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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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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oun gon bae

on 17 Novem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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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역사
1. 바로크 시대
2. 고전파 시대
3,낭만파 시대
4. 근.현대 시대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아르스 노바의 탄생이후 두 번째의 신음악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6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보통 1600 ~ 1750년까지의 역사적 기간과, 그 시대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다른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 ~ 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 음악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 자연 철학이나 철학과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뿐 아니라 어떤 시기에 생산된 음악이든지 간에 당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된 경향, 관념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을 뜻하는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 한다.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엽에 걸쳐 주로 빈을 중심으로 융성하였다.

하지만 이는 서양 음악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1770년부터 1830년까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중심으로 하는 60여 년간의 '빈 고전파' 음악을 가리킨다.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베토벤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고전파 음악을 완성시키며 다음에 올 낭만주의에의 의지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이 때의 고전음악은 궁정과 귀족만을 위해서가 아닌 중산층의 취향에 봉사하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러 중산층의 경제적 지위는 더욱 향상되어 연극과 문학, 음악 같은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끼쳤다

고전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과 내용,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한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조화와 통일을 추구했다.

고전음악에서는 느낌의 다양성과 대조가 강조된다. 바로크 작품이 단일 악상을 통해 하나의 감정만을 전달한 데 반해, 고전주의 작품은 다양한 악상들이 물결치듯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그런가 하면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형식인 소나타의 완성도 고전파음악을 얘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이 소나타 형식의 완성을 통해 서양음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음악의 감각적, 감정적인 부분을 정신적, 미적인 것으로 승화시킨 업적을 가장 큰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는 바로 이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이 자리잡는 시대였다. 그래서 이 형식에 따라 우리가 요즘 즐겨듣는 여러 음악이 등장했다.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을 따른 4악장 교향곡이 이때 나왔고, 3악장으로 된 협주곡과 독주 소나타가 자리잡았으며, 교향곡의 축소판이자 소나타의 확대판인 여러 실내악이 확립된 것이다.

이후 고전파 음악은 무엇보다 음악의 형식을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의지를 높은 예술성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이 되고 있다.
고전파에 이어지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유럽 음악을 말한다. 오늘날 고전파 음악과 함께 가장 많이 감상되고 있는 작품들이 만들어졌고, 이시기에 슈베르트, 멘델스존, 베버,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바그너, 브람스, 드볼작 등이 배출되었다. 또 베토벤의 경우 후기 시절이 이 낭만파와 맥을 같이하고 있어 고전파와 낭만파의 연결고리가 된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는 19세기의 음악을 지배하는 기본 이념으로 알려져 있지만. '낭만예술' 이란 자체는 어떤 한 시기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시대나 공간에 관계없이 추구되던 예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음악사에서 낭만파 음악을 분류하는 것은 그 이전의 고전주의에 반한 특성 때문이고, 나름대로의 낭만 형식을 구축해나갔기 때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낭만파는 고전파가 왕실 귀족과 상류 계급이 음악의 담당자이고 궁정이 음악의 중심되는 장소였던 데 비해, 공개 연주회가 정착하여 불특성 다수의 일반 시민이 청중이 되는 음악 환경부터 달랐다. 따라서 고전파와 낭만파, 두 시대의 음악이 변화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는데. 고전파 시대 대부분의 작곡자들이 왕실 귀족과 고용 관계에 있으며 당시 모든 종류의 작곡을 의무화하였고 연주도 겸하였던 반면, 낭만파 시대에는 음악가가 자유롭게 독립한 전문직이 되었다.

반면 낭만파가 형성되던 19세기는 정확한 지식과 과학적인 방법에 있어 급속한 발전을 보여 피아노 음악에서는 새로운 음향이 발견되었고, 관현악에서는 새로운 악기들이 추가되고 옛 악기들은 더 낭랑하고 유연한 소리를 내도록 개조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 시대의 음악은 합리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 무의식적이며 초자연적인 것들을 추구하였다.

특히 작곡가와 연주가가 분리되면서 바이올린의 파가니니, 피아노의 쇼팽과 리스트로 대표되는 명연주가들의 탄생은 낭만파 음악 특유의 명인 예술을 촉진시켰고. 악기 개량 및 오케스트라의 큰 발전을 이루게 했다.

낭만파 시대를 통한 음악 발전은 작곡가나 연주가가 속한 각 나라의 서로 다른 예술성이 부각되면서 민족주의의 대두를 가져온다. 즉 음악에 민속음악의 요소가 도입되어 각국의 독특한 양식적인 성격이 음악속에 선명하게 나타나게된다. 이는 나아가서는 각 나라에서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국민악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19세기 말, 낭만파 음악이 최고도에 이르렀을 무렵, 반 낭만파 운동이 일어나 새로운 양상의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의 음악을 근대 음악이라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비정서적, 부조화적, 충격적인 양상을 짙게 나타내기 시작한 음악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진행되거나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음악을 통틀어 현대음악 이라 한다.

근대, 현대 음악은 이미 낭만파 음악의 형태를 벗어나 인상주의, 표현주의, 무조 음악, 12음 음악의 흐름으로 변화되어 왔으며 새로운 음악의 소재를 추구하는 구체 음악, 전자 음악 및 예술의 극단을 달리는 전위 음악도 등장한 가운데 많은 작곡가들이 서양 음악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동양 음악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것을 기초로 작곡에 힘쓰고 있다.
클래식의 음악
1. 바로크 시대
2. 고전파 시대
3,낭만파 시대
4. 근.현대 시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조지 프레드릭 헨델 (George Fredric Handel)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로, 클래식계의 Big Boss.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실개천이 아닌 음악계의 대한 대양이다."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하였다. 클로드 드뷔시도 신을 믿지 않는 작곡가는 있어도 바흐를 믿지 않는 작곡가는 없다는 말로 바흐의 위대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클래식 갤러리에선 바본좌로 칭해진다.

또한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엔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그가 바로크 시대에 너무 많은 업적을 이루어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평균률 클라비어 곡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독일출신의 영국의 바로크 작곡가 중 한 사람(1685~1759). 바흐와 동갑이다. 독일어로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겠지만,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보통 영어식인 "조지 프리더릭 헨델"로 읽는다.

독일 할레에서 궁정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음악에 관심과 두각을 나타냈다. 아버지가 헨델을 자그마치 63살에 낳았다! 일흔 다섯까지 장수했으나 헨델 나이는 열한살.아버지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려 했지만 재능을 알아본 지인들의 도움으로 음악계에 입문한다.

주로 오라토리오(오페라와 기악곡의 절충형)으로 히트를 쳤고, 종교음악을 작곡하던 바흐와 달리 주로 현대의 개념으로 치면 대중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바흐는 주로 대위법과 선율을 중시하는 고전적인 작법으로 작곡하였는데, 헨델의 경우 화음을 중심으로 음향적인 효과를 중시하여 작곡하였기 때문에 좀 더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젊은날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1727년에 귀화했고 그에 따른 많은 일화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영국 왕(조지 1세)이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가 되었을 때 그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만들었다는 뱃놀이용 "수상 음악(water music)이 대표적이다.

생전에 그는 많은 표절 시비를 겪었고 말년에는 실명까지 한다. 그를 치료하다가 되려 장님으로 만든 돌팔이 의사는 바로 바흐도 엉터리로 치료하여 실명시켰다. 바로크 시대를 연 동갑내기인 바흐와는 죽어서까지 한번도 대면하지 못했지만, 이 돌팔이 의사라는 접점이 생겼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러나 헨델은 실명까지 했으면서도 근성으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연주되는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본좌의 자리에 등극했다.

이 <메시아>의 한 부분인 할렐루야는 기립하는 전통까지 있다. 이 전통은 초연에 참석했던 영국 왕 조지 2세가 이 부분에서 감격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래 현재까지 지켜져오고 있다고 알려져 왔는데, 사실은 조지 2세가 이 곡의 초연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지각해서 할렐루야 시작할 때 딱 왔다고 한다. 왕이 도착하면 전원 기립을 해야하는 룰에 따라 극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립을 했고, 이게 왕의 지각에 대해 쉴드를 치려다보니 저런 설로 와전된 것이라 한다.
메시아
독일의 클래식 작곡가. 통칭 악성.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명이다.
1770년 12월 17일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본 궁정의 악장을 지냈고, 아버지인 요한은 궁정 가수였지만 잦은 폭음으로 결국 목소리가 상했다고 한다.

1795년 빈에서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아갔으며 이듬해에는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 등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중주곡들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던 그 시점에서 베토벤은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게 된다.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라는 곳으로 가서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이 시기에 쓴 '하일리겐 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하다. 참고로 이 당시 지내던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던 집도 현재까지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으로 남아 그의 유품과 당시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의를 다진 그는 이후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802년에는 2번 교향곡을,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감람산의 그리스도"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의 절절한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되어 있다.

1804년, 베토벤은 그의 3대 교향곡 중 첫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을 작곡했다.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앞선 두 교향곡에 남아있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탈피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기존의 교향곡 작곡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1악장과 장송행진곡을 도입한 2악장등의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실험을 시도해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한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갈갈이 찢어버리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일각에선 나폴레옹을 위해 쓴 곡이 아니라 어떤 귀족에게서 청탁을 받아 쓴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영웅교향곡부터 약 10년간 베토벤은 절정의 물 오른 창작열을 발산해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영웅교향곡을 작곡한 이듬해인 1805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8] 이후 괴테의 시에 기초한 시극 "에그몬트",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후기에는 9번 교향곡 "합창"과 "장엄미사"(미사 솔렘니스)가 작곡되었는데 합창 교향곡의 초연 당시 귀가 완전히 멀어 있던 베토벤은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가만히 있었고, 알토 가수 웅거가 그를 부축해 돌려세움으로써 청중들의 엄청난 환호를 보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웅거는 고음 파트가 너무 어려워 베토벤에게 수정을 요청했다가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던 적이 있는 가수였다.
교향곡 제3번 영웅
교향곡 제5번
현재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시골 마을이자 헝가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향곡의 할아버지 차바퀴 제작자였고, 어머니는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키친메이드 출신이었다. 양친 모두 음악을 생업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경우 민속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스스로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하인부르크에 우연히 들른 게오르크 폰 로이터라는 음악가가 하이든의 재능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빈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인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음악 감독이었다. 로이터는 하이든에게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했고, 여기에 합격한 뒤 1740년에 빈으로 이주했다.

하인부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에서도 로이터의 집에 얹혀살면서 계속 음악을 공부했는데, 1745년에는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면서 합류했다. 그러나 로이터도 이전의 선생처럼 하이든 형제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고, 1749년에 변성기가 찾아오면서 성가대에서 어쩔 수 없이 퇴단해야 했다. 로이터의 집에서도 나와야 했고, 한 동안 기본적인 의식주도 형편없는 상태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다.

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하이든은 처음으로 안정된 전속 직책을 얻게 되었고, 이 시기에 교향곡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760년에 들어 모르친 백작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이듬해에 헝가리계 귀족 집안인 에스테르하지가문으로 옮겨 부악장 자격으로 활동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당시 공작 작위를 보유하고 있던 유력 귀족 세력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꽤 높은 수준의 악단도 고용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이 집안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봉직했고,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인들이었던 파울 안톤과 니콜라우스 두 공작들을 위해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수백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사실상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신세였음에도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도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1780년대 중반 쯤에는 모차르트와도 친교를 나누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790년에 니콜라우스 공작이 타계하면서 고용주도 바뀌었는데, 전임자들과 달리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하이든에게 상당한 액수의 퇴직금을 주고 계약을 해지했다. 프리랜서가 된 뒤에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공연 기획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의뢰로 영국을 두 차례 방문했고, 12곡의 '런던 교향곡집' 등을 비롯한 후기의 대표작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을 제자로 받기도 했는데, 서로 궁합이 잘 안맞았는지 미적지근한 관계로 끝났다.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 1795년에는 다시 빈으로 돌아왔고, 도시 근교의 굼펜도르프라는 마을에 커다란 저택을 가질 정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미사곡을 비롯한 종교음악에 전념했고, 예전의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서도 작품을 써주었다. 종교음악 외에는 트럼펫 협주곡과 현악 4중주를 비롯한 후반기의 걸작 기악곡들도 남겼다.
교향곡 제94번 G장조 [놀람] Hob.1/94
현악 4중주 제17번 [세레나데] F장조 Hob.3/17


쇼팽은 일평생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작곡했다. 물론 가곡이나 협주곡같은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곡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보면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그의 작품이지만 당대의 형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리듬이나 화성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몇 작품에선 불협화음이나 반음계같은 현대음악에서 보여지는 듯한 화성을 보이기도 해서 상당히 시대를 앞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을 선보이기 위해서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템포 루바토, 즉 지휘자나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템포를 의도적으로 조금 빠르거나 느리게 연주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중간중간에 작은 음표, 즉흥적인 연주도 나온다. 특히 쇼팽의 루바토는 상당히 재미있어서 왼손으로는 악보에 적힌대로 정확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오른손으로는 루바토를 적용해서 자유로운 템포로 연주한게 특이하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박살내고싶을정도로 "애매하게" "왠지모르게" 어려운 페시지가 눈에 띈다. 특히나 트릴과 도약위주의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다. 발라드4번의 경우는 쇼팽만의 어려움을 잘 알 수 있는 아름답지만 기교적으로 꺼려지는 난곡중의 난곡이다. 전공자들의 경우 쇼팽 에튀드를 리스트 에튀드보다 먼저 배우는게 정석이지만 딱히 쇼팽 에튀드가 더 쉽다고 보기는 힘들다. 심지어는 코드가들어간 스피디한 스케일이라든지, 오른손 4번손가락의 이상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쇼팽 에튀드가 더 어렵다고 평가하는 피아니스트들도 있는지라.

무엇보다도 요구하는 기술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더 어렵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리스트는 치다 보면 감이 잡히는 반면 쇼팽의 난곡들은 아무리 쳐도 계속 왠지 손에 맞지 않는 느낌이다. 이것은 아마도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로써 작곡을 했지만 쇼팽은 작곡가로써 작곡을 해서가 아닌가 하는 떡밥이 나돈다. 그 당시 쇼팽과 가까웠던 교수가 말하기를 "완전 보헤미안이 따로 없군". 이라고 하자 옆의 조교는 "쇼팽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녹턴
왈츠
슈베르트는 상당히 독특한 작곡가였는데, 그의 머리속에서는 쉴새없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슈베르트는 단숨에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가지고서 작곡을 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그런 탓에 슈베르트는 겨우 31살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무려 998개의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작곡할 때 피아노를 쓰지 않고 기타를 사용하였으며, 기타를 찬양하는 말을 남기기도 하는 등 상당한 기타 애호가였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름다운 멜로디다. 슈베르트는 본인부터 음악으로 즐거웠고, 자신의 음악으로 다른 사람도 즐겁기를 원했다. 그런 생각으로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엄격한 형식이나 잘 짜여진 구조와는 좀 거리가 있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여러 곡의 피아노 소나타나 교향곡을 남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형식이나 구조가 좀 엉성하다는 느낌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좀 느슨하고 구조도 잘 짜여지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선율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은 어렵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특징이 있다. 또한 슈베르트 본인이 서민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도 상당히 서민적이고, 소위 말하는 평범한 빈 사람들이 가진 '빈 기질'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에 관련된 그의 멘트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그 잘난 신분에 끊임없이 속박되어 있을 뿐이지. 하지만, 난, 자유야!"

천여 곡에 가까운 그의 작품 중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가곡이다. 슈베르트의 별칭이 '가곡의 왕'인데, 무려 633곡에 달하는 가곡을 작곡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가곡은 슈베르트 음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다. 슈베르트 이전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오페라에서 독립된 아리아나 가곡을 작곡하긴 했으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이 결합된 시와 노래, 반주가 혼연일체되는 리트(독일 예술가곡)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슈만, 브람스, 볼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가곡은 모두 슈베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송어
마왕
초기에는 그야말로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식어가 지나친 것이 아닐 정도로 도발적이고 대담한 작풍으로 수많은 논쟁을 유발했는데, 특히 자신의 장기 악기이기도 했던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에서는 지금도 처음 듣는 이들에게 꽤 충격적일 불협화음의 난타나 복잡한 조바꿈, 대담한 화성 진행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흔히 '고전 교향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에서처럼 의식적으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대선배들의 작풍을 모방하거나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흘러가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 같은 작품으로 자신의 양면성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자의 경우 중기의 작품 활동 성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아노곡이나 교향곡 외에도 오페라나 발레 같은 무대 작품에 상당한 관심과 열정을 쏟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이 분야에서는 남긴 작품이 적잖은 데도 거의 대부분이 초연 때 망했던가, 아니면 초연도 이런저런 어른의 사정으로 못하고 한참 뒤에야 성사되는 등 끊임없는 안습 릴레이를 펼쳐서 지못미. 그 때문인지 프로코피예프 자신도 이들 대작이 초연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관현악 모음곡 등 연주회용 작품으로 많이 리메이크를 해놓았고, 교향곡 3번과 4번(초판)도 각각 '불의 천사'와 '방탕한 아들'의 음악 소재를 가지고 쓰여졌다.

그나마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던 작품들의 대부분이 해금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소련 붕괴 후에는 초기 작품들이나 무대 작품들의 적극적인 음반/영상물 출반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 분야에서도 뒤늦게나마 명성을 얻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교향곡 1번
조지 거슈윈은 1898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음악보다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는데, 10살때 우연히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음악에 관심을 가져 형이 쓰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가난한 형편에서도 거슈윈의 부모는 그의 교육에 큰 힘을 쏟아 개인 교습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때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거슈윈은 피아노 연주법 뿐 아니라 작곡법, 화성, 고전음악에도 눈뜨게 되었다.

1913년 15살 때 호텔에서 임시 피아니스트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거슈윈은 음악 활동을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악보 출판사 레믹에 취직,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한다. 17살 때는 첫 자작곡인 '당신을 잃은 뒤에'(Since I Lost You)를 발표했고, 당대 최고 인기 작곡가로 꼽히던 어빙 벌린에게 조수로 일할 것을 제안 받아 '조수나 편곡자로만 남기엔 너무 훌륭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극장등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거슈윈은 21살에 발표한 '스와니'(Swanee)가 초대박을 터트렸고, 이 작품으로 그는 대중음악가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그는 브로드웨이에도 진출, 작사가인 형 아이라 거슈윈과 함께 뮤지컬을 공동작업한다.

그리고 1924년, 거슈윈은 당시 '재즈의 왕'으로 불리던 폴 화이트만으로부터 재즈풍의 관현악 작품을 의뢰받았다. 5주만에 작곡된 이곡은 그해 2월 뉴욕 에올리언 홀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곡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바로 랩소디 인 블루이다. 이후 그는 더욱 심도있는 음악 공부를 위해 1928년 파리로 건너가 모리스 라벨에게 사사를 청하지만,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 하느냐?"라 하며 라벨은 그의 청을 거절한다. 한편 파리에서 그는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을 발표하는 한편, 유럽을 돌아다니며 알반 베르크등과 친분을 가진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929년 20세기 폭스로부터 영화 '델리셔스'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영화음악에도 진출한다. 한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으로부터 '대형 재즈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받자 거슈윈은 뒤보즈 헤이워드의 소설 '포기'(Porgy)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구상했고, 형 아이라 거슈윈, 원작자 뒤보즈 헤이워드와 함께 작업해 '포기와 베스'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현재는 그의 극음악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1937년, 거슈윈은 영화음악에 본격적으로 도전, '셸 위 댄스', '고통받는 여인', '골드윈 풍자극'등의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다. 그러나 음악계의 천재들이 그랬듯이, 1937년, 편두통을 호소하던 거슈윈은 뇌종양진단을 받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을 받던 중 39살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피아노 협주곡 f장조
랩소디 인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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