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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Pre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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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 lee

on 29 Apri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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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Untitled Prezi

Fresh mens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조원소개 2013103035 이린

2013105253 이슬기

2013105408 정예울

2013105357 도승환

2013105371 선량

2013103725 온현태 민주주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이 되어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제도. 민중 또는 다수를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를 뜻하는 크라티아(kratia)를 합친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유래됨. 시 그날-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은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초기 대표시

'아픔'을 '아픔'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병듦'의 상태, 그리고 그 '병듦'의 상태에 대한 연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성복의 첫 시집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삶의 죽음으로서의 '망각'에 대한 '드러내기'에 있고, 그 망각의 드러냄은 '아픔'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날」이 보여주는 세계는 계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일상의 모습이다.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걸쳐 있는 '그날'의 치욕적인 아픔의 망각 상태에 대한 괴로움의 발견이다. 이러한 발견은 '병듦'의 치료를 위한 첫 번째 이행, 즉 '치유의 첫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격: 독백적, 묘사적, 비판적

*표현: 불규칙인 행갈이를 의도적으로 사용함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상은 초현실주의 시를 방불케 하는 현란한 이미지를 빚어냄

*주제: 소와된 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고발 보수적 민주화 한국의 정치 체계의 특징

자율성을 가지고 존립해 온 정치사회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

강한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

권위주의 친화적 사회 구조

보수 양당적 정당 체계 민주화 이후의 국가와 정당 체계의 문제점






안락한 보수주의 갈등의 억압과 대안의 배제 정당의 역할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고 대변

사회적 합의

정당의 문제

구시대적 이념의 틀

상층 편향성 갈등의 사유화에서 갈등의 사회화로 갈등의 사유화 - 정치 엘리트들이 한 사회의 지배적 사회 갈등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당선과 재선에 유리한 갈등만을 선택

사회적 불만의 주기적 폭발 갈등의 사회화 : 사회의 중심적 갈등들이 정당을 통해 전국화되는 것

이념과 정책을 가지는 대중 정당 필요 유권자 편성 구조의 변화와
경직된 정당 체제 한국 사회 유권자의 분리 문제 민주화 이후 사회 균열의 구조

-갈등의 양상 : 냉전/탈냉전, 국가/시장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쇠퇴 신자유주의로의 급진적인 변화 한국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레짐

민주주의의 쇠퇴 - 계급 구조와 사회 분열을 완화하는 기능 상실 슈퍼 재벌의 등장과 민주주의의 변형 슈퍼 재벌의 등장 재벌의 언론 영향

행정-입법-사법부에 걸친 대기업의 인적 네트워크

분배 구조의 악화 제도 문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
그리고 헌정주의 민주주의의 ‘제도 문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 – 기존의 방법이 아닌 제 3의 무기로서 법과 제도를 동원하는 현상 보수적 관점에서의 헌법 정치에 대응하는 규범으로 떠받들고, 구심점으로 뭉침 진보적 관점에서의 헌법 민주주의의 부족 강조
민주적 결핍, 개혁의 부족은 현행 헌법에 중요한 원인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의 제도화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을 통한 경로

-사람들의 광범위한 정치 참여

-정치의 영역의 확대 헌법을 바로 세우는 것을 통한 경로

-엘리트, 소수 위주의 변화

-소수의 특권 중시 민주주의도 능력 있는
정부를 필요로 하는 이유 핵심은 국가를 민주적으로 능력 있게 운영하는 것

민주적으로 선출된 집행부의 능력

대표-책임의 관계 외신기자가 본 87년 6월 히라이 히사시 86년 5월 3일

‘5.3 인천사태’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경인지부(대통령의 직선제를 요구하는 1천만 서명운동 주도) 결성대회가 이원집정(二元執政) 개헌 반대,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 요구하였음 공권력 투입으로 무산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의 운동권 탄압을 본격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음 87년 4월 13일

‘4.13 담화’ -흔히 ‘4.13 호헌조치’로 알려져 있으며, 대통령 전두환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계속해서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언함 87년 5월 27일 -413호헌조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위해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 조직한 사회운동단체

-결성문 ‘이제 우리는 모든 국민의 민주화 의지를 총 결집하여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운동을 강력하게 조직해 나갈 것을 역사와 민족 앞에 엄숙히 확인한다.’

-의의 : 한국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반이 생겼다. 87년 6월10일 -‘6월 민주항쟁’(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주화시위)의 서막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기 위한 전당대회 날짜에 맞춤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가 벌어짐

-민정당 전당대회 vs 국민운동본부의 집회 시위 -> 국민운동본부의 승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 87년 6월11일~15일

명동성당에서의 시위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슬로건

-‘인간마이크’ : 모두가 한마음 되어 집회를 진행시켰다는 것을 보여줌

-11일~15일 학생들이 주가되어 시위

-15일 학생들이 해산하던 때 샐러리맨 데모부대의 출현->넥타이부대

-시청 1개소, 파출소 15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2개소 등 21개소의 공공시설물이 파손

-경찰 708명, 일반인 30명의 부상자 87년 6월16일 부산 1)가톨릭센터 -전경의 ‘양심선언’ : 자신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데모대에게 최루탄을 던지거나 할 수 없다 2)서면 ‘버스 데모’ 87년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6월 9일 교내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李韓烈, 20살, 경영학과 2년)이 사경을 헤매다 결국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추진됨

-12일 연세대생들의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를 시작

-국본은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
전국 14개 도시 247개소에서 20여 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 87년 6월 19일 -계엄령이 선언될 것이라는 소문

-국민운동본부가 4.13 호헌조치 철폐, 최루탄 추방, 언론 자유 등 투쟁의 타깃 구체화함 87년 6월 26일 -6월 항쟁의 최대 규모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참가

-데모대가 우세한 상황 87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 <내용>
1. 대통령직선제의 수용 및 대통령선거법 의 개정
2. 언론기본법 폐지 등의 언론자유 보장
3. 인간존엄성 존중 및 국민기본권 신장
4.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5. 지방자치제와 대학자율화 실시
6. 사회정화조치 실시
7.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시국관련사범의 석방 등을 약속

-6월민주화운동은 제5공화국 전두환 반(反)독재정권의 연장을 막았고, 정치민주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됨 그들이 왔다 -마르틴 니뮐러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뮐러: 독일의 반나치 신학자 First they came

First the came from the Communists,
but I was not a Communist so I did not speak Unionists.
Then they came for the Socialists and the Rrade Unionists,
but I was neither, so I did not speak out.
Then they came for the Jews,
but I was not a Jew so I did not speak out.
And when they came forme ,
there was no one left to speak out for me. 잔설 -이시백 광주의 기억과 에티카
- 김항 광주에서 일어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항쟁 배경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손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당시 각 정치 파벌들, 학생운동 진영, 군부 등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갖고 각각 상이한 시나리오로 대응을 하려고하였다. 하지만, 그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군인들이 1979년 12월 12일, 12·12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 전개 전두환은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김대중을 구속했고, 이에 민주화운동이 더 격렬해지자 5월 18일 오전 0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 후, 광주에 무장공비가 난입했다는 신문기사를 싣 고 광주에 있는 대학교들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

- 광주지역 대학생들이 이에 분노하여 전남도청으로 쪽으로 가두시위를 시작 → 이들을 공수부대에게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하게 시킴. 이후 경과와 기념물 (1) 1988년 12월 광주청문회

- 국회에서 광주청문회가 열려서 진압군에 의한 잔인한 억압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짐.

-사망자 164명, 실종자 166명, 부상자 3,139명이라는 공식집계가 처음으로 발표됨

-광주 사태를 5·18민주화 운동이라고 명명 ▲광주 사태: 사건 발생직후 광주 사태라고 불리었다. 사태는 빨리 수습되어 잊혀져야 할 사건을 일컫는다. 전두환정부에게는 광주는 그런 ‘사태’에 불과했던 것으로 이해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의의를 가진 사건이라고 이해함 (2) 국립 5·18묘지 : 광주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은 교외에 있는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2002년 1월에 제정된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바로 옆에 국립5·18묘지를 세워 희망자들을 이장시킴. (3)5·18자유공원 -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법정·영창 등을 원래 자리에서 100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고,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료와 영상물을 전시하는 자유관을 신축
시민들은 이에 더욱 분노, 20일, 21일을 거쳐 금남로에 집결, 시청을 점령.

→ 공수부대나 경찰들의 진압도 더욱 쌔짐.
한국군중에서도 가장 잘 훈련된 적을 죽이는 일이 유일한 임무인 정예부대가 무방비 상태인 시민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수행. 장갑차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 화염방사기를 사용하는 등의 행동을 취함. 또, 광주의 외곽지역을 차단하였다가 27일 오전 0시에 도청으로 재진입하여 도청을 점령하였던 시민군들을 제압함. 토론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를 통해 국민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민 대중은 점점 더 정치적 참여에 수동적이거나 냉담해지고 있다. 이렇게 현대 민주주의가 활력을 잃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이유를 밝혀보라. 학력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데뷔 : 1988년 <동양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작품 : 장편소설 <메두사의 사슬>, <종을 훔치다>,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제재 : 이장 선거, 4대 강 사업

주제 : 서로의 주장에 대해 대화를 통한 소통보다는 나와 의견이 다르면 말로써 상대를 가장 극한의 나락으로 낙인찍어 버리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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