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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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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환 정

on 22 August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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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
정의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동학 농민 운동의 배경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고 고부군은 곡창지대로써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혹하게 세금을 걷는)에 시달리는 곳이었다. 결국 조병갑의 횡포로 민란이 일어났다. 직접적인 불씨는 만석보의 개수문제에 따른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동학농민운동 과정
제1차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1855(철종 6)~1895(고종 32)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전봉준
1차 동학농민운동과 2차 동학농민운동으로 나뉘어짐
첫번째는 반봉건적인 성격, 두번째는 반외세적인 성격을 띰
제2차 동학농민운동은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1차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6월 2일 김홍집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설립하여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이어 6월 21일에는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23일 청ㆍ일전쟁을 일으킨 후, 25일 1차 갑오개혁을 강행하였다.


고부농민봉기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전봉준은 무장지역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다시 수천 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하여 고부 백산에서 궐기하였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쓸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전주성을 점령한 후 관군과 농민군은 접전을 벌였고, 서로 타격을 입었다. 이즈음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 요청하여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이에 나라 안팎에 위급상황을 인지한 전봉준은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을 5월 8일 맺었다. 그러나 톈진조약(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동등 파병권)에 따른 청나라 군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 또한 5월 9일 조선에 상륙하였다.

화약을 맺은 관군은 몇몇 부대를 전주에 남기고 모두 철군하고, 동학농민군도 철군 및 해산했다. 그러나 군현의 행정이 혼란과 마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때 12개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을 실시하였다.

1894년 관리들의 탐학이 갈수록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영호도회소와 여수 지역 동학농민군은 척왜와 제폭구민, 그리고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비록 동학농민군의 전라좌수영 공격과 그들이 추구했던 목적은 좌절되었지만 그들이 지향한 민족의식과 평등사상, 부정과 불의에 맞선 저항정신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 한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과정
제2차 동학농민운동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제2차 삼례봉기)하여 서울로 향했고, 이는 반일감정이 쌓여 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을 요청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고전하다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했다. 이후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져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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