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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유인원의 열쇠이(지 유인원이 인간의 열쇠는 아니다).”
- 마르크스, <그룬트리세>
"Human anatomy contains a key to the anatomy of the ape."
- Karl Marx, Grundrisse
: 인간이 먹는 것,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 by 보르헤스(브라이도티, 『변신』 , 231)
: [중국의 한 백과 사전에 따르면]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 황제에 속하는 동물, 2)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보존된 동물, 3)사육동물, 4) 젖을 빠는 돼지, 5) 인어, 6) 전설상의 동물, 7) 주인없는 개, 8)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9) 광폭한 동물, 10) 셀 수 없는 동물, 11)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12) 기타, 13) 물 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14)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푸코, 『말과 사물』, 11)
1) 우리를 인간으로 구별시킨다고 가정된 차이: 이성, 언어, 도구사용 등.
- 언뜻 보기에, 이런 차이점들은 단지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의 단순하고 객관적인 차이처럼 보이기도 함.
- 즉, 동물 범주 내에서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래서 인간적 동물이 보이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 우위성이라기보다는 진화계보에서 시공간적 특정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평이한 차이로 보이기도 함.
2) 그런데 이 인간과 동물의 저 차이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점점 이상해짐.
- 그렇다면 이 인간적 차이란 다른 종류의 차이인가? 왜냐하면 이 차이점들(이성, 언어, 도구사용 등)은 인간이 자기를 보는 관점인 것이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차이인 것인지는 불분명. (동물도 저 차이로 인간을 자신과 다르다고 분류할 것인가? 구분에는 반드시 인간적 관점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음)
- 우리가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분리와 구분을 동원하므로.
- 이 차이점들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인지, “동물로서의 우리인간(인간동물, ‘동물적 욕구’로 작동하는 존재)”와 “동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인간동물 그 이상의 존재)”간의 구분인지?
-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체존재”로서의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부분은 동물이고 어떤 부분은 매우 다른 어떤 존재이다. =>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철학/인간학에서 부여한 몸/정신의 현대적 판본이다(심지어 진화론도 동일한 설명)
동물성
인간성
1. 인간동물에게 동물적인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과잉이다
- 기독교적 상상
- 이 과잉의 자율성(통제되지 않음)은 ‘죄’로서 발명됨
- 우리 안의 타자적인 것(동물적인 것)에게 이 과잉의 자율성이 전가됨
- 그러나 이것은 실제 동물행동과 별 관계가 없음. 여기서 ‘동물같은 행동’은 저 자율적 과잉/타자적인 것, 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약점’으로 제시됨.
- 즉 이런 이미지에서 동물은 억제되지 않고 과도한 향유의 이미지(욕구에 충실, 자제력 없음 등)
인간성(이성, 주이상스, 과잉, 초과, 초월)
동물=인간
동물성
현대의 인간동물
근대의 인간동물
2. 인간동물에게 동물적인 것은 어떤 것이 결여된 것이다
- ‘인간동물’의 현대적 판본
- 전적으로 합법칙적이고 물질적이고 법칙적인 존재 그 이상의 어떤 것을 할 수 없는 존재.
- 모종의 과도한 초조함(정신분석), 죽음을-향한-존재(하이데거), 주이상스(라캉), 유랑하는 과잉(바디우)에 시달리지 않는 인간적 동물
- 칸트적 의미의 ‘정념적(병리적pathological)-비윤리적 인간’: 칸트에게 비윤리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는 별 상관 없이, 자연법칙이나 대류의 흐름에 스스로를 맡긴 인간 형상을 일컬음. 주체의 실천적 자유행위는 이런 대류의 흐름에 맡겨진 인간과는 다른 인간주체를 가리킴. 가령 우리가 옳은 일을 하더라도 신이 두려워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동물’로서 행위하는 것이지, 윤리적 주체로서 행위하는 것은 아님. 즉 칸트에게 진정한 인간성, 즉 ‘동물적 인간’이 아닌 ‘인간적 인간’은 ‘자연의 인과를 방해하고 벗어나서 동물에게는 결여된 과잉(도덕법칙)’ 쪽에 있음.
인간동물이
결여하고 있는 것
동물
인간동물
3. 반쪽짜리 동물: 니체의 인간동물
- 니체에게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반은 동물이고 반은 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 동물상태에서 끝난다는 것이 문제.
- 인간에게는 동물부분만 있고 이조차도 완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심대히 결여되어 있음.
- 그러므로 인간동물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동물에게는 결여된 어떤 것에 있음.그리고 이 결여된 부분에 생긴 것이 도덕과 문화.
인간동물
3. 반쪽짜리 동물: 니체의 인간동물
<인간에게는 왜 도덕성이 필수인가? > - 니체
“벌거벗인 인간은 대체로 보기 민망하다...식탁 앞에 앉은 가장 쾌활한 동료가 마법사의 심술로 갑자기 옷벗은 자기자신을 보게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좌중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좋았던 입맛도 뚝 떨어질 것이다. 우리 유럽인은 옷이라는 가장 없이는 지낼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이 ‘도덕적 인간’이 옷을 차려입는 방식을, 즉 어떻게 그가 도덕 공식과 품위라는 개념 뒤에 숨어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의 행위들을 의무, 덕성, 공동체의식, 명예심, 자기-부인의 개념들로서 선의로 숨기는 방법들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이유도 똑같이 충분하지 아니한가? 나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악의와 악행, 우리 안의 야수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의 생각은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도덕적 가장을 필요로 하는 길들여진 동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유럽인은 아프고, 역겹고, 불구인 동물이 되었기 때문에 도덕성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그는 거의 유산아로 반쯤 생기다 만, 나약하고 서툰 존재이기 때문이다.”
- 니체, <즐거운 지식>
인간동물
3. 반쪽짜리 동물: 니체의 인간동물
- 이것은 반은 동물, 반은 다른 어떤 것으로서의 인간 이미지가 아니다.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결여이자 이 상실 부분을 감추고자 옷으로 설기설기 그 결여를 감추고 있는 – 그러면서 그 옷이 인간성, 인간적 창조, 이성, 도구, 도덕, 윤리의 역할까지 해내는 – 그런 인간의 이미지이다.
- 이런 이미지는 진화론적 관점이 아니라 철학적 관점이다. 진화론은 고유한 인간성을, 상실한 유기체적 다리를 대체하는 의족처럼 결점을 보완해주는 보철로 간주한다. 그러나 니체의 인간-동물은 상실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옷을 입는 것이다. 이 결점을 ‘메우고 보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동물
3. 반쪽짜리 동물: 니체의 인간동물
- 반만 동물인 인간은 그래서 옷을 입는다. 이 반쪽짜리 동물과 옷(더 큰 의미에서는 도덕과 문화)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이 없다.
=> 그런데 이러한 니체의 인간동물 이미지에 따르면, 마치 인간이 아닌 동물은 저런 결점이 없는, 완전한 동물(어떤 수치, 혐오, 도덕 등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은 문제가 있음.
성, 충동
비전체로서의 동물
4. 반쪽짜리 인간동물과 섹슈얼리티(와 충동): 정신분석의 인간동물
- 니체의 인간-동물의 관점을 공유하지만, 저 ‘옷’의 영역에 ‘섹슈얼리티와 충동’를 놓음.
-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섹슈얼리티와 충동은 여하간에 우리의 소위 ‘자연스러운’ 행위를 벗어나라고 압박하는 신체-정신적 압력임. 이 압력에 대한 반응이 저 ‘옷’이자 문화/윤리임.
- 섹슈얼리티나 충동을 길들이려 한 것이 문화/문명이라는 정신분석적 관점의 인간동물 관점에서 문명은 무언가 한참 결여되어 있는(인간 스스로 전제하고 있는 ‘자연법칙’이 통하지 않아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인간이 얼기설기 그 결여를 메꾸려는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시도들과 진기한 ‘발명들’임.
- 니체와 다른 점은 정신분석에는 저 섹슈얼리티와 충동의 일탈적 성격이 인간에게만 있고 동물에게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저 섹슈얼리티와 충동이 ‘문제’로 인식된다는 데 있음. 동물에게는 있다 해도 그게 별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 않음. 그리고 정신분석에는 되다 만 인간과 달리 완전하게 합법칙적인 자연이라는 니체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음. =>자연 자체가 비전체이다.
1. 동물에 관한 반형이상학적 사유
1) 하이데거
“돌은 세계가 없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도 마찬가지로 세계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주변의 은밀한 무리에 속한다. 반면에 그 농부 여자는 존재의 밝혀져 있음에 거주하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세상을 정립하는 일로서의 일” -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반 고흐, <a pair of shoes>(1886)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다른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 밖에 서 있을 수 있고(ekstasis) 세계의 공간을 열며, 현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탈존(ek-sistence)적인 시간적 연속체 안으로 내던져지는 인간의 황홀한(ecstatic)한 능력에 달려 있다. 이때 언어는 세계를 재현하거나 세계의 본질에 대한 해석학적 – 지극히 인간적인 – 능력이다. 언어는 집이자 세계이다.
1. 동물에 관한 반형이상학적 사유
2) 브라이도티
- 언어는 세계에 개입하고, 세계를 침략하며, 세계를 전유한다. 그 모델은 하이데거의 ‘탈존’이 아니라 바이러스, 오염, 기생적 전유의 방식이다. 체현된 주체는 환경이나 서식지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타자들과 그것을 상호연결하는 공생, 오염-바이러스 류의 관계적 연결로 관통한다.
- 의식 그 자체는 초월적 행위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아래로 밀어내는 작용[무의식으로 억압하는 작용]으로 기능하며, 내면의 침입행위와 같다.
- 의식은 탐욕스럽고 포식적이며 자기강박적이다. 이런 나르시시즘과 편집증으로 문화가 건설되는 것.
- 동물-되기는 서식지/환경/영토로부터 거리가 두어진[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브라이도티에게 주체는 철저히 서식지/환경에 내재되어 있다.
2. 기관없는 신체와 신체없는 기관 - 들뢰즈/브라이도티의 정신분석 비판
1) 신체없는 기관(organ without body): 정신분석의 신체
- 정신분석에서 신체는 기관들에 따라, 기관들의 충동과의 관계에 따라, 대상선택에 따라 세분화된다. ‘정상적’ 신체(‘정상적’ 섹슈얼리티)와 ‘비정상적’ 신체(‘도착적’ 섹슈얼리티)가 기관들에 따라 조직되고 유기체로 된다.
- 기관들과 기능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적절한’ 대상과 연결되어야 한다. 신체의 쾌락은 기관에 기표의 연쇄를 기록하는 ‘보이지 않는 잉크’이다.
- 정신분석이 체현된 (기표와 신체의 이접적 결합) 신체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규범적인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2. 기관없는 신체와 신체없는 기관 - 들뢰즈/브라이도티의 정신분석 비판
- 그러나 브라이도티의 주장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기관과 특정 대상을 관계시키는 쾌락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면,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정신분석이 성적 대상을 생물학적으로 정해진 것으로, 심지어 규범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 궁극적으로는 정신분석도 유기체적 기관들에 포섭되거나 종속되지 않는 충동(부분충동들)과 충동의 임의적 대상들(제한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리고 이 충동이 대상을 통해 누리는 만족이 향유(주이상스)이다.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신체가 아닌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기관들에 관한 이미지.
2. 기관없는 신체와 신체없는 기관 - 들뢰즈/브라이도티의 정신분석 비판
2) 기관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 들뢰즈와 브라이도티의 신체
- 신체는 비유기적이다. 즉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동물-되기의 과정은 특수하고 규범적인 기관과 신체의 조직화를 벗어나고 신체를 해방하는 과정이다.(238)
- 푸코가 주장하듯, 담론의 규율능력, 학문들의 핵심에 존재하는 갖가지 정상성에 대한 담론과 규율, 문화적 표현과 쾌락의 자원화 (즉 신체를 조직하고 셈에 넣는[분류하는] 사회적, 과학적 방식들)로부터 신체를 해방시키는 것이 동물-되기의 핵심.
- 사유 또한 존재들을 조직하고 분류하는 것이 임무가 아니라, 변화와 변형에 관해 사유하는 것이 임무이다. 사유는 육체적인 것이고, 섹슈얼한 것이며, 쾌락으로부터 추동된다. (239)
- 이와 같이 동물-되기는 사유에는 과잉적인 것이지만, 그래서 사유를 흔들고 동요시키지만 사유의 임무를 위해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것.
1. 사유와 삶의 방식을 지배하는 동물은유
- 이사야 벌린은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윤리학을 설명하기 위해 여우와 고슴도치의 비유를 사용.
산업 사회에서 동물들은 기술 및 기계의 은유인데, 이때 기계란 주권이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우리가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연자원(노동자 포함)처럼 여겨짐. 동물들의 신체는 물질의 생산력을 위한 재료일 뿐.
그러나 들뢰즈와 브라이도티에게 동물은 목적론적 체계에 기능하지 않고, 은유와도 상관없는 존재이다.
동물은 변신에 관한 것이다.
2. 사유와 삶의 방식을 동요시키는 동물-되기로서의 글쓰기
- 그러나 분류와 목적론적 체계를 ‘설명’하기 위한 은유로서의 동물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동물-되기로서의 글쓰기가 있다. 브라이도티의 동물-되기는 문학적 글쓰기로 나타난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각 및 경험 영역의 시공간적 좌표에 포함시키는 글쓰기의 유목적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3. ‘완전한 동물’로서의 부정인 동물-되기
- 유목론은 융(Jung)의 원형적 신화 사상(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집단무의식의 전승)과는 전연 관련이 없다. 융에 따르면 원형이나 원시적 이미지들은 심리적으로 재생되어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진리를 전달한다. 가령, 문학에서 자주 드러나는 여성의 이미지들, 가령 “야생과의 연관성, 황야와의 친숙함, 외부, 숲에서의 향유, 사냥, 출혈과 피의 맛” 등이 문학 텍스트의 상수를 이루는 경우가 많으나, 브라이도티는 이를 거부.
- 왜냐하면 융의 집단 무의식은 일차원적이고 단방향적인 체계 내의 양적 복수성이지, 유목론의 복합성의 개방적 집합의 질적 다양성이 아니기 때문.
- 고대 그리스에서 비오스는 정치적 영역 내에서 정의되는 생명의 형식이나 방식을 의미하고 조에는 동물과 인간과 신 모두에게 공통되는, ‘살아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
- 조르주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 사회가 도래하면서 비오스와 조에가 융합되고 ‘벌거벗은 생물학적 생명’이 정치적 문제 자체가 되었다. ‘생물학적 근대성’의 도래와 함께, 자연적 생명은 국가의 일차적 관심사가 되었고, 그 결과 정치는 ‘생명정치’가 되었다는 푸코와 동일한 사유.
- 브라이도티도 ‘비오스는 거룩하고 조에는 비천하다’는 그리스적 사유를 거부하고, 이 둘이 교차하고 있음을 주장. 그러나 아감벤이나 푸코처럼 부정적이고 착취적 형식이 아닌, 신체 내의 교차성을 긍정. 그리고 그것이 변신에 있어서의 핵심임.
- 특히 조에의 ‘그것임, 그 자체’는 주체의 의식과 의지, 요구와 기대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 조에는 나를 행동하게 만들지만 나르시시즘과 편집증이라는 자아의 감독기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조에는 끈질기게 이어지고, 통제를 요구하되 통제를 얻는 데 실패하는, ‘자아’를 벗어나는, 결국 이질적인 타자로서 경험된다.”(253) 그리고 그래서 외설적이다. “이 추문, 이 경이로움, 이 조에, 비오스 이상이며 로고스와 전혀 관계없는 생명관념, 나 ‘자체’라고 불리는 이 아픈 고깃덩이는 의식이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비천한/신성한 힘을 표현한다. 유목적 주체성은 조에를 사랑한다.”(254)
- 동물이 되는 것과 동물되기는 구별되어야 한다. (257)
- 유기적인 기능을 다루는 생리학의 담론과 윤리학의 담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동물되기의 윤리학은 신체가 감각하는 기쁨과 긍정의 윤리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지, 국가의 억압적 개념이나 사회적 규범과는 무관하다. 이를 위해 돌연변이, 정동, 새로운 관계맺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 그런 의미에서 ‘의식’도 재규정되어야 한다. 의식이란 신체가 자신의 환경과 맺는 방식들 중 하나이며, 늑대의 애처로운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다. 의식은 ‘이 애매한 병, 이 생명, 이 조에’ 즉 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나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힘에 대한 치료법[심리치료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특히,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감상적으로 미화하는 것은 현대 문화와 과학에서 특히 문제적임.
왜냐하면,
1)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불평등의 구실이자 정당화로 과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함. (<강간의 자연사: 성적 강압의 생물학적 기초>, 랜디 손힐, 크레이그 파머, 2000)
2) 본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인식은 들뢰즈와 브라이도티의 유목론에 대립적.
엘리자베스 그로스의 다윈 읽기 참조!
1. 들뢰즈의 여성-되기
들뢰즈에게 성차와 관련하여 궁극적인 목표란 성차를 극복하는 것. 유목적이고 강도적인 것들은 한계가 없고 분산적이며 이항대립적이지 않고 다수적이며,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들뢰즈의 ‘다형도착적 섹슈얼리티’ ‘[몰적(mole)이 아니라]분자적(molecular) 여성’ ‘기관없는 신체’와 같은 형상화로 표현된다.
특히 들뢰즈는 여성-되기를 특정종류의 페미니즘 비판을 위한 것으로 이용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페미니스트들은 주체 ‘여성’을 일반화하고, 변형과 변신을 꾀하기보다는 변신으로 해소되는 것을 거부하는 ‘몰적(molar)’ 주체들이다. 페미니즘은 구체적인 권리와 자격을 주장하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는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비판한다. 니체에게도 페미니스트들은 노예의 도덕성을 가진다.
그러나 브라이도티에게 이러한 들뢰즈의 입장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진정한’ ‘여성-되기’를 주장함으로써, 성들 간의 대칭을 제안하며, 이 두 성에게 동일한 심리적, 개념적 해체적 여성을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칭의 주장은 이리가레에 의해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나로스는 [들뢰즈의] 여성-되기는 나의 정체성,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정체성을 짓는(cultivate)것에 관한 것이다. 들뢰즈에게 여성-되기는 그가 태어날 때는 아니었던 것으로 되는것에 해당한다. 내가 자연, 신체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것이라면 (즉 서구문화가 경멸했던 가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것이라면), [반면] 들뢰즈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 즉, 그에 따르면 나의 기원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관계하지 않는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이 되는 것은 가능하고 또 적합한 일이 된다. 여성-되기에 있어서, 이것이 남성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성과 관련한 전형적인 것들을 가지고서 가능할까?...물론 그의 입장을 예상할 수는 있다. 자신의 전통적 남성적 정체성을 흔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그런 생각을 당시의 여성 해방 운동의 성공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여성-되기의 의도가 의심된다. 그것은 여성이 얻은 성공을 전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뤼스 이리가레, “Becoming Woman”, 79.
그러면서 이리가레는 남성철학자들이 ‘여성-되기’는 그만하고 ‘새로운 남성’이 되어야 함을 주장.
2. 브라이도티의 여성-되기
우리는 주권을 부여받은적 없는 [여성]주체성을 [들뢰즈가 주장하는 식으로] 해체할 수 없다. 주체의 죽음을 알리려면 우선 주체로서 발언권을 얻었어야 한다. 나는 들뢰즈가 여성 페미니스트 관점의 역사적, 인식론적 특수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일반적 ‘여성-되기’를 가정하는 모순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한다. 성차를 인정하지 않는 차이에 대한 이론은 [문제적이다.](163)
소수자-되기는 소수자들에게도 과제이다. 소수자들은 너무 자주 주인의 마비시키는 응시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주인을 증오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 [...]그러나 실제 소수자에게 ‘소수자-되기’의 패턴은 다를 수 있다. 여성, 흑인, 청년, 탈식민주체, 이주민, 망명자, 노숙자 등은 우선 고정된 위치를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의 단계를 거쳐야 할 수도 있다. 이는 필연적이고 필요하다. 왜냐하면 결코 가져보지 못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통제할 수 없었던 주체 위치를 유목적으로 배치할 수도 없다. (166)
- 곤충/여성/지각할 수 없는 것 되기
- 철학자들의 곤충과 과학자들의 곤충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배수아 역, 봄날의 책,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