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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광서제, 캉유웨이가
함께 찍은 사진.
- “서양의 기술력뿐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의 지식인이 황제의
명으로 입헌군주제 도입 및 교육제도 개편
추진
- 당시 조카인 황제 뒤에서 실권을 잡고 섭정을
하던 ‘서태후’가 보수파와 손잡고 운동을 추진
하던 세력을 정부에서 쫓아나면서 실패
광서제 시기 섭정을 했던 '서태후'의 모습
의화단 단원의 모습.
창과 칼 등으로 무장하고
무술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활동도 했다.
- 민간 종교를 바탕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의화단’이 세력
확장, ‘부청멸양(청나라를 돕고 서양 세력을 없앰)’을
내세우며 봉기
- 초기에는 서태후를 비롯한 청 정부가 이들의 움직임을
지원했으나, 열강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청 정부는 열강과 협상하고 의화단 운동을 진압
- 1901년의 ‘신축 조약’ 체결 → 외국 군대의 주둔 허용,
청이 열강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되는 현상이 가속
8개국 연합군과
청 왕조의 '신축조약'
체결 당시 현장.
- “이제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왕조 자체가
위태롭다!” → 청 정부의 자체적 개혁 추진
- 각 지방 세력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군사,
재정, 교육권을 중앙으로 모으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추진됨(군사제도 개편, 과거제도
폐지, 교육기관 수립 등)
- 서양의 학문을 접하고 해외 유학을 경험하며
엘리트층이 새로 형성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손문)의 모습.
젊은 시절의
량치차오.
- 입헌파 : “헌법을 만들지만, 황제는 존재해야"
(량치차오 등)
- 공화파 : “새로운 사회 건설에 황제는 필요 없다”
(쑨원 등)
- 공화국 건설을 위해 쑨원 등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가 조직(1905)
- 청나라 정부는 군주의 전제정치와 국민의 기본권
일부를 규정한 ‘흠정헌법대강’을 발표(1908) →
입헌파와 공화파 양쪽 모두에게 비판
청나라의 내각에 임명된
고위 황족들의 모습.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을
진압하러 출동하는
사천성 신군의 행렬.
1) 1단계 :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
- ‘신정’의 추진을 위한 과도한 세금 징수, 전국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 표출
- 청나라 정부가 재정난의 타개를 위해 민간에서
투자, 운영하던 각 지역의 철도를 국유화하는
계획을 발표 → 전국적으로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이 발생
- 청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청 왕조 타도’로
방향성 전환
2) 2단계 : 혁명의 진행과 중화민국 수립
- 혁명에 찬성하는 군인들을 중심으로 우창(무창)
에서 최초 봉기
- 각 지역에서 호응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
혁명 세력에 의해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
되어 아시아 최초 공화국 ‘중화민국’ 수립(1912.1.)
- 당시 청 정부의 요청으로 혁명군을 진압하려던
군벌 ‘위안스카이’와 협상하여 대총통의 자리를
주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킴(1912.3.)
임시 대총통 취임 당시
쑨원의 모습(가운데)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본명 : 아이신기오로 푸이)
1) 러-일 전쟁 이전
-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치는 열강들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개혁의 기회 발생
- '자주 독립'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정부가
일정 정도 수용
2) 러-일 전쟁 이후
- 일제의 노골적인 한반도 식민화 정책과
국권의 상실 현실화
독립협회 창시자,
송재 서재필
-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왕비 민씨가 살해
→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
으로 피신
- 아관파천 이후 한반도 내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 '독립협회'가 결성(1896~1898)되어 열강의
이권침탈 반대 및 의회 설립 운동 전개
→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해체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군중들의 모습.(1898)
-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 상태, 고종의
귀환 여론이 커짐
- 국내외에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
하기 위한 ‘제국’의 선포, 고종의 황제 즉위
- ‘대한국 국제’의 선포(1899)와 ‘구본신참(옛
것을 기반으로 새 것을 참고)’의 원칙에 입각한
국내 개혁 실시
대한천일은행의 모습
(현 우리은행)
을사오적의 모습.
왼쪽부터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경술국치 때의 사진?
위에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획득
-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 국내의 항일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 전개 →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 한일병합조약(1910)으로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가 됨
- 청-일 전쟁 승리와 의화단 운동 진압을 통해
중국 진출 및 열강의 대열 합류 시도
- 러시아의 노골적 남하 정책에 대한 경계,
한반도 장악을 위한 결전 구상
포츠머스 조약 당시의 모습.
가운데 있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로 추정된다.
- 러시아의 남하 정책 추진으로 만주 및 대한제국
내에서의 영향력 확대 시도 →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으려던 일본과 충돌
-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의 지원
아래 일본이 러시아군을 격파
- 일본의 재정 악화와 러시아 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전쟁이 일단락되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이 한반도 내에서의 주도권 획득, 국제적으로
열강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됨
영국 조차지 위해위
- 을사늑약, 정미 7조약 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
외교에 대한 간섭을 심화
- 한일병합조약(1910)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
조선 총독부에 의해 한반도를 통치
-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편에서 독일에 선전포고
- 독일의 아시아 내 영토(산둥반도, 남태평양의 섬들)
점령
- 중국의 총통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의 요구'를 제출
(1915)하여 일부 수용
독일 조차지 자오저우만.
일본은 여기를 점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