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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Pre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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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정새온

on 10 Novemb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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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Untitled Prezi

이완용
우리나라의 적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 출생 - 1926년 사망 (69세)
이완용의 경력사항
이완용 - 그는 누구인가?
이완용의 만행 - 독립운동 제압
이완용의 만행 - 의병 토벌
1910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
1910.08정부전권위원, 한일합병조약 체결
1907내각총리대신, 궁내부대신서리
1907의정부참정
1905.12의정대신, 외부대신서리
1905학부대신
1901궁내부특진관
1896아관파천시 친러파 활동,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
1882주서, 규장각대교, 검교, 홍문관수찬, 동학교수, 해방영군사마
1882증광문과 급제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친청,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밟다가 결국 친일파로 진로를 결정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한 매국노의 끝판왕.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이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매국노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앞장서서 팔아 넘긴 최악,최고의 매국노이다. 게다가 대세에 대한 감각은 뛰어났는지,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말이…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역시 희대의 매국노답다.
여기서 을사 5적[乙巳五賊]이란?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3.1운동은 친일파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할 정도로 그 여파가 컸지만
이완용은 오히려 독립운동을 제압하는 방법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것은 일제가 자신에게 준 힘과 지위를 지키겠다는 각오였다.
이완용은 3.1운동 때 독립 투쟁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연속 3차에 걸쳐 3.1 운동 경고문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3차 경고문에는 조선의 독립은 허망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완용은 조선인 헌병보조원제를 만들어 조선의병토벌에 이용하였고,
13도 의병연합군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의병장 허위의 처벌을 상소했다.
이완용의 과거
이완용은 가난한 선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살 때 먼 인척이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완용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고
과거에 급제하고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관직 진출 3년 만에 정3품에 도달했다.
세자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기도 한다.
육영공원은 신진 관료를 기르기 위해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인데
그곳의 미국교사 헐버트의 첫제자가 바로 이완용이다.

육영공원에서의 2년 만에 이완용에게는 꿈을 펼칠 기회가 찾아온다.
고종이 대미외교를 꾸리면서 그 팀에 이완용을 발탁한 것이다.
이완용은 또한 워싱턴에서 주미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정세에 눈뜨게 되고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된다.
이완용 귀국이 5년째 되던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그날 새벽 이완용은 일본 눈을 피해 알렌(당시 주한 미국공사관원)이
근무하던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날 이후 이완용은 일본에게 감금되어 있는 고종을 피신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1896년 2월 하순 새벽을 틈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다.

아관파천 친미파 이완용 등이 친러파 정치세력과 연합한 거사였다.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두터웠고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일본의 내정간섭에 대항하는 충직한 고종의 신하였다.
이완용은 언제부터
매국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러시아와의 갈등과 이완용의 위기
이완용은 러시아 공사관의 미움을 사게 된다.

러시아가 조선에 경제적 원조는 해주지 않고 군사교관만 파견하면서 정치적 확대를 시도하자 이를 이완용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의 실패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1898년 전북 관찰사로 좌천됐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파직될 뻔했다.

독립협회에도 한때 관여하였으나 외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그해 7월엔 아예 제명당하기에 이른다.
러일전쟁 후 재기에 성공
1904년 중국과 한반도를 무대로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일본은 예상을 뒤엎고 개전 1년 만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급부상하고 러시아는 한반도를 일본에 넘겨준다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재기를 준비하던 이완용이 고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계로 다시 진출한 것은 1904년 11월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고종은 일본의 간섭에 미국공사관에 피신할 계획을 세우면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를 바랬고 이완용 등용은 친미파로써
그러한 계획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빗나가게 된다.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을 체결한다.
이완용은 더 이상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재기를 원하던 이완용은 다른 힘이 필요했다.
여기서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란?
1905년 10월 러일전쟁 종전 직후에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 태프트 육군장관이 한국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맺은 비밀 협약. 이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함을 전제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미국이 묵인, 방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 출세를 위해 일본에 붙다 -
을사늑약 찬성 및 한일합방 서명
이 당시 이토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때앗기 위해 서울로 도착,
을사늑약 체결안을 내놓는다.
그때 이완용은 대한제국 주권이 달린 중요한 결정에서 을사늑약을 찬성한다.
이토는 이완용 덕분에 을사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완용은 결국 개인적 출세를 위해 일본에 붙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완용은 나라의 힘을 다시 키워 되찾으면 된다는 주장을 했지만,
결국 5년 뒤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주는
한일합방문서에 서명까지 한다.
대세가 일본에 기울었으니 일본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천엔 지폐에도 있는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인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완용 또한 이토를 존경했다.
이토가 있는 곳엔 이완용이 있었고,
이완용은 이제 고종과 대한제국과 완전히 결별하면서
이토의 동양평화론을 따르는 추종자가 되었다.
일본이 주창한 동양평화론은 조선이 아직 독립하기엔 약하므로
러시아나 다른 유럽으로부터 일본이 동양인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완용의 죄명
1909년 10월 큰 사건이 일어난다.
이토가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순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다.
당시 이완용은 안중근을 맹렬히 비난하며 이토의 시신이 있는 중국 대련으로 급히 달려간다. 일당기사에는 이토가 나의 스승이다 라고 적혀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완용도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지금의 명동성당에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23살의 청년 이재명은 단칼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하지만 이완용은 죽지 않았다.
체포된 이재명은 재판대 앞에서 당당했다.
이완용의 죄명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고 통감부를 설치케한 죄,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강제로 물러나게 만든 죄,
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한일 병합을 추진한 죄, 이완용이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것…"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이름
"이완용"
이완용이 친일로 얻은 땅은 전국에 걸쳐 있다.
이완용은 친일에 협조하면서 재산을 늘려나갔다.
한일합방 이후 은사금으로 지금의 30억원 규모를 받았다.
한일 신협약을 체결한 후 20억원을 또 받았다.
이렇게 이완용은 재물에 대한 집착 또한 강했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반역의 길을 놓지 않았다.
가진 것 또한 끝까지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1926년 이완용은 죽어서도 장례식이 화려했다.
하지만 이완용이 죽은 후 한 신문 사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렸다.'
'이제부터는 영원히 천벌을 받아야지.'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팔아 넘긴 이완용은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다.
이완용의 묘 (전라북도 익산)
감사합니다
10725이상록
다섯 대신. 즉,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을 일컫는다.

조선 말기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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