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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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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하

on 22 Jul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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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중국 영화의 역사

중국역사의 기원
중국 영화의 뿌리는 1908년 경극을 각색해 찍은 필름이었다. 그 후 1917년 난징에 영화사가 설립되면서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영화 제작사들도 하나 둘 설립됐다. 1922년에는 배우 양성 기관이 처음으로 개설되기도 했다. 그 무렵 유성 영화의 등장은 중국의 영화 산업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초기 유성 영화가 관객의 외면을 받은 이유는 중국 전역에 걸쳐 퍼져 있는 많은 방언들 때문이었다.




[1905년∼20년대〕
최초의 작품은 1905년 베이징에서 촬영, 제작된 경극《정군산》이다. 또 시나리오를 가지고 찍은 최초의 극영화는 13년 상하이에서 만든 《난부난처》였다. 이것은 부모의 의향에 따라 강제로 결혼하게 된 남녀의 희비극을 다룬 것으로 뒤에 중국 영화의 중요 테마 중 하나가 된 반봉건을 주제로 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한편 당시 영화는 영화 제작의 중심지인 상하이에서 상영된 서양영화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20년대에 들어서는 밍싱·톈이 등의 큰 제작사가 설립되어 제작이 활발해졌다. 당시의 인기 영화는 원앙호접파라 불리던 재자가인의 연애물과 무협영화였다.
〔일제점령기〕
일본이 37년부터 45년까지 중국에서 전쟁을 감행하는 동안 영화인 일부는 상하이를 떠나 다른 지방에서 항일영화를 만들었으나 대다수는 그대로 남아 활동하였다. 한편 41년 말 태평양전쟁 시작 전까지는 촬영소가 서양세력의 조계지내에 있었기 때문에 우의적인 항일영화 제작이 가능하였다. 이때 부완 감독 영화 《목란종군(1939)》이 만들어졌다. 이는 당나라 때의 여성이 북방의 침략자와 싸우는 내용의 소녀가극풍의 영화였는데 항일의 우의가 담겨 있었으므로 크게 성공하였다. 그 뒤 촬영소가 일본인의 지배를 받게 되자 중국국민에게 무해무득하고 주제가 불분명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감독자가 영화 내용에는 참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쉬웨이방 감독의 《추해당(1943)》 등과 같은 민족적 굴욕감을 통렬하게 표현한 걸작도 등장할 수 있었다.
〔제 2 의 황금시대〕
중·일전쟁이 끝난 뒤부터 중국이 성립될 때까지의 영화로, 국민당정부의 부패를 비판한 차이추성·정쥔리 감독의 《봄의 강이 동으로 흐르다(1947)》, 정쥔리 감독의 《까마귀와 참새(1949)》 등과 쌍후 감독의 부르주아적 지성코미디 《태태만세(1947)》, 페이무 감독의 연애심리극 《소성지춘(1948)》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화〕
49년 이후 영화는 초기에 모두 국유화되었고 사회주의 건설의 강력한 선전수단이 되었다. 초기에는 왕빈·수이화 감독의 《백모녀(1950)》를 비롯한 일련의 소박한 혁명선전영화가 제작되어 국제적으로도 소개되었다. 또 수이화 감독의 《임가포자(1959)》, 셰테리 감독의 《조춘이월(1963)》, 셰진 감독의 《무대자매(1965)》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작이 제작되면서 중국 영화는 제 3 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66년 무렵부터 약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기에는 기존의 영화들이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당하고 영화감독들이 추방되어 제작이 거의 중단되었다. 이어 혁명이 종식되자 영화제작 활동이 재개되었고 80년대에 들어서는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특히 문화대혁명을 비판한 영화로 셰진 감독의 《톈윈산이야기(1980)》, 쑨우·바이치밍 감독의 《사람, 중년에 이르다(1982)》, 바이천 감독의 《상하이에 놓인 다리(1983)》 등이 제작되었다. 한편 문화대혁명 이후 등장한 베이징영화학교 출신의 젊은 영화감독인 제 5세대 감독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예술영화의 표현양식에 민중성을 담고 자기동일성(identity)의 탐구라는 작품경향을 보여 주었다.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 《국두》, 천카이거 감독의 《황토》 《패왕별희》 등이 대표적이다. 80년대 이후 중국영화의 국제적 진출이 이루어져 《패왕별희》가 93년 칸영화제 그랑프리상을 받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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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의 역사
〔1930년대 황금기〕
31년 만주사변, 32년 상하이사변을 계기로 각본가 샤옌을 비롯한 좌익 영화인들이 적극적으로 밍싱·렌화 등의 영화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항일구국·반봉건·반매판자본의 주제를 담은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당시 작품으로는 농촌이 자본주의 시장원리로 어지럽혀지는 과정을 그린 정부가오 감독의 《춘잠(1933)》, 일하는 여성의 자립을 호소하는 작품인 장스촨 감독의 《지분시장(1933)》, 청년들이 항일을 위하여 도로공사에 참가하는 내용의 쑨위 감독 영화 《대로(1934)》 등이 있다. 한편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고 중국공산당과의 대결을 우선시한 국민당 정부에 의하여 직접적인 항일 표현과 좌익적 주제가 검열·삭제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홍콩의 영화〕
중·일전쟁이 종결된 뒤 과거 일본군이 점령했던 상하이의 거물급 영화인들이 반역자로 처형되는 것을 피하여 홍콩에 온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활동을 시작, 발전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이 <대륙성> 영화인들에 의하여 가부장적 질서와 유교적 세계관이 존재하는 무술영화가 자리잡았다. 당시 대표작으로는 《용문의 결투(1967)》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8)》 등이 있다. 70년대에 들어서 《당산대형(1971)》이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면서 브루스 리가 국제적인 대스타로서 자리를 굳혔다. 70년대 말에는 재키 쳰이 《취권》으로 인기를 모았고, 80년대는 《영웅본색》을 비롯한 여러 액션물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동양적 정서와 서구적 감성의 혼재, 유교적 세계관과 냉혹한 자본 논리의 공존, 화려한 총격전과 영화적 기교 등이 특징을 이룬다. 90년대는 정통 무술영화가 다시 대두하여 《황비홍》 등의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을 만든 쉬커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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