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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의 민족 운동(1) : 무장투쟁과 의열투쟁

- 피와 죽음으로 독립을 외치다

1920년대 무장투쟁 (1) -

독립군의 형성과 전투 승리

1920년대

무장투쟁(1)

- 3.1운동 전후 국내외에 많은 독립군 단체 형성

1) 국내 : 천마산대(1919) / 보합단, 구월산대

(1920) 등

2) 국외

- 서간도 :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한단 등

- 북간도 : 국민회군,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등

→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교전,

관공서 파괴

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승리하다

귀중한

승리를

거두다

1) 봉오동 전투

- 1920년 5월부터 일본의 독립군 소탕 시작

- 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이 연합,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승리를 거둠

2) 청산리 전투(청산리 대첩)

- ‘훈춘 사건’ : 일제에 매수된 만주 지역의

도적떼가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을

살해 → 이를 구실로 독립군을 소탕할 병력

파병

- 추격해 오는 일본군을 북간도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격파

1920년대 무장투쟁(2)-

독립군과 동포의 수난

1920년대

무장투쟁(2)

1) 신한촌 사건(4월 참변, 1920.4.)

- 러시아의 혁명을 막는다는 구실로 일본이 연해주

및 시베리아 일대에 파병

- 러시아군에 의한 일본군 및 민간인 습격에 대해

보복으로 러시아와 연계된 조선의 민간인 및 항일

지도자들을 학살

2) 간도 참변(1920.10. ~ 1921.4.)

-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보복을 위해

만주에 존재하는 한인 지역사회에 파괴, 약탈,

방화, 학살을 자행

자유시 참변의 발생 (1921년)

독립군이

최악의

수난을 겪다

- 간도 참변과 일제의 공격으로 어려워진 여러

독립군 부대가 만주와 소련 국경지대에 집결,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후 러시아 영토인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

- 독립군 내부의 주도권 분쟁으로 분열 +

러시아군의 무장해제 요구에 불응한 독립군

세력이 러시아군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음

1920년대의 무장투쟁(3)

- 재건과 통합

1920년대

무장투쟁(3)

1) 3부의 성립

-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각각 설립

→ 한인 동포 사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면서 독립군

활동을 전개하는 자치 조직들

- 일제가 만주 지역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체결, 독립군 소탕 및 색출을 공동으로 전개

2) 통합운동

- ‘민족 유일당 운동’ 전개

- 국민부(남만주)와 혁신의회(북만주)로 통합

→ 국민부는 ‘조선혁명당’, 혁신의회는 ‘한국독립당'

으로 계승됨

의열 투쟁의 전개 - 의열단의 활동

의열 투쟁의 전개

- 만주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을 중심으로 조직

- 친일파 처단 및 식민 통치 기구 파괴가 목적

- 무정부주의 성향, ‘조선혁명선언’을 강령으로

삼아 활동

- 단원들이 황푸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 이수,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설립

의열 투쟁의 전개 -

한인애국단의 활동

한인애국단의 활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려움 + 일본군의 만주

침략 + ‘만보산 사건’ 등으로 인한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 악화

→ 임시정부의 침체 극복을 위한 ‘한인애국단’의 결성

- 이봉창의 일본 천황 폭살 시도(1932.1.)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1932.4.)를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 개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획득

-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이동

사진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