던 속옷의 착용도 속바지나 속치마로 간소화 되었다.
<개화기 이후 의복>
- 남자 의복: 근대화의 영향으로 양복을 입기 시작했고, 마고자와 조끼가 생겨났다.
원래 우리 옷에는 옷 자체에 주머니가 없다.
조끼는 서양의 수트가 유입되면서 수트 안에 입는 베스트의 형태를 도입하여 우리 옷화 되었다.
조끼 위에는 마고자를 입는다. 독특한 이름의 마고자는 마괘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는데 원래는 만주인의 옷이었던 것을
대원군이 만주에서 입고 귀국해 우리나라에서 변형되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자들은 솜이나 털을 안에 두어 저고리 위에 덧입는 방한용 옷으로도 착용되었다.
남성들은 저고리-조끼-마고자의 착용법이 일반화 되어 오늘날 까지도 일반적인 남자한복으로 대중화 되어 있는 옷이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여성복식은
저고리와 치마로 이루어져 있다.
속옷
저고리
평상복의 치마 밑에는 하체를 부풀리기 위해 단속곳을 입고 그 밑에 바지, 또 그밑에 속속곳을 입었고 그밑에는 자주 빨아 입을 수 있는 다리속곳을 입었다.
이밖에도 상류층에서는 외출시 단속곳 위에 비단으로 된 너른바지를 입어 모양을 더하였다.
우리나라 저고리, 치마 변천도
치마
깃의 종류와 변천도
조선시대에 와서도 저고리의 원형은 전의 기본형이 유지되었다고 보인다.
저고리는 시대별로 모양이 조금씩 변화하는데, 시대가 갈수록 길이가 짧아지고, 품이 꼭 맞게 변한다. 그리고 진동도 좁아지고 고름의 길이는 길어진다.
치마는 전통복식 중에서 오랫동안 변화가 적었던 것으로, 저고리 길이에 따라 치마허리 위치가 달라졌다.
악세사리
뒤꽂이
첩지
댕기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장식품으로
신분에 따라 재료가 달랐다.
영조 이후 과도한 머리장식을 규제하게되면서 사용된 것이다. 머리에 쪽을 지고 가르마에 장식했다.
떨잠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미혼녀가 주로 하였다.
비녀
상류계급이 큰 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어 머리의 앞 중앙과 좌우 양쪽에 하나씩 꽂았다.
부인들의 머리를 쪽질 때 꽂는 장신구로 사용된 재료에 따라 신분을 구별하였다.
화관 :
가채 금지령 이후 가채 대신에
화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족두리 :
양반 부녀자가 외출할떄 쓴 모자로 검은 비단을 이어 꿰매고 안에 솜을 넣은 기본형태에 여러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조바위 : 뺨에 닿는 곳을 동그랗게 하여 귀를 완전히 덮어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가장자리를 오무린형태다.
풍차 : 형태는 남바위와 비슷해 꼭대기에 공간을 두고 뺨에 볼끼를 달았다.
볼끼 : 뺨을 덮기 위한 방한용으로 서민층에 주로 사용하였다.
쓰개치마 : 형태는 치마와 같으나 길이가 치마보다 짧고 폭도 좁았다. 썼을때 치마허리를 얼굴에 착용하기 때문에 주름이 많이 잡혀 머리위로 불룩해 보인다.
장옷 : 두루마기와 형태가 비슷하며, 동정 대신 넓은 흰 헝겊을 대어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다. 앞은 여며지도록 단추를 달았고 이중 고름을 달아 손으로 잡을수 있게 하였다.
차액 : 기녀, 의녀, 창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쓰개의 일종이다.
전모 : 내외 목적이라기보다는 장식용 성격이 강한 가리개이다. 기름종이로 만들었으며 갓과 비슷하다.
너울 : 형태는 갓 위에 사각형의 천을 씌운 것으로 위보다 아래가 약간 넓은 자류형이며 길이는 어깨까지 오며 눈부분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망사 같은 옷감을 대었다.
삿갓 : 갈대로 만든 커다란 방립형 삿갓을 썼다.
감사합니다
가락지
저고리의 선과 어울려 주로 발달한 악세사리이다.
가락지는 2개를 쌍으로 하여 금, 은 비취등으로 만들어 기혼 여인이 사용했다.
신발
주머니
우리나라 옷에는 서양식의 포켓 역활을 하는 것이 없어 실용성과 장식적인 면을 겸해 주머니가 만들어졌다.
주머니의 종류는 두가지로, 각이 진 귀주머니, 두루주머니가 있다. 남녀 모두 착용했다.
소재에 따라 피혁제(가죽) , 초, 마제 , 포백제 (가죽신에 비단으로 덧댄것) , 목제 , 지제(종이) , 유제(놋쇠) 로 나뉜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포용 정책과 더불어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해지며 복식문화가 발달했다. 관복제도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귀족층을 중심으로 당나라 복식이 우리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복식은 북방계의 호복을 기본으로 하여 중국계 복식이 들어와 우리나라 복식 구조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복식은 주로 귀족계급에 한해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복식은 삼국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복식에 대한 유물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흥덕왕 9년(834)년 제정된 복식금제령을 통해 그 당시의 복장을 재구성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포용 정책과 더불어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해지며 복식문화가 발달했다. 관복제도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귀족층을 중심으로 당나라 복식이 우리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복식은 북방계의 호복을 기본으로 하여 중국계 복식이 들어와 우리나라 복식 구조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복식은 주로 귀족계급에 한해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복식은 삼국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복식에 대한 유물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흥덕왕 9년(834)년 제정된 복식금제령을 통해 그 당시의 복장을 재구성할 수 있다.
1) 깃
목을 감싸는 부분을 말한다. 모양에 따라 목판깃, 당코깃, 일반 둥근깃으로 나뉜다.
2) 동정
저고리 깃 위에 덧댄 백색감.
3) 길
몸판을 가리킨다. 앞길과 뒷길로 이루어져 있다.
4) 섶
저고리의 앞에 벌어지지 않도록 앞부분에 대는 천으로 겉섶과 안섶이 있다.
5) 고름
옷을 여미는데 쓰이는 끈이다.
6) 곁마기
겨드랑이 밑에 덧댄 삼각형 보양의 부분을 말한다.
7 )배래
저고리 소매 끝에서 진동까지의 곡선을 이루는 부분.
8) 회장
고름, 곁마기, 끝동에 다른 색의 천을 댄 것을 삼회장, 이 중 한 가지만 빠져도 반회장이라 한다.
1) 깃
목을 감싸는 부분을 말한다. 모양에 따라 목판깃, 당코깃, 일반 둥근깃으로 나뉜다.
2) 동정
저고리 깃 위에 덧댄 백색감.
3) 길
몸판을 가리킨다. 앞길과 뒷길로 이루어져 있다.
4) 섶
저고리의 앞에 벌어지지 않도록 앞부분에 대는 천으로 겉섶과 안섶이 있다.
5) 고름
옷을 여미는데 쓰이는 끈이다.
6) 곁마기
겨드랑이 밑에 덧댄 삼각형 보양의 부분을 말한다.
7 )배래
저고리 소매 끝에서 진동까지의 곡선을 이루는 부분.
8) 회장
고름, 곁마기, 끝동에 다른 색의 천을 댄 것을 삼회장, 이 중 한 가지만 빠져도 반회장이라 한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포용 정책과 더불어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해지며 복식문화가 발달했다. 관복제도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귀족층을 중심으로 당나라 복식이 우리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복식은 북방계의 호복을 기본으로 하여 중국계 복식이 들어와 우리나라 복식 구조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복식은 주로 귀족계급에 한해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복식은 삼국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복식에 대한 유물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흥덕왕 9년(834)년 제정된 복식금제령을 통해 그 당시의 복장을 재구성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포용 정책과 더불어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해지며 복식문화가 발달했다. 관복제도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귀족층을 중심으로 당나라 복식이 우리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복식은 북방계의 호복을 기본으로 하여 중국계 복식이 들어와 우리나라 복식 구조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복식은 주로 귀족계급에 한해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복식은 삼국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복식에 대한 유물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흥덕왕 9년(834)년 제정된 복식금제령을 통해 그 당시의 복장을 재구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