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2018.05.29
하나님의 야웨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구약 성경 외에도 많이 나오는데 두드러진 것만 몇 가지 들자면 메사 비문, 아랏 도편, 라기스 서신 그리고 키르벳 엘콤과 쿤틸랏 아요루드등이 있다.
이스라엘 외에도 신의 이름으로 야웨 혹은 야(yah)라는 말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많다.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누비아(Nubia, 현대의 수단)에서 주전 2000년기 중 땅의 ybw라는 말이다. 샤수는 같은 비문에서 세일 지역과 관련되어 있는 베두인이다. 이것은 미디안 족속인 이드로가 야웨를 예배하는 자였다는 성경의 암시(18장)에서 확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디안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으며 (창 25:2-4), 따라서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 배경을 결정하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몇가지 요인
1. 우리는 주전 2000년대 어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2. 출애굽기의 주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는 역사적인 언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던 시기와 관련이 있는 문서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발견된 것이 없다.
4. 출애굽기 저자가 이 사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그는 우선적으로 역사가가 아닌 신학자로서 기록했다.
신 현현과 소명이 제 3장의 첫 번째 단락의 형태를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혼합 기사에서 결정적인 것은 권위라는 주제이다. 시종일관 하나님의 특별한 이름의 계시와 묘사하고 있는 (13~15절)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 임무에 관한 기사는 출애굽기 3장의 혼합된 형태 속에 들어 있는 신 현현과 소명에 관한 기록만이 아니라 출애굽~구출(17,20절), 시내(호렙)산에서의 경배(18절), 망설이는 바로와의 대결(19~20절), 여호와의 임재와 크신 능력을 입증하는 큰 기적들(20절), 애굽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이 부요하게 된 것(21~22절)등의 주제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자료 비평가들은 이 구절들을 각기 다른 자료들에 귀속시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이름들이 번갈아 가면서 나올 뿐만 아니라 주제들을 이런 식으로 배열하고 또 이 주제들을 반복적이고 다소 일관성이 없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Beer는 (12) 13~15절은 E, E' 및 Es자료에 16~20절은 J2자료에, 그리고 21~22절은 J자료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Fohrer(Uberlieferung, 125)는 13~15절은 E자료에, 16~20절을 J자료에 그리고 21~22절을 N자료 (그가 설정한 ‘유목민’자료)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Noth(Pentateuchal Traditions, 267)는 13~15절은 E 자료로부터, 그리고 16~22절은 J자료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자료들을 분류하여 내린 결론, 즉 이 단락은 여러 자료들이 혼합된 것이라는 결론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왜 이러한 혼합기사가 만들어 졌는가? 그것을 묶어주는 강조점은 무엇인가? 또 무엇 때문에 이 단락이 현재 형태로 되었는가? 라는 등등의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권위’라는 단 한마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신 현현과 소명 체험이후에 모세가 제기한 본질적인 질문은 애급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또 실로 이스라엘이 시내(호렙)산에서 신 현현과 초청(또다시 임재와 응답)을 몸소 체험한 이후의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물음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한 가지 물음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것들이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현재 형태의 이 단락에서 얻을 수 있다. 이곳에 함께 나오는 일련의 주제들은 어쨌든 인류가 항상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 준다. 편집자가 혼합해 놓은 이 기사는 참으로 훌륭하다.
하나님의 활동과 섭리를 강조하는 이 문구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는 분’(Cassuto), ‘그 어느 곳에나 임재하시는 분’ (Vriezen, Abba),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마지막이 되시는 분’ (Zimmerli),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로 되는 분’ (Noth), ‘미래 활동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시는 분’(Childs) 등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말이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끊임없는 활동’을 강조한다는 의미를 뒷받침해 주는 여러 관련 구절들이 있다. 즉 ‘에흐예’라는 단어가 12절에 1회, 본 절에 3회, 그리고 15절에 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15절에서는 ‘여호와’ (예호와)로 표현되었으며, ‘여호와’는 ‘하야’의 3인칭 단수 미완료로 변형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구절들을 상세히 살펴보면 ‘스스로 있는 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항상 함께 있으며 만인의 눈에 드러나게 간섭하실 것이기에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중보자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활동의 통로가 되는 사역자이기에 중보자를 보내심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의미가 있다.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제시하신 ‘말씀과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13절에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실천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애굽의 우상 숭배에 오염되는(수 24:14) 등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제시한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기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을 기억하려면 그분의 이름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또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억해야 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는‘기억 공동체’다. 창조 때에 행하신 일과 출애굽 때에 행하신 일들과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정규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다. 영어에 ‘기억’(remember)이란 단어가 ‘다시’(re) ‘멤버’(member)가 된다는 것처럼, 역사 속에 이루어진 사건에 다시 맴버가 되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억이다. 특별히 교회는 말씀선포와 성만찬을 통해 이천년 전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 역사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사건의 멤버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기념 칭호와 이름을 함부로 의미 없이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것이 제 4계명의 참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