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한 정부 수립 후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
→ 38도선 부근에서 남북한의 잦은 무력 충돌
- 공산통일을 위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얻어냄
- 미국의 '애치슨 선언' : 태평양 지역의 공산주의
방어선에서 남한이 제외됨
→ 북한은 전쟁을 해도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 판단
- 전쟁 시작 3일만에 북한군이 서울 점령 및
국군은 낙동강 일대까지 후퇴,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됨
-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 파병 결의,
16개국이 남한을 돕기 위해 참전
- 낙동강 방어선을 버티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되찾음
- 10월부터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시작,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
-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
서울을 뺏기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1.4 후퇴)
- 이후 다시 서울을 되찾고(1951.3.14.)
38도선 부근에서 계속 밀고 밀리는 전투가
진행됨
→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전투가
2년 정도 계속됨
- 소련 측의 정전 협정 제안, 미국이 수용
→ 협상 과정에서 군사 분계선 설정 및
포로 송환 방식 등으로 타협 결렬
- 이승만 정부에서 정전에 반대하며 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를 석방
-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 체결
→ 중립국 감독 위원회, 군사 정전 위원회,
비무장지대(DMZ) 설치 합의
-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및 경제 원조 등을 약속 받음
- '국민 보도 연맹 사건' : '보도연맹'의 회원들을
전쟁 중에 국군과 경찰이 학살.
- 거창 양민학살사건 : 북한군 일부와 남한의
무장 게릴라(빨치산)를 국군이 소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함
- 영동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 미군이 피신해
있던 마을 주민들을 노근리 일대에서 학살
- 북한군의 '인민재판' : 사람들을 선동하여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공개 처형
전쟁의 결과와 영향
1) 황폐화된 한반도
- 군인, 민간인을 합쳐 수백만 명이 사망
(수치가 통계마다 다름)
- 농촌의 황폐화로 인한 식량 생산 급감,
산업 기반 시설의 파괴
2) 이념 대립의 심화
- 민족 동질감의 약화와 적대감의 심화,
남북한이 서로 군사력 증강 경쟁
- 북한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김일성의
정치적 경쟁자 숙청, 남한은 ‘반공’을
강조하며 이승만 정부의 독재 정치 강화
3) 사람들의 생활 변화
- 전쟁 후 도시 중심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 심화, 판자촌 등의 형성
-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와 가족 공동체의
해체,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역할이 강화
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