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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보이스

요셉보이스
by

hyojin yun

on 30 November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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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요셉보이스

요셉보이스 (1921~1986 Joseph Beuys 요셉보이스 The end 요셉보이스의 생애
1921 독일 크레펠트에서 출생.

1936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

1940 의학을 공부하여 소아과 의사가 되고자하였으나 공 군으로 징병됨.

1943 러시아의 포격으로 비행기가 피격 당함. 독일 국경 후방에 불시착하여 8일간 타타르인들의 보살핌을 받음. 독일의 한 수색병에 의해 발견되어 군 병원으로 후송됨.

1947-51 뒤셀도르프 주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조각가 요셉 엔셀링과 에발트 마타레의 제자로 수학함.
개인 후원자를 위한 작품 제작 시작. 독일 뷔데리히 묘지 내 프리츠 니이하우스 박사를 위한 기념비가 그의 첫 커미션 작업. 반 데르 그린텐 형제가 보이스의 작품을 다수 모으기 시작함.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1965> 요셉보이스의 작품세계 1974년에는 뉴욕의 화랑에서 이 퍼포먼스를 시행했다.

그는 부상자 수송차를 타고 와서 갤러리에서 지팡이와 낡은 모포를 휘감고서는 코요테 한 마리와 함께 3일간 서로 생활하다가 부상자 수송차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퍼포먼스를 마무리 지었다.

퍼포먼스 기간동안 코요테는 본래의 사나운 모습을 버리고 보이스와 친밀감을 가지기도 했었다고 한다. <나는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은 나를 사랑한다. 1974> 문예창작과 최형우 조재호 송혜미 윤효진 대표작품 요셉보이스가 미술사에 미친 영향 1952 뷔페탈 미술관에서 <보이스 :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상(Beuys: Crucifixes)>를 전시함.

1953 크라넨부르크의 반 데르 그린텐 농장에서 첫 개인전을 가짐.

1958 클레베에 있는 온천지로 스튜디오를 옮김(1961년까지 머무름). 에바 부름바흐와 결혼.

1961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의 조각 교수로 임명됨. 클레베의 슈테디세 미술관에 서 반데르 그린텐 형제의 커렉션 중 보이스의 드로잉, 수채, 유화, 조각을 전시함.

1962~64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함.

1963 그의 첫 주요 행위극 <시베리아 교향곡(Siberian Symphony)>을 발표함.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위한 플럭서스 콘서트<Festum Fluxorum Fluxus>에 참가함. 쾰른 소재 쯔비르너 갤러리에서 열린 앨런 캐프로우의 강연에 임하여 보이스가 처음으로 기름덩어리를 사용한 작업인 <기름상자(Fat Chest)>를 전시함. 크라넨부르크의 남부 라인 지방에 있는 하우스 반 데르 그린 텐에서 요셉 보이스 플럭서스를 전시함. 1968 “예술은 삶”이라고 선언함. 카셀의 도큐멘타 4에 참가함. 10명의 동료 교수들이 보이스의 활동이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성명서를 냄.

1970 뒤셀도르프에서 불투표인 기구<Organization of Nonvoters>와 자유국민투표정보소 <Free Referendum Information Point>를 설립함. 독일 도르트문트에 서 열린 전시오프닝에서 빌리 브란트를 만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함. 9월에 열린 쾰른 아트 페어의 편협성에 대항하여 성명서를 냄

1972 카셀의 도큐멘타 5에서 민주주의, 예술, 그 외에 그와 관련된 이슈들에 관하여 100일 간 내내 대중과 공방전을 벌임. 보이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두 번째로 행정 사무실을 점거한 후, 요하네스 라우 장관이 보이스를 직위해제함.

1973 인류학 단체의 회원이 됨.

1974 뒤셀도르프에서 하인리히 뵐과 함께 '학제적 연구를 위한 자유 국제 대학 (FIU)' 설립. 뉴욕의 르네 블록 갤러리에서 살아있는 코요테와 함께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 (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 를 공연함.
1976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설치작품 <전차 정거장(Train Stop)>을 발표함.

1977 카셀의 도큐멘타 6에서 설치작품. <작업장의 꿀 펌프(Honey Pump at the Workplace)>를 발표함.

1983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콘라드 휘셔에서 설치작품 <고통의 방(Pain Room)> 을 발표함.

1984 도쿄의 세이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짐. 1985 카프리에서 간질환 회복중 마지막 멀티플 <카프리 밧데리>를 제작함. 마지막 설치작품 <팔라조 레갈레>가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에서 발표함.

1986 뒤스부르크에서 빌헬름 렘부룩상을 수상함. 심장 질환으로 사망.

1987 카셀의 도큐멘타 8 오프닝에서 보이스의 아들인 벤젤이 행위극 <7천 그루의 오크(7,000 Okas)>중 마지막 오크를 심음. 1965년 11월 26일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화랑에서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퍼포먼스를 하였다.

머리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쓴 채 한 발에는 펠트를, 다른 발에는 쇠로 창을 댄 신발을 신고 죽은 토끼를 안고 약 2시간 동안 미술관의 그림을 토끼에게 설명했다. 그것이 그 날 퍼포먼스의 전부였다. 이 작품은 요셉 보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요셉보이스 그 이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나 행위를 통하여 대중의 상식을 뒤집어 놓거나 세상을 놀라게 한 요셉보이스.

그가 사망한지 겨우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 미술세계에서는 그를 현대미술의 신화, 20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현대판 무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요셉보이스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위적인 조형작품과 퍼포먼스로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

1971년 보이스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창설한 <국제자유미술대학>과 같은 조직은 소수 계층을 위한 미술에서 탈피, 넓은 정치무대로 미술을 확산시킴으로써 미술을 실천한 대표자로 꼽힌다. <요셉보이스와 7000그루의 떡갈나무. 1982> 요셉보이스 "모든 사람은 예술이다" 독일이 자부하는 행위예술가, 조각가, 드로잉화가, 미술이론가, 정치가 그리고 교육자

70년에 작가들은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미술관의 문을 열고 그곳에 자연과 일상을 데려오는 일, 혹은 미술관의 벽을 허물고 일상 속의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었다.

격리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미 제도화되어 버린 미술계의 기재들에 반항하는 것, 그래서 제도와 모더니즘적 담론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1982년 제 7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녹색당 활동을 하고 있던 요셉 보이스가 지구의 사막화에 고민을 갖고 카셀 시내 곳곳에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그는 시내 한곳에 7000개의 현무암 조각들을 모아 놓고 한 그루의 나무가 심겨지는 장소에 현무암 조각을 옮겨와 함께 세워가도록 했다. 첫 번째 나무를 그가 심었고. 두 번째 나무부터 6999번째 나무는 기부를 통해 나무를 분양받은 일반 시민들이 공동참여자로서 이식을 진행했다. 그의 아들이1987년 제 8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마지막 나무를 심는 것으로 프로젝트는 마무리됐다. 시각중심의 미술에 반대하여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양한 감각을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 적극적으로 도입.

미술작품의 제작과 감상에 통합된 비전을 제시

시각 중심의 미술에 반대, 다감각적인 작품 형태, 미술과 삶의 융합
⇒현대 미술사조의 전위적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예술이 모든 인간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나타낸 화가, 요셉보이스

“모든 인간은 예술가이다”는 도전적인 주장,
인간 개개인이 가진 창의적 삶의 가능성과 예술을 확장시켜 연결

“예술은 바로 치료다”라는 선언으로, 예술을 치료와의 연계성으로 생각
조각의 개념을 정치 영역에 확대하여 ‘사회적 조각’이라는 개념을 세우고 행동적인 예술관과 자유지향
⇒ 개념미술 · 행위예술 · 환경예술을 비롯하여
독일 신표현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침 요셉 보이스가 속해있던 전위 예술 단체, 플럭서스(1962~1994)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백남준 등이 기록사진 드로잉 오브제 등, 60년대 초 독일에서 태동한 플럭서스 그룹은 반전위 예술운동으로 현대미술의 개념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미술과 미술가의 역할을 비판, 공격하여 이를 와해함으로써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
미술과 삶을 통합하여 순수미술이라는 개념을 없애는 것이 목표 현대미술의 신화 요셉보이스 그의 사망이후,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은 앞 다투어 그의 유작전을 유치, 미술관에서는 독립 코너를 마련하여 보이스의 작품을 상설전시 하였다.

생전 보이스는 폐쇄된 좁은 갤러리에서 이루어지는 전시회나 상품으로 거래되는 미술작품 등 협의의 미술로 상징되는 모든 미술행위를 철저히 기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 유수의 미술 수집가들과 미술관들은 엄청난 고액을 지불하며 작품을 사들임.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고 미술과 삶의 일치가 마치 지상목표나 되는 듯 그것을 위해 헌신해 왔던 보이스가 이제는 거대한 후기자본주의 문화적 논리에 함몰되어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캔버스를 장만하는 순간 큰 실수가 시작된다며 전통적 미술 개념을 조롱했던 보이스도 어쩔 수 없이 박물관의 박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보이스의 정신을 배우려는 새로운 미술가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그의 작품은 결코 상품이나 박제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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