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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전후 처리

- 동아시아 현대사의 시작점

전쟁 종결 전,

연합국들이 모여

동아시아 문제를 이야기하다

전쟁 종결 전,

연합국들의

회담

- 카이로 회담 (미국, 영국, 중국의 회담) : 1943.11. ~ 12.

- 얄타 회담 (미국, 영국, 소련의 회담) : 1945.2.

- 포츠담 회담 (미국, 영국, 소련의 회담) : 1945.7.

- 종전 : 1945. 8. 15.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

1) 카이로 회담

-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가 만나서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

- 일본에 대한 공동 대응 합의, 일본이 강제 점령한

지역 반환 요구

-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반도에 독립을 부여할 것을 합의

2) 얄타 회담

- 독일의 패망 가시화, 미국, 영국, 소련 대표가 회담을 개최

- 독일 항복 이후 연합국의 독일 4분할 점령에 합의

- 독일 항복 이후 2~3개월 내 소련의 대일 전쟁 참여 합의

포츠담 회담과 종전

3) 포츠담 회담

-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 마지막 남은 주적인 일본의

문제 처리를 위해 미국, 영국, 소련 대표가 회담 개최

-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대해 다시 요구, 카이로 회담의

합의 내용 이행 확인

4) 종전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 8월 9일 소련이 대일 전쟁 참전 선언, 만주 지역으로 군대

투입

- 8월 15일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포츠담 회담과 종전

종전 직후의 동아시아

전쟁 종결 후,

동아시아의

상황

1) 중국

- 항일 전쟁 종결 이후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간의 대립 본격화

2) 한국

- 해방 직후 미군과 소련군의 주둔 및

정부 수립 문제로 갈등 심화

3) 일본

- 패전 후 미군 주둔 및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 '평화 국가'로의 전환 시도

종전 직후의 중국

중국 -

쌍십 협정

- 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항복을 받는 문제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

-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지, 한편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충돌을 막기 위해 충칭에서 두 세력

간의 협상을 진행

- 1945년 10월 10일 국민당과 공산당 양 측이

‘어떤 일이 있어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약 (쌍십협정)

종전 직후의 한국

한국 -

두 개의 정부

- 해방 직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일본군의 영토를

점령해가던 소련군이 진주

- 국내에서 연합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구성원 문제를 둘러싸고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이 서로 갈등

-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

남한 정부(1948.8.)와 북한 정부(1948.9.)가

각각 수립됨

종전 후의 일본

일본 -

패전에 대한

처리

- 일제의 패전 후 미국이 도쿄에 ‘연합국 최고 사령부

(GHQ)’를 설치

- 1946년 ‘평화 헌법’의 제정 →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두고 군대 보유 금지 및 국민 주권 원칙을 명시

- 1946년 전범 처벌을 위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도쿄 재판)’ 개최

→ 북한과 중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입장

반영으로 실질적인 전쟁 범죄 처분에 소극적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1951년 미국의 중재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

-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 54개국이 초청,

일본의 조선 및 타이완 등에 대한 모든 권리

및 청구권 포기 서약

- 연합국에 대한 배상 책임은 미국의 적극적

개입으로 경감되거나 면제

- 이를 통해 일본이 국제 사회로 복귀하는

계기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