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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 of 삼국지연의 인물과 사상

인물과 사상
by

SooGeong Jeon

on 13 Jun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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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Copy of 삼국지연의 인물과 사상

삼국지연의 인물과 사상 인물 사상 위 조조 촉 오 촉한정통론 조조 사마의 장료문원 조위정통론 중화사상 VS 유비 관우 제갈량 장비 조자룡 손권 손책 태사자 자의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서 손견의 아들로 자는 중모 이다. 200년 형의 패업을 이어 받아 주유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에는 유표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에는 조조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손권은 촉의 유비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대파하여 강동의 기반을 굳혀 천하삼분의 기초를 닦았다. 뒤에 여러 차례 위의 침공을 받았으나 번번이 공 없이 물러나게 하였다. 조조의 친정을 맞이하여서는 몸소 출전하여, 몇번씩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위험을 무릅쓴 적도 있었으나, 점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많은 모신과 대장들을 잘 거느리었다. 주어 제위에 올랐을 때는, 칭신하여 그의 봉작을 받으면서 까지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 하였고,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를 칭하자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무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관상에 따라 71세로 장수하다가 죽었다. 재위 24년 뒤의 일이고 시호는 태황제이다. 동 오의 용장으로 손권의 형이다. 유표를 칠 때 종군 하여 적장 진생을 쏘아 죽여 첫 공을 세웠다. 아비 손견이 죽은 뒤 원술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고 강남 여러번 전공을 세웠으나, 큰 뜻을 누를 길 없어 주치, 여범의 도움으로 원술에게 전국 옥새를 담보로 군사를 빌어 동오로 들어가 주유, 장소와 함께 강남을 평정하였다.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와 개발에 힘쓰며 오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한 인물이다. 첫 전장으로 유요를 쳤을 때는 태사자와 용전하였고 삽시간에 적의 두 장수를 죽여 소패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 하였다. 조조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에 봉하고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일찍이 조조의 모사 곽가가 말하기를 '경솔하여 앞 뒤 분별이 적고, 참을성이 적고, 지모가 부족하여 한 사람의 자객으로서 제거 할 수 있으며 다음날 반드시 이름도 없는 자의 손에 죽으리라' 하였다고 하더니 뒤에 과연 죄지어 죽은 허공의 식객에게 찔리고 투병 중 우길 선인을 죽이고는 그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자 중달이고 진왕조 건국 뒤에 고조선제라고 추존되었으므로, 사마선왕司 또는 진나라의 고조선제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조조의 청으로 그의 부하가 되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세운 뒤에는 명제·제왕 등 3대 황제를 섬겼다. 그동안 대도독이 되어, 위나라의 군사를 통솔하고 위나라와 진나라 유일의 권신이 되어, 그의 손자 사마 염 때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주요한 업적은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국 정립의 위기에 처하여 외적을 물리친 일이다. 특히 촉한의 제갈공명을 오장원에서 막아, 그의 의도를 꺾기도 하였다. 또 요동을 정벌하여 요동태수 공손 연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밖에 남방의 오나라에 대처하여 화이허강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한 일도 큰 업적이다. 삼국지연의의 주요인물과 주요사건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정통을 존중하고 충의를 찬양하여 유비를 지지하고 조조를 반대하였다. 통치계급 내부 투쟁의 사실과 현상을 반영하고, 봉건의 어지러운 세상 속의 백성의 고난을 반영하였다. 위, 촉, 오 삼국의 흥망의 역사를 집중 묘사하며 분열된 교훈과 통일을 위한 경험을 끌어내었다. 관념론적 영웅 사상이 드러난다. 종교 미신 사상, 숙명론이 드러난다. 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자는 자의이다. 유요 밑에 있다가 오나라로 귀순할 때 손책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였다. 손권 밑에서 일했으며, 아들 태사향을 두었다. 7척 7치의 신장에 보기 좋게 수염을 기른 미남 장부루서 기지가 넘치는 장수였다. 활솜씨가 뛰어나 백발 백중이었다고 한다. 또한 학문에도 정통했다.
외곬이고 의리가 두터운 성경이다. 일찍이 모친이 신세를 진 은혜를 갚기 위해 북해 태수 공융을 위기에서 구한다. 도이에 의해서 자신의 무예를 휘두르며, 무예에 의해 도리를 완수하는 것을 스스로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탁군의 빈곤한 집안 출신으로 자는 현덕이다. 유비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식객으로 있던 서주의 주인 도겸에게 목 자리를 승계받은 이후이다. 이후 원술과 조조, 다시 형주의 유표에게 의지하던 그는 제갈량을 만남으로써 마침내 천하를 삼등분하여 그하나인 촉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유비는 시작부터가 조조와 손권과 달랐다. 유비는 근거지도 없고 무용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유비를 한번 보면 대개 그의 인품에 반한다. 유비가 그토록 궁핍하게 지낼 때도 천하의 인재들이 유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는 타고난 리더십과 인간적인 겸손한 유비의 매력때문이다. 유비는 보통때는 매우 관대하고 인자하지만 결정적일 땐 냉정한 면도 보인다. 겸손하며,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순응적이며, 현실주의자이며, 의리를 지키며, 때로는 연기를 잘했던 유비. 하지만 어리석고, 근시안적익, 다른 사람에게 잘 속았던 점 또한 단점으로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군림하기 보다는 천천히 가더라도 함께 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리더 였다. 자는 공명이고 낭야 양도 출신이다. 융중산에 은거하고 있었기에 와룡선생이라고 일컬어졌다. 207년 유비의 삼고초려에 응하여 이른바 융중대의 건의와 더불어 그에게 몸바칠 것을 결심했다. 두보는 760년 성도에 머물면서 제갈공명을 추모하며 쓴 <촉의 재상>이란 시에서 ' 삼고초려를 빈번히 한 것은 천하를 위한 헤아림이었고, 이대의 왕업을 열고 이은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었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길에 가득하게 하는구나'라고 읊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촉한왕조를 건립한 뒤 승상에 올랐으며, 수리관계 시설을 건설하는 등 사천 지방의 생산을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 후방의 안전을 위해 귀주와 운남성의 소수민족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였다. 이른바 맹획을 7번 잡아 7번 놓아준 칠금칠종은 바로 이러한 사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34년 오장원에서 위나라 대장 사마의와의 결전하던 와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자는 맹덕, 패국 출신으로서 환관 조등의 양자가 된 조숭의 아들이다.중국 삼국시대당시 위나라의 시조로서 황건적의난 전에 효렴으로 후한에 천거되며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공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알렸다.
동탁이 죽은 뒤 이각,곽사세력을 평정한후 헌제를 옹립하여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 화북의 원소를 평정한후, 중국 영토의 반을 차지했으며 손권,유비의 연합군을 적벽에서 맞서나 대패하여 그세력은 강남에 미치지 못했다.조조는 아주 냉철하고 차가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감성적인 면도 풍부하다. 사람을 심복시키고 감동을 주는 뛰어난 문학가이기도하며 , 뛰어난 병법가이기도하다. 그는 정치상으론 실권을 잡았었고 216년 위왕의 자리를 오르며 그시대는 이미 황제라는 권력은 사라진지 후 였다. 220년 정월 뤄양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후에 아들 조비가 뒤를 잇고 헌제에게 양위를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된 뒤 조조는 "태조 무황제" 로 추존되었다. 자는 문원으로 위의 장수이며 처음에는 여포 휘하에서 각지를 전전하였다. 여포 패사 후 조조의 부하가 된다. 합비 수비시에는 겨우 8백의 병사로 십만의 오군을 격퇴하여, 우는 아이도 그친다고 할 정도로 경외의 대사이 되었다.항상 냉정하고 침착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려 전장을 장악 하였다.
위의 서황, 장합, 우금, 악진과 함께 오장군의 필두로 꼽히며, 도리를 존중해 적에 대해서도 예를 잊지 않는 인물이다. 삼국지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료의 정치적인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가 어떠한 계략을 쓰거나 또는 상대의 계략을 간파하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아 사실 문에 뛰어나다 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가 군사와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치적인 식견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병법에 있어서만큼은 남부럽지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료는 젊었을 적 비록 여러 번 주인을 바꾸기는 했었지만여포나 유비와 같이 스스로의 의지로 그랬던 것이 아니고 본의아니게 자신이 섬기던 주인이 죽어서 세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조를 주인으로 섬긴 이후에는 위문제 조비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충성을 다하였으며 221년 병으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오나라 여범의 군사를 막아낸 뒤 병사 하였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소위 ‘촉한 정통론’에 따라 서술됐다.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비가 세운 나라가 정통이고 조조와 조비의 위나라는 한 왕실을 찬탈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중국 정사 24종에 포함된 진수의 사서 ‘삼국지’는 조조·조비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유비와 손권은 그 신하로 취급한다. 유비가 세운 나라 이름인 ‘한’조차 제대로 적지 않고 ‘촉’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 촉한의 건국 공신으로 자는 익덕이다. 유비와 동향인 탁군 사람 이며 유비, 관우와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 정벌시, 엄안()을 회유하여 파촉 정벌의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 태수 자리에 올랐고 한중 정벌에서 위나라의 장합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정하는 도중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되었다.
연의에서 장비를 소개할 때 돼지 등의 가축을 잡는 등 신분이 낮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비는 성격이 불같고 무용은 여포,관우에 버금가 모두가 무서워 하지만 한편으론 유비와 제갈량등을 매우 존중하는 순진난만하고 군자적인 모순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용맹과 위엄을 갖추고 나름대로 병법에도 충실한 자였다. 즉 야성의 본능과 인간의 지성이 적절히 배합된 자였다. 촉한의 무장으로 수장 또는 장생이라는 자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으로 바꿨다. 유비를 오랫동안 섬기며 도원결의를 맺고 한 번도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관우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의 화신으로 민담이나 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삼국지연의>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자는 자룡이며 상산군 진정현 출신이다. 8척에 이르는 큰 키에 생김새가 준수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무예가 출중하였고 특히 창을 잘 썼다. 처음 원소의 부하였다가 그만두고 공손찬을 찾아가 부하가 되었다. 이때 유비도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운은 유비의 인품을 알아보고 그의 부하가 되겠다고 자청했으며 유비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관우, 장비, 황충, 마초와 함께 촉의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유비가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의 공격을 받고 달아날 때 단신으로 적지에 뛰어들어 어린 유선을 구해낸 일화가 유명하다. 이렇게 무용과 충절을 갖춘 장수로서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 후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져 위나라 정벌길에 나섰을 때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고집을 부려 출병하여 위의 선봉대장 한덕과 그의 네 아들과 모두 싸워 죽였다. 중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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