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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개성적인 표현으로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데 특징이 있다.
내용과 의미를 담는다고 주장.
민중
이다.
유진 스미스의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민중
유진 스미스는 이런
의 아픔을 사진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다소 어둡고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유진 스미스는 사진을 보는 이로 하여금 사회 현실을 정확히 알리려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사랑, 희망
을 확신하며
미래 지향적인 방향
을 표현한다.
18살 나이로 <뉴스 워크>지의 보도 사진가로 사지의 인생 시작.
이후 <라이프>로 자리를 옮겨 유진 스미스 사진에 큰 도약을 만들어 낸다.
<라이프>지에서 종군기자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취재, 이후 미국
을 대표하는 제 1급 보도사진작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떨친다.
오키나와, 이오지마, 괌, 사이판 등 태평양 전쟁의 전장을 돌아
다니며 미 해병대, 일본군 포로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유진 스미스의 강한 개성과 주장이 <라이프>지의 편집장과의
마찰로 그만 두게 된다.
수은 중독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신경학적 증상과 징후를 특징으로 하는 증후군이며, 이와 유사한 공해병을
미나마타 병
을 주제로 촬영한 작품.
일본 미나마타현에서
통칭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명칭.
일본 사진 저널 리스트에게 호평을 받았던 유진 스미스의 일본 활동 중 대표되는 작품이다.
1956년 일본 구마모토 현의 미나마타 시에서 메탈수은이 포함된 조개 및 어류를 먹은 주민들에게 집단적으로 발생.
문제가 되었던 메탈수은은 인근의 화학 공장에서 바다에 장류한 것으로 밝혀졌고, 2001년 공식적으로 2265명의
수잔 손탁
이라는 사진 비평가는 이 사진을 이렇게 평한다.
환자가 확인 되었다고 한다.
<라이프>지를 나와서 <매그넘>에 소속 되었지만, 한곳에 소속되기 싫어했던
"주민 대부분이 수은 중독으로 신체 장애를 일으켜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을 기록한 이
스미스의 성격때문에 1959년 <매그넘> 또한 탈퇴한다.
사진은 우리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고뇌를 기록했으며, 어머니 무릎위에서 온몸을 비틀
1970년대 들어서 스미스는 지금까지의 사진 활동을 마무리하는 회고전을 뉴욕에서
피에타
(성모
며 빈사상태에 있는 딸은 페스트의 희생자가 넘치는 세계를 찍은 한 장의
열고, 부인 미쇼고의 고향인 일본으로 간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있는 그림상)이다."
후에 일본의 미나타타 병을 집중 취재하여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으나, 1972년 공해
책임회사인 칫소가 고용한 폭력배에게 폭행, 척추손상 및 한쪽 눈 실명이라는 중상을 입는다.
그리고 그는 1978년 사진을 가르치다, 뇌출혈로 인해 사망한다.
사진과 글이 "단일한 표현상태"로 구성되어 독자들의 의식속에서 그 효과에 대한 합성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정확한 감각으로써 포토 저널리즘을 이해한 다는 것이다. 사진과 글의 관계가 단일한 표현매체로 주제사진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포토리얼리즘의 본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막연하다. 글은 언어 중에서 어떤 사실이나 사상, 감정의 표현을 질서있게 배열한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글과는 달리 시각적인 형태가 결코 막연하지 않다. 이는 시각적 구성이 결정하는 결과를 한번의 시각활동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진 스미스가 <라이프>지를 그만두게된 계기는 바로 <슈바이처> 때문이다.
글로 이루어진 저널리즘의 글은 독자들에게 재현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어려움을 시각적인 재현을 통해 풀어낼수있다.
당시 <라이프>지의 편집장은 <슈바이처>의 사진을 통해 성인이라는 의미를
두려고 사진 선택, 편집, 트리밍을 했다.
1. 저널리즘에서 사진은 사건의 재현을 우리에게 가장 밀접하게 가져다 주는 설명이다.
그로 인해 유진 스미스는 <라이프>지를 떠나 버린다.
2. 문자와 시각매체가 함께 의사 전달하는 특성을 포토 저널리즘이라 부른다.
당시 슈바이처를 찍은 유진 스미스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통사람,
3. 포토 저널리즘의 기본 구성은 글을 실은 사진이라 말할수 있다.
슈바이처의 생명경외 정신과 사랑을 중심
하지만
으로 찍은 것이라 말한다.
사진이 이와 달리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전쟁의 종군 사진가로 활동하며 찍은 사진.
1944년 7월,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미군의 맹공 앞에 일
본군의 전략적 요충지 였던 사이판이 함락.
당시 미군의 화염방사기가 내뿜고 지나간 동굴속에는 수많은 일본군 시
체와 민간인 시체가 가득했다.
속에서 유일하게 생존했던 한 아이를 병사가 안는 장면을 찍게 된다.
1944년 8월 28일자, "라이프"지에 게재된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2차세계대전의 수많은 사진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유진 스미스는 2차 세계대전 중 종군기자로 나가 수많은 전쟁의 비극과 순간들을 담은 사진
사진이라고 평했습니다.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에 의해 추진된 이 전시회는
인간가족전
전쟁의 상처를 뒤로하고 인간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인간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한다.) 전시된 마지막 사진
작가 였다.
이 단 한장의 사진 안에는
으로 유진 스미스가 세계 제 2차 대전시 부상을 딛고 일어나 처음 촬영한 사진이다.
전쟁과 생명에 대한 역설(Paradox)
이 존재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두 아이는 실제 유진 스미스의 아이들로써 아들인 팻과 딸인 와니타이다. 두 아이가
숲을 빠져나가 미래의 길을 걸어간다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통해 유진 스미스의 사진의 철학을 넘 볼수 있다.
"폭탄이 터지자 주위 수백미터 사방에 화염과 물, 사람과 무기들이 공중으로 엄
청나게 흩어졌다.
"미래"
"희망"
이다.
를 향하는
사람들을 소름끼치게 비참한 죽음이라고 치를 떨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다행인 죽음일지 모른다. 다만 한가지 끔찍한 것은 아직 젊는 나이에 죽
는다는 것이다."
-유진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