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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역사와 문화(10)

강원의 국방과 교통 문화

E- LEARNING

강원도의 관방유적

성곽

강원도의 시대별, 항쟁 대상별 관방유적

각각의 축조 배경과 시대적 상황

우리나라의 관방 유적

-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로 불릴 만큼 산성이 매우 많음.

- 강원도에도 매우 많은 산성이 분포하고 있으나, 축조시기와 성격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산성들이 많음.

-> 처음 축조된 이후 지속적으로 보수, 개축되거나 후대에 재이용되었기 때문

- 성은 적을 방어하고, 교통로를 통제하는 기능

따라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에 축조

우리나라의

관방유적

한국의 성(제2부)

강원도의 관방유적

삼국시대 이전

삼국시대

강원도의

관방유적

신라통일기

고려시대

고려말기

조선시대

삼국시대 이전

- 강원도 각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지명이나 전승 자료에 의하면 강릉의 예국토성, 춘천의 맥국토성, 철원의 토성 등

- 예국토성 : 강릉의 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확인이 어려움.

- 맥국토성 : 우두산성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고고자료로 입증된 바 없어 불확실

- 철원토성(강원도기념물 제24호)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토성

1. 주위가 논과 도로로 개발되면서 파괴되어 일부 구간만 잔존

2. 남아있는 토성벽이 직선이므로 원래의 형태는 평면방형으로 추정

3. 평면방형의 평지토성이라는 점에서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 중국 한나라 군현의 영향

삼국시대 이전

삼국시대

- 삼국시대 들어와서는 삼국 간의 전쟁 때문에 토성과 산성이 많이 축조

- 그러나, 시굴 및 발굴이 이루어진 산성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산성은 지표조사만 이루어짐.

- 그 가운데 강릉 지역과 그 관할 지역(당시 명주와 직속 관할 속현)에서 삼국시대의 산성, 토성들이 확인

- 현재 고고학적 조사를 거쳐 신라 유물들이 출토되어 신라산성으로 밝혀진 것은 양양 후포매리산성, 정선 송계리산성, 정선 고성리산성,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의 4개 뿐

삼국시대

양양 후포매리산성

- 동해안의 석호인 포매호에서 서쪽 내륙으로 다소 들어간 위치의 높은 산봉우리에 입지한 테뫼식 산성

- 성벽은 할석과 흙을 섞어 덮었는데, 이러한 수법은 경주 월성 등에서 보이고 있음.

-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9주 가운데 명주(지금의 강릉)가 직속으로 관할하는 현인 동산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

-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진흥왕 이전에 축조된 신라산성 중 가장 북쪽에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큼.

양양 후포매리산성

1. 학술자료 : 양양 후포매리 신라 산성의 고찰

A Study of the Hupome-ri Silla fortress in Yangyang-gun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50025

2. 기사 자료 : 양양 후포매리 고분군에서 신라 앞트기식돌방무덤 확인

https://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25107

정선 송계리산성

- 정선군 임계면 송계리산성은 강릉, 동해, 정선, 삼척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

- 송계리산성은 강의 남쪽 강변에 위치한 산에 입지하고,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에서 정선군 신동읍의 고성리산성을 비롯한 남한강 상류지역 산성들의 입지와 공통점을 보여줌.

- 송계리산성이 위치한 이 지역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명주(지금의 강릉)에 속한 직속 영현 가운데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인 동제현으로 추정

- 이 점에서 임계면은 신라시대에도 교통로로 기능하였고, 강릉 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권에 속하였던 것으로 판단

정선 송계리산성

정선 송계리산성 및 고분군(강원도 기념물 제70호) 소개자료(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ccbaKdcd=23&ccbaAsno=00700000&ccbaCtcd=32&ccbaCpno=2333200700000&ccbaGcode=CA&ccbaBcode=03&ccbaMcode=02&culPageNo=25&header=div&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DivList.do&pageNo=1_1_3_0

정선 고성리산성

-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산성은 남쪽의 배후 산지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는 돌출한 봉우리에 입지

- 처음에는 목책이나 토루로 된 산성이었다가 이후 석축으로 개축

-> 고구려의 남하 또는 신라의 북진 시기와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

- 고구려가 이 산성을 처음 축조하였더라도 산성 내에서 출토된 신라 토기들로 볼 때 신라산성으로 기능하였으며 신라의 남한강 방어체계에 속한 산성으로 볼 수 있음.

정선 고성리산성

정선 고성리산성(강원도 기념물 제68호) 소개 자료(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200680000&pageNo=1_1_1_1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

- 동해 바다와 경포호 출입부의 곶에 입지한 테뫼식 산성

- 토성의 발견으로 신라가 동해안 연안 항해를 하였고, 석호를 항구로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됨.

- 이를 통해, 동해안의 석호는 작은 배가 정박하기에 좋은 항구의 기능을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석호의 출입부에 어선이 정박하는 강릉 경포호가 신라시대에도 가장 최적의 항구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

- 신라가 경포호라는 좋은 항구를 가진 강릉을 고구려와 교섭하기 위한 중간 거점이자 배후 기지로 육성했음을 추정

-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450년에 하슬라 성주가 실직(삼척)에서 고구려 변장을 살해하는 기사가 있어 하슬라에 성이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강문동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와 동일한 시기이므로 강문동토성이 하슬라성일 가능성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

학술자료 : 강릉 강문동토성의 축조기법과 성격

Construction Techniques and Characteristics of Gangmundong Earthen Fortress in Gangneung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82053

축조 양식의 차이

- 하슬라(강릉) 지역의 성인 동해안 쪽의 강문동 신라토성, 후포매리 신라산성은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정선군 임계 송계리산성 및 신동면 고성리산성과 차이

-> 전자는 성벽을 축조할 때 토루에 할석을 피복하거나 다양하게 기단부를 정지한 토성의 형태이나 후자는 석축으로 성벽을 축조

- 이러한 축조양식의 차이를 통해 신라가 지금의 동해안인 강릉 지역에서 서쪽 내륙인 정선 방향으로 진출하는 방향성을 추정

- 한편, 백두대간 서쪽의 임계 송계리산성과 신동읍 고성리산성의 입지는 남한강을 따라 남쪽 강변의 산에 배치된 신라의 다른 석축 산성들과 동일한데,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영월읍의 정양산성과 대야리산성, 단양의 온달산성과 적성 등으로 이어지고 있어 동일한 목적의 군사적 방어체계 속에서 생각할 수 있음.

- 이런 유형의 산성은 강을 끼고 있는 길과 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는 위치에 입지하므로 남한강과 주요 교통로를 통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

- 이로 보아 삼국시대에 강원도 지역이 남한강 상류를 따라 군사적으로 중요한 접경지이자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음.

축조 양식의 차이

신라통일기

- 신라통일기를 전후하여서는 영월 정양산성, 양양 임천석성, 고성 화진포 고성산성, 춘천 봉의산성 등이 축조

- 영월 정양산성은 신라가 축조한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석축성으로 평가되는 보은 삼년산성에 필적하며, 신라시대에 축조되어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

신라통일기

영월 정양산성(사적 제446호) 소개자료(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_kdcd=&s_ctcd=32&ccbaKdcd=13&ccbaAsno=04460000&ccbaCtcd=32&ccbaCpno=1333204460000&ccbaLcto=35&culPageNo=1&header=region&pageNo=1_1_3_0&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RegionList.do&assetnamel=

고려시대

- 지역의 토착세력이 자신의 근거지를 둘러싸는 행정적 군사적 거점산성을 축조

- 평면 형태가 말발굽형으로 형성된 자연적인 산능선을 성벽으로 이용, 산능선인 성벽 상면을 평탄하게 깎음.

- 삼척 호산리성지, 동해 심곡리성지 등이 대표적

고려시대

외적의 침입과 관련한 산성유적

기사자료 : 11세기 동해안 약탈한 동여진해적…우산국 멸망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9

- 동여진 해적의 침입

가. 목종 8년(1005년) 등주(강원도 안변)를 습격한 이래 거의 100여 년 동안 동해안 바다로 침입하여 약탈

나. 고려 정부는 동해안 지역에 수군과 병선을 배치하고, 연안 지역에 성곽을 축조하면서 동여진 해적의 침입을 방어

- 이 때문에 태백산맥 동쪽 지역이 고려시대에 군사지역인 동계로 편제

- 이와 관련된 성곽 유적으로 강릉 고려성 등을 들 수 있음. 또한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빨리 탐색하고, 마을 주민을 대피시키며 필요시 해적들과 전투를 하기 위한 전방 초소인 수를 바닷가의 곶과 같은 지점에 설치(강릉의 해령수, 사화수, 고성의 죽도수 등)

외적의 침입과

관련한

산성유적

강릉고려성(강원도 기념물 제79호) 소개자료(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200790000&pageNo=1_1_1_1

거란과 몽골의 침략

- 거란의 침략

가. 거란족이 세운 요가 여진족이 세운 금에 의해 멸망한 후, 몽골이 발흥하여 금의 세력이 약화되자 거란족이 각 지역에서 반란

나. 이들 거란족이 1216년에 몽골군에게 패하여 동쪽으로 쫓기다가 금나라 군대에게도 패하자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침입

다. 춘천, 원주, 횡성, 제천을 약탈하다가 김취려 장군에게 패한 후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진입하여 또 다시 약탈

라. 이후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격에 밀려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도망

- 몽골의 침략

가. 몽골침략기 몽골은 강원도에도 침입, 철원, 춘천, 양양, 삼척 등지에서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

나. 특히, 춘천 봉의산성에서는 몽골군에게 포위되어 결사항전하다가 전원이 몰살

다. 각 지역의 군관민은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인제 한계산성, 설악산 권금성, 동해 두타산성 등 계곡을 낀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

거란과 몽골의

침략

설악산에 만든 철통요새...'한계산성' 사적 지정 / YTN

고려말기

- 고려말기의 국제 정세

가. 왜구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

나. 동아시아 3국의 혼란기로 중국은 원명교체기, 일본은 천황이 두 명이던 남북조시대, 고려도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시기로 매우 불안정

- 왜구가 본격적으로 노략질을 시작하는 것은 1350년부터

- 고려사의 기록

가. 왜구는 많을 때는 5백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구성하여 침입

나. 강원도 해안의 전 지역을 침입, 1382년부터는 점차 내륙으로 진출하여 강원도 전 지역을 유린

- 고려말 조선초에 정부는 왜구를 방어하고자 수군 기지인 삼척포진, 안인포진, 연곡포진, 속초포진 등을 설치

고려말기

40여 년간 500회 고려를 침략한 왜구

조선시대

- 임진왜란의 발발로 왜군이 강원도로 진출

- 그 과정에서 동해 두타산성에서 왜군과 격전

- 원주 영원산성에서는 원주 목사 김제갑이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

- 평창 노산성에서도 평창군수 권두문이 왜군과 싸움.

- 임진왜란 때 왜군은 우리나라의 남해안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왜성을 곳곳에 축조, 강원도 철원 지역에도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부대가 축성했다고 하여 가등산성으로도 전해오는 철원 성산성에서도 왜성의 축조수법이 보임.

- 조선 말기에는 일본군에 저항한 민용호의 의병부대가 강릉 대공산성에 주둔

조선시대

강릉 대공산성 소개자료(디지털 강릉문화대전)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eung&dataType=01&contents_id=GC00300128

봉수대

삼국시대의 봉수대

고려시대의 봉수대

조선시대의 봉수대

봉수대

삼국시대

- 고대에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군사적인 통신수단으로서 봉수제를 운영

- 불과 연기로 신호하는 봉수제는 그 구체적인 시행 방식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봉화’나 ‘봉현’ 등의 용어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봉수제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강원도 지역에서 고대의 봉수노선이 어떻게 개설되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시기 불명의 봉수터가 다수 남아 있음.

- 특히, 춘천의 안마산과 금병산(진병산이라고도 함)에서는 봉수대 흔적과 함께 주변에서 통일신라기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어서 고대에 봉수를 설치해 운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춘천 봉의산성(처음에는 우두산이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기점으로 안마산 → 금병산(진병산)을 통해 홍천 방향으로 연결되었다가 이곳에서 횡성 → 원주를 거쳐 충청도 → 경상도 지역을 통해 경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

삼국시대

고려시대

- 봉수는 변경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이나 또는 변경의 진영에 알리는 통신체제로 주로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하여 운영

- 우리나라에서 군사적 목적에 입각한 봉수제도의 존재가 확실히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고려 중기 이후이며,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봉수제는 더욱 정비되고 강화

-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고려 현종 때, 최사위가 현종에게 “성지를 수축하고 봉수를 삼가하여 그 변을 관망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고기록이 있으며. 현종도 이러한 건의에 따르고 있는데, 이로 본다면 이미 고려에서 봉수체제를 갖추어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고려의 봉수제는 12세기 중엽인 1149년(의종 3)에 이르면 더욱 체계화되어 일상적인 관리체계가 확립

->변방에서의 긴급 정도에 따라 각기 1~4단계의 신호체계가 설정되었고, 각 봉수대 관리를 위해 방정 2인과 백정 20인을 두고 각기 평전 1결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음.

- 고려의 봉수체계는 몽고와의 오랜 전쟁으로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가고 거의 전 국토가 전장화되면서 기존의 봉수체계는 와해되었으나,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증가하면서 다시 재정비

- 강원지역에서의 봉수노선망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왜구에 대비하여 각지에 수축한 산성을 중심으로 상호간 봉수를 통한 신호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

고려시대

조선시대

- 조선시대 봉수는 중앙은 병조의 무비사가, 지방은 감사·수령과 병사·수사 등 모든 군사책임자가 업무를 감독

- 조선시대 봉수로는 대체로 본선 5개가 있고 모두 한양의 목멱산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음.

가. 동북으로 두만강변의 경흥선(서수라),

나. 동남해변의 동래선(다대포진),

다. 서북 압록강변에서 시작되는 강계선(만포진),

라. 서북 압록강변의 의주선(고정주),

마. 서남해변에서 시작되는 순천선(돌산도)

-> 여기에 간선이 연결

조선시대

조선시대 통신네트워크 봉수의 신호체계

강원도의 봉수대

- 강원도의 봉수로

가. 16세기 경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준으로 할 때 함경도 경흥으로 연결되는 본선과 동해안 지대에 간선이 있었으나,

나. 18세기경이 되면 경흥으로 이어지는 본선에 속한 평강·회양·철원·금성의 봉수대만 존속하고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간선망은 모두 폐지

- 강원도에서 올라가는 봉수는 함경도 방면에서 전달해 오는 봉수와 함께 한양 명철방의 동원령에서 받게 되어 있었으며 양주 아차산 봉수와 서로 응하게 하였음.

-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강원도 봉수대는 모두 50개소(철원 2개)

강원도의 봉수대

역원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삼국시대

- 고대의 교통로는 각지에 거점으로 축조한 산성과 밀접한 관련성

- 영토가 확장되고 지방지배체제가 정비되면서 각지의 산성은 교통로를 따라서 서로 연결되어 간선 교통로를 구성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왕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심방어체제를 갖추게 됨.

- 국가적으로 관리되는 관도는 왕경과 지방을 연결하는 공용도로로, 문헌기록상으로는 아달라왕(154∼184) 대에 개척되었다는 죽령로와 계립령로가 있음.

- 신라의 우역 설치에 관한 기록

가.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년(487) 3월조에 “사방에 처음으로 우역을 설치하고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라고 기록이 있음.

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경주 인근으로 추정되는 건문역, 곤문역, 감문역, 간문역, 태문역의 오문역 명칭과 굴헐역, 욕돌역, 경도역 등의 명칭도 보임.

- 고구려의 경우는 우역설치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평양에서 국내성까지 17개의 역이 있다고 기록

- 이러한 우역 설치와 역의 존재는 국가에서 일정한 규정에 따라 도로망을 관리하고 인적·물적 이동과 운송에 활용하였다는 것을 의미

-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지방행정체제가 정비되어지면서 대체로 신라 왕경을 중심으로 6개 방향의 대로로 개설

-> 강원도 지역으로 연결되는 길은 왕경서로를 따라서 삭주로로, 왕경북로를 따라서 이어지는 명주로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

고려시대

-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개경에 수도를 정하게 되자, 이제 개경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교통로를 정비해 나갈 필요성이 제기

- 고려시대 역로의 정비는 물론 그 중심지는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삼국시대의 역참조직을 바탕으로 재정비했을 것으로 추정

- 고려의 역은 육로 교통로상에 설치되어 중앙과 지방 그리고 외국과의 신속한 전명을 행하는 것은 물론 사신 왕래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도록 영송을 지원하는 것 등이 주요 기능

- 전국의 역로는 산예도, 금교도, 절령도, 흥교도, 흥화도, 운중도, 도원도, 삭방도, 청교도,

춘주도, 평구도, 명주도, 광주도, 충청주도, 전공주도, 승라주도, 산남도, 남원도, 경주도,

금주도, 상주도, 경산부도 등 22개 역도로 편제

-> 이 중 강원도 지역과 연결된 역도는 5개 노선

가. 도원도 : 개성~장단~마전~철원~김화~평강~금성~회양에 이르는 역로

나. 삭방도 : 안변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덕원~문천~고원~영흥~정평에 이르는 역로와

남쪽으로 안변~흡곡~통천~고성~간성에 이르는 역로

다. 춘주도 : 춘천을 중심으로 가평, 낭천(화천), 양구, 인제를 잇는 역로와, 춘천~홍천~횡성

으로 이어지는 역로

라. 평구도 : 서울에서 동남으로 평구역을 출발, 양근~지평~여주~원주~제천~영월~평창,

또는 제천~단양~영주~안동(또는 봉화)에 이어지는 역로와 여주~충주를 통해서 제천이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역로

마. 명주도 : 강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양양까지, 서쪽으로 대관령을 넘어 평창~횡성에,

남쪽으로 삼척~울진~평해, 또는 삼척~정선 여량까지 이어지는 역로

조선시대

- 조선왕조는 개창 이후 기존 고려의 제도를 바탕으로 교통·통신제도를 새롭게 정비

-> 1394년(태조 3) 8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조선왕조는 도성과 외방의 도로망을 개설하고 도로기능의 활성화를 도모

- 전국으로 뻗은 외방도로의 기점은 처음에는 창덕궁 돈화문

가. 돈화문에서 각 성문으로 길이 갈라지고 다시 각 성문에서 전국으로 도로망이 개설

나. 그 후 도로의 원표는 경복궁 광화문 앞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도로망과 거리수가 계산

- 서울에서 외방으로 뻗은 외방도로는 그 멀고 가까움에 의하여 대로·중로·소로로 나눔.

가. 당시 대로는 한양~개성, 한양~죽산, 한양~직산, 한양~포천에 이르는 4개 도로이며,

나. 중로는 이 4대로와 연결된 개성~중화, 죽산~상주·진천, 직산~공주·전주, 포천~회양, 한양~양근 도로였으며,

다. 이들과 연결된 외방의 각종 도로가 소로

- 강원도의 역로

가. 강원도의 대로는 한성~김화~안변~함흥을 잇는 한성~서수라대로와 한성~양평~원주~강릉을 잇는 한성~평해대로

나. 이들 두 주선에서 춘천~양구, 홍천~인제, 원주~정선의 3개의 지선이 분지

다. 이들 지선은 각각 춘천, 인제, 영월을 경유하여 동해안의 해안선에 도달, 해안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역로와 교차

조선시대

강원도의 역로

강원도의 역참

조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운

삼국시대

-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수군을 운용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어 수로를 활용하였다는 것을 짐작

가. 289년(유례니사금 6)에는 왜의 침범에 대비하여 주즙을 수리한 기록이 보이며, 467년(자비마립간 10)에는 전함을 수리하도록 한 기록도 보임.

나. 583년(진평왕 5) 선부서를 설치

다. 678년(문무왕 18)에 선부를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이제부로 고쳤다가 혜공왕대에 다시 옛 명칭대로 선부로 함.

- ‘선박’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은 대개 국가적인 군사용 배의 제조 내지 통제였을 것이며, 이러한 선부의 존재는 수군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

- 특히, 배의 건조나 항해에는 축적된 기술이 필요하므로 배의 효과적인 운용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확보한 뒤, 해상교통의 관문인 남양만에 해상군사요지로 당항성을 쌓고 활발히 해상활동을 전개

- 특히, 신라 말기에 활발한 해외활동과 청해진 장보고의 해상활동 등에서 신라 수군의 활동을 알 수 있음

고려시대

- 조운은 다른 말로 조전·조만·해조라고도 부르는데, 내륙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 수운 또는 참운이라고 하여 해로를 이용하는 해운과 구별하여 부르기도 함.

- 조운제란, 지방 군현의 세곡 수납에 있어서 일정한 지점(조창 설치 지점)을 중심으로 구역을 획정하여 수납한 세곡을 국가가 설치한 조창에 모아서 적치하여 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국가가 관리 운영하는 선박으로 수로나 해로로 수도에 설치한 경창으로 운송하는 체제

- ​고려​​의 기록을 보면 고려는 국초부터 조운창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가. 어느 시기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성종대 이전에 고려에서는 13개 조운창을 설치해 운영

나. 이 가운데 12개 조운창은 남도의 연해와 내륙 강안 지역에 설치하였고, 나머지 1창은 서해도의 장연현에 설치

다. 충주의 덕흥창과 원주의 흥원창만 내륙 수로상에 위치한 수운조창이고, 나머지는 모두 해로를 이용하는 해운조창있다

원주 흥원창 소개 자료(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045

조선시대

- 조선왕조는 지배질서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재정적 기반 확충에도 주력

- 지방에서 거두어 배를 통해 서울로 옮기는 세곡은 조선시대 최대의 물동량이었으며 국가재정의 근간

- 광흥창을 비롯한 경창은 전국에 흩어진 10개의 조창에서 실어온 세곡이 모이는 국고로서 이곳에서 관리의 녹봉과 국가 운용에 필요한 재정이 지출

- 조운은 크게 해운과 수운으로 구분

가. 초기 조선은 고려를 계승하여 서해안 남해안 요소에 몇 개의 조창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해운에 역점

나. 그러나 험난한 항로가 다수 존재하였고 당시 항해기술로 이 같은 지형조건을 극복하기 어려워 낙동강과 한강을 경유하는 수운으로 보완

다. 해운에 의해 세곡 운송을 하는 전라도와 달리,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의 가흥창을 통하여 서울의 경창에 옮겨지게 됨.

- ​경국대전​​의 반포로 9개의 조창제가 정리

가. 아산의 공세곶창에서는 충청도, 충주의 가흥창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 함열의 덕성창과 나주의 영산창 그리고 후에 새로

이 설치된 영광의 법성창에서는 전라도,

나. 원주의 흥원창과 춘천의 소양강창에서는 강원도, 배천의 금곡포창과 강음의 조읍포창에선 황해도 세곡을 수납하여 운송

다. 경기 여러 읍과 회양·금성 등은 경창에 직접 납부

조선시대

조운체제의 변화

- 조선전기의 조운체제는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조운량이 중가하자 기존의 조운시설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운용방식을 모색

-> 지토선·경강사선·주교선·훈국선 등을 이용한 운송방법

- 조선후기에 와서는 개인소유의 경강사선이 조운의 대부분을 담당

->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에 따른 세곡의 증가와 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경강사선을 이용한 조운은 크게 증가

- 개항 이후 서양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수송 선박을 기선으로 대체함으로써 어느 정도 조운의 원활을 기할 수 있었으나,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세곡수송이 불필요하게 되자 조운제도는 폐지

조운체제의 변화

강원도의 조운

- 강원도의 조세는 세 가지 경로로 서울로 운송

가. 첫째, 회양·금성·김화·이천·평강·안협·철원 등은 서해안을 따라 경창에 직접 납부,

나. 둘째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흡곡·통천·고성·간성·양양 등은 춘천의 소양강창에 모아 북한강을 따라서 경창으로 납부,

다. 셋째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 등은 원주의 흥원창에 모아 남한강을 이용하여 운송

- 수로를 통한 운수에 있어서 강원도에서는 세곡의 운송 외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물자는 목재나 기타 토산물이었고, 실어 들여오는 것은 소금이 큰 비중을 차지

강원도의 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