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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60 철학과 조은제
1-1. 유학을 가게 되다.
1-2. 유학을 가다.
1-3. 귀국하다.
의상의 전기를 싣고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숭고승전>,<백화도략발원문약해> 등 다양한 문헌이 있음.
-> 내용에 대해 많은 차이 발생
속성은 김씨 또는 박씨이며 의상법사는 아버지가 한신이며 성은 김씨임. 최고 귀족 신분인 진골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이 스물 아홉에 서울 황복사(1599)에서 머리를 깍고 중이 됨.
1차 시도(650) – 중국으로 가던 길에 첩자로 오인되어 잡혀있다가 겨우 빠져 나옴. 육로를 통한 첫 번째 입당의 시도는 실패됨.
2차 시도(661) – 원효는 한 고분에서 깨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리고 의상 혼자만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함.
당나라의 사신으로 본국에 돌아가는 사람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감.
처음에 양주에 머물다, 관아에 머무르게 되고, 조금 뒤에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서 지엄을 뵘.
그리하여 제자가 되어 현수와 함께 대고족으로서 화엄의 오의를 전해받음.
남산율종의 개조인 도선율사와 교유하고, 동문수학한 19세 연하의 법장과도 각별한 교분을 맺음.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 화엄종의 제3조로서 중국 화엄종을 교리적으로 완성했던 인물로 항상 의상의 학식과 덕망을 흠모함.
신라의 김흠순은 당나라에 와 갇혀 있었는데 고종이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는걸 알아챔.
신라를 치려 하니 김흠순이 몰래 의상에게 먼저 돌아가도록 권하므로 함형 원년 경오(670)에 신라로 돌아감.
문무왕 집권 신라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자 조정에서는 신인종의 고승 명랑에게 명하여 밀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기도하니,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음.
1-4. 화엄종 창설
1-5. 부석사의 창건
1-6. 의상의 제가 진정법사(제 9 효선편)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낙산이라 함.
팔부 시종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함.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염주가 한 꾸러미를 내어 의상법사는 받아가지고 물러 나옴.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자 의상법사는 받아가지고 나와 다시 이레 동안 재계하니 관음의 용모를 봄.
이로 인하여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법사는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남. 그 후 전국을 유람함.
국란을 구한 공으로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함. 이어서 의상은 열 곳의 사찰에서 교리를 전함. 이른바 ‘화엄십찰’을 창건함
의상은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언제나 허공을 밝고 올라갔으며 층게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놓지 않았음.
중악 공산(현 대구광역시 팔공산) 미리사
남악 지리산(현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강주(현 경상남도 합천시) 가야산 해인사
웅주 가야현(현 충청남도 공주시) 보원사
계룡산(현 대전광역시) 갑사
계람산 삭주(현 강원도 춘천시) 화산사
양주(현 경상남도 양산시)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옥천사전주 모악산(현 전라북도 전주시) 국신사
갱유한주(현 서울특별시) 부악산 청담사
의상은 부석사에서 40일간 일승십지에 대해 문답하고, <화엄일승법계도>, 행경십불, <화엄경>등을 강의함.
『법계도서인』(1630)과 「약도」를 지어 일승의 요긴함과 중요함을 포괄함.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10명의 제자(오진 · 지통 · 표훈 · 진정 · 진장 · 도융 · 양원 · 상원 · 능인 · 의적)가 있었는데 의상의 법계에서 나온 훌륭한 제자들임.
" 나는 벌써 하늘에 환생했다."
집이 매우 가난함.
태백산에 가서 의상법사에게 귀의함.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함.
의상 법사의 풀이를 듣고, 효도를 마친 후 출가해서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마음을 먹음.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화엄대전』을 강함. 다 마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말함.
중이 문간에 와서 절 지을 쇠붙이를 보시하라 하므로 어머니가 중에게 솥을 줌.
효도하지 말고, 출가하라고 함.
화엄사상의 큰 체계를 세워 일세에 교학을 융성하게 했고, 또 화엄의 법등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전해지게 한 교학의 횃불임.
또한 화엄사상과 미타정토신앙을 융합시켜 귀족적 성격이 강한 화엄을 대중 속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등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함.
3-1. 화엄
3-2. 이이무애법계
3-3. 행경십불설
3-4. <화엄일승법계도>
3-5. <법계도>
의상은 실천수행을 근본으로 삼음.
서민불교적인 아미타정토 신앙을 중시하는 데서도 잘 나타남.
-> 부석사에 무량수불을 모시기, 낙산에 관음진신주처의 도량을 개설 등
화엄사상의 근본인 원융무애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아미타신앙 · 관음신앙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함.
육상원융설을 보다 정교하게 확립, '이이무애법계'라는
독창적인 학설을 세움.
이무애·사무애·이사무애·사사무애의 4가지 무애를 말함
의상은 이치와 현상게의 궁극적인 일치라는 관점에서,
이치가 현상으로 드러나는 차별화의 원리를 이이무애법계로 고양시킴.
부처의 경지를 지혜, 즉 이론적 측면에서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해경십불설보다는 수행의 관점에서 논하는 행경십불설을 강조함.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일즉다다즉일’의 논리를 동전 10개를 세는 십전법의 비유를 들어 전개한 것도 의상이 최초이다.
현전하는 저술로는 <화엄일승법계도>·<백화도량발원문>·
<화엄일승발원문>·<투사례> 등이 있으며,
<입법계품초기>·<화엄십문간법관>·<아미타경의기> 등은 있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음.
-> 의상은 실천수행을 중시하여 원효와 달리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글.
화엄일승법계도 사진
당나라 지엄 스님 밑에서 화엄학을 공부할 때 <화엄경> 및 <십자론>에서 화엄원교의 종요를 간추려 칠언 30구 210자의 인권 안에 담은 것.
불교사상 가장 탁월한 저술 가운데 하나로 후세의 화엄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줌.
한국 화엄학의 주류를 이룬 의상의 법손들은
<화엄일승법계도>의 연구와 주석에 힘을 기울여
-> 지통의 <추동기>, 도신의 <도신장>,
법융의 <법융대덕기>, 진수의 <진수대덕기>·<법계도기총수록>, 유문의 <법성게과주> 등의 해석서가 신라·고려·조선을 통해 이어짐.
현수 법장의 화엄교학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침. 의상의 화엄교학을 법장의 것과 비교해 보면 이론보다 실천 방면을 더욱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한국화엄교학의 전통이 되었다. 의상을 법형으로 섬겼던 법장은 의상에게 서한을 보내왔는데 그 서한에서는
현수의 편지
대승의 교법을 포교했더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지엄의 문인 현수는 「수현소」를 찬술하여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고 아울러 서신을 보냈는데 내용이 은근했다. 그 서신에서 말했다.
서경숭복사 중 법장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의 시자(1613) 께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 년,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염두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연운만리에 바다와 육지가 첩첩이 싸여 있으므로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할 것을 한스럽게 여기오니회포 연연하여(1614)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1615) 에 인연을 같이했고 금세에 학업을 같이했으므로, 이 과보를얻어 대경(1616) 에 함께 목욕했으며, 특히 선사께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입었습니다. 우러러 듣건대상인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개연해서 법계의 끝없는 연기를 선양하고, 겹겹의 제망(1617) 으로 불국(1618) 을 새롭게 하여 이익 줌이 크고 넓다 하오니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불타가 돌아가신 후에 불교를 빛내고 법륜을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뿐임을압니다. 법장은진취(1619) 함에 이룸이 없고, 주선함에 도움이 적었는데,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선사께부끄러워 분수에 따라 공부하여 잠시도 놓지 않고, 원하건대이 업에 의거하여 내세의 인연을 맺고자 하나이다. 다만 스님의 장소는,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략하여 후인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우므로 이로써 제가 스님의 미묘한 말씀과 신묘한 뜻을 기록하여「의기」(1620) 를 만들었습니다. 근일에 승전법사(1621) 가 베껴서 고향에 돌아가 그것을 그 땅에 전할 것이오니상인은 그 잘잘못(1622) 을 상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