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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역사적 배경

청소당번 1.2.3.4.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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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19 혁명의 역사적 배경

2. 4.19 혁명의 경과와 결과

3. 4.19 혁명의 의의와 평가

4.19혁명

1교시 체육

2교시 한국사

3교시 미술

4교시 미술

5교시 법정

6교시 영어

7교시 수학

1960년 이전의 이승만 대통령

초대 대통령 이승만

국회에 의한 간접 선거에 의해 제 1대 대통령으로 선출

1960년 제 4대 정-부통령 선거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헌법 개정

발췌개헌(1952.7.7)과 부산정치파동

4.19 혁명의 영향과 의의

제 2대 대통령선거(1952.8.5)

10일간의 선거운동 이승만의 독주

야당(민주당)

여당(자유당)

사사오입개헌(1954)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

신익희의 죽음과 조봉암의 선전

제 3대 대통령 선거(1956)

vs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사망함에 따라, 단독 후보가 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 되었다.

죽산(조봉암)이 투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는 졌다

제 3대 대통령 선거(1956)

4.19 혁명의 의의

3.15 부정선거

3.15 부정선거는 앞서 나왔듯이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여당에 의해 조작된 투표이다. 여당은 미리 선거 결과를 분석하고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을것으로 판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40% 사전투표,투표함 바꿔치기

2. 3인조 또는 5인조의 반공개 투표

3.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4.19 혁명의 영향

그결과 95~99% 가까운 득표율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었지만 자유당 정부는 각각 88.7%, 7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고 하향조정하여 발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투표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여러 시위가 일어났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 - 이승만

여당의 부통령 후보 - 이기붕

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

야당의 부통령 후보 - 장 면

1. 대한민국 국민들의 발전된 민주의식의 표현

2. 주권재민의 확인

문제는 고령인 이승만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대통력 직을 승계하도록 되어있는 부통령직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3.15 부정선거)

1. 학생운동의 활성화

2.민주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변화

3.전 근대적 봉건적 경제질서 타파

수업 끝!!!

3.15 부정선거

수고하셨습니다.

4.19 혁명의 경과와 결과

문제 2. 수학 숙제의 내용은??

4.19 혁명의 전개 과정

4.19혁명의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햐야와 장면 내각 설립

반장: 정유진

부반장: 조연주

믿었던 미국마저.....

집에 가는 길

3.15 선거 다시하라!!! 그리고 김주열 학생의 실종

이승만의 대국민 담화와 국무위원들의 총 사퇴

고려대 피습사건

1차 마산 시위

문제 3. 3.15 부정선거 방법중 2가지를 말하여라

4월 19일 계엄령이 발표됨에 따라 게엄군이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유연한 조치를 보이며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승만 정부는 4월 20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 전날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는듯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학고 있었다.

- 1960년 3 ·15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마산의 시민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사건을 말합니다.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합니다. 이에 민주당 간부들은 선거 포기를 선언 하고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하였습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습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러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태도에 미국은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주한 미국대사는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였고 학생 시위대의 시위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미국 국무부 또한 주미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며 경찰의 강경진압에 항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4월 18일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고려대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는 데모에 나섰다. 이에 경찰은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저지선을 세우고 진압에 나섰으나 학생들은 경찰저지선을 뚫었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연좌데모를 시작했다. 하지만 고려대 선배 이철승 의원의 데모 만류연설과 유진오 고려대 총장의 만류로 오후 6시 30분경에 시위를 마치고 귀교를 시작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나는 듯 했으나 천일백화점 앞을 지나던 고대 학생들을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정치깡패들이 습격했고 많은 부상자가 나오게 된다. 이 날의 소식은 동아일보를 포함한 주요 신문사의 1면에 장식됐고 이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4월 19일, 대대적인 시위가 전개된다

미국마저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자 4월 21일, 국무위원들이 총사퇴를 결행했고 4월 23일에는 부통령 장면이 이승만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이승만 또한 자유당 총재 사퇴의사를 밝히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시민들의 분노와 시위의 열기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0.4.11

1960.4.19

1960.4.25

1960.4.21

1960.4.18

1960.3.15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김주열 시체 발견!!!

'피의 화요일'

김주열과 제2차 마산의거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

4월 19일 오전, 첫 시위는 고등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자극받은 신설동의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동대문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이를 본 서울 각지의 대학생들도 시위를 시작했다. 대광고교 학생들의 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어 교내에서 총궐기 한 동국대학교가 국회의사당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성균관대도 이를 따랐다. 정오에는 연세대와 중앙대 등의 학교들까지 가세하여 시위대는 1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4월 25일 자신들의 제자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시작했다. 많은 서울 시민들은 이 시위에 동참했고 서울 각지에서 모인 대학교수단 259명 현 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국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교수들은 이전까지의 시위대가 요구한 선거 재실시뿐 아니라 직접적 원인이 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했다.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김주열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로 발견 되었다. 김주열의 시체를 본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 올랐고 2차 마산시위로 연결되었다. 이는 4.19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차 마산의거는 김주열의 시체발견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경찰은 김주열의 시체를 빠르게 병원으로 옮겨 사실을 은페하려했지만 진실은 마신 시민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갓고 분개한 마산 시민들은 제 2차 마신시위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폭동으로 규정하였고 시위대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라디오로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의 권한을 허정이 위임받아 허정 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6월 12일 내각 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중앙청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정오 이후, 경무대로 진출해나갔다. 경찰은 중앙청에서 경무대로 이어지는 길에 저지선을 치고 완강히 버텼지만 시위대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저지선을 돌파했고 경무대 100m 앞까지 나아가는데 성공한다.

* 잘 모르는 김주열과 관련된 상식 *

경무대에 근접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이에 21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이 날 하루, 전국에서 115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러한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대는 자유당 본부와 이기붕 사저 등을 점거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오후 3시경, 서울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김주열군은 마산 상업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남원으로 갔다가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과 함께 마산으로 왔다. 원래 합격자 발표일은 3원 14일 이었으나 3.15 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이 몰리는것을 종용한 교육청 때문에 합격자 발표는 16일로 미뤄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주열군이 3.15 의거과정에서 시위대에 합류되게 되고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맞아 쓰러졌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교 4.19 선언문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윤보선이 당선이되고 8월 18일 국무 총리에 장면이 지목되어 장면 내각이 성립하게 된다 장면 내각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국토 건설 사업등을 추진하였으나 3.15 부정선거 책임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4.19 혁명 이후 쏟아지는 민주화 요구에 내각 책임제라는 국회 운영의 특성상 모든 요구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고 이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하는 바이다.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로 민중앞에 군림하든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교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앞에 농단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같은 밤의 계속이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아래 미칠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 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교 4.19 선언문

내각 책임제란???

내각 책임제

내각 책임제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의해 구성된 내각의 수반임을 의미하는데 조금 쉽게 말하면 대통령은 형식상으로 존재하고 정치는 의회가 하는것으로 보면 된다. 내각 책임제는 국회와 행정부가 연결되어있어 서로 상호적인 효과를 낼 수있고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국가의 긴급 상황이나 여러 가지 요청이 있을때 국회의 의견을 모으고 통합하여 정책을 실행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의 속도가 느리고 긴급 상황시 대처가 어렵다는 점이다.

수학 숙제

80,81p 풀어오기

4.19 혁명의 전개 과정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