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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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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YEON LEE

on 18 Novemb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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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이성계와 조선

반역에서 영웅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
▽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경기전 소장)
국제학부 2013230019 이승연
2013230035 한승엽
2013230069 김동하

1356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공민왕이 시행했던 반원 정책의 일원
이자춘과 유인우가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다.
- 고려사 권111 열전 24 中
王語桓祖曰: “卿且歸, 鎭吾民, 脫有變, 當如吾命。” 是年五月, 平奇氏。 命密直副使柳仁雨, 往討雙城。 (생략) 王進桓祖爲大中大夫司僕卿, 賜京第一區, 因留居之。
왕이 환조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우선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라. 혹시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
하였다.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25번째 기사 中
권력을 키우는 장군 이성계 1361 ~1384
1361년 10월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
이성계의 부친 환조 이자춘의 활약으로 이성계 집안이 왕에게 인정받게 됨
乙未 金璡請濟師. 時我太祖以金吾衛上將軍爲東北面上萬戶, 王命往援璡, 太祖以親兵一千五百人, 赴之, 儀已率其黨, 逃入江界, 盡捕誅之.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가 박의를 잡아 처형하다
1335.10.11 이성계 탄생
출신지: 화령부 (영흥)
본관: 전주
선조
- 이안사: 원나라가 지배하던 남경 지방의 지방관
- 이자춘(父): 쌍성총관부의 천호
1388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
大明後軍都督府, 遣遼東百戶 王得明, 來告立鐵嶺衛, 禑稱疾, 命百官郊迎. 判三司事 李穡領百官, 詣王得明, 乞歸敷奏, 得明曰, “在天子處分, 非我得專.”
- 고려사 권39 세가39 中
1362년 홍건적의 침입
辛酉 我太祖斬賊王元帥以下百餘級, 擒一人以獻.
1362년 11월 14일(음) 공민왕 10년
1361년 10월 18일(음) 공민왕 10년
이성계가 홍건적을 물리치다
- 고려사 권39 세가39 中
1388 창왕 즉위 및 폐위
목자(木子)가 왕이 된다는 참요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 격퇴
太祖單騎鼓勇, 突進試賊, 賊驍將三人, 並馳直前. 太祖陽北走, 引其轡, 策其馬, 爲駷馬狀, 三將爭追逼之. 太祖忽跋馬右出, 三將未能控而前, 太祖從後射之, 皆應弦而倒. 轉戰, 引至要衝, 左右伏, 俱發合擊, 大破之. 納哈出知不可敵, 收散卒遁去, 獲銀牌,銅印等物以獻, 其餘所獲, 不可勝數, 於是, 東北鄙悉平, 桓祖嘗入朝元, 道過納哈出, 稱道太祖之才. 至是, 納哈出敗歸曰, “李桓祖諱曏日, 言我有才子, 果不誣矣!” 後納哈出遣人通好, 獻馬于王, 且遺鞞鼓一, 良馬一于太祖, 以致禮意, 盖心服之也.
이성계가 나하추 군대의 선봉군을 덕산동 등지에서 섬멸하다
- 고려가 권40 세가40 中
1364년 원나라의 최유 섬멸
恭愍王十三年甲辰。 初諸奇伏誅, 奇皇后有憾於恭愍王。 本國崔濡, 在元爲將作同知, 與群不逞說后, 構王廢之, 立德興君 塔思帖木兒爲王。 發遼陽省兵, 正月, 渡鴨綠江, 王遣贊成事安遇慶等禦之, 敗績退保安州。
공민왕을 폐위키 위해 최유가 요양성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오니 이성계 등이 쳐부수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42번째 기사 中
1380년 아기바투의 왜구 섬멸(황산대첩)
1388년 수문하시중에 임명됨
以崔瑩爲門下侍中, 我太祖 守門下侍中, 李穡 判三司事, 禹玄寶·尹珍·安宗源 門下贊成事, 文達漢·宋光美·安沼 門下評理, 成石璘 政堂文學, 王興 知門下事, 印原寶 判密直司事.
최영과 이성계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1388년 1월 미상(음) 우왕 14년
- 고려사 권137 열전 50 中
1382년 여진인 호바투의 군대 궤멸
1385년 함주에서 왜구 대파
공민왕의 개혁 정치
목표
대외적으로는 반원 자주
대내적으로는 왕권 강화
내용
기철 등의 친원 세력 숙청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관제 복구 및 몽골풍 금지
쌍성총관부 수복 및 요동 지방 공략
정방 폐지 및 전민변정도감 설치
결과 및 한계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 약화
국가 재정 수입 확대
신진 사대부의 정계 진출 확대
왕권 강화
권문세족의 인사권으로 인한 신진 사대부 등용의 제한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국력 소진
자제위 설치와 홍륜 사건
공민왕의 의문스러운 죽음
종래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 가문
권문세족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킴
신진 사대부
지방의 향리 자제들
무신 집권기 아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 세력으로 성장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함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권문세족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려 함
최영 등 권문세족+기씨 가문
명과 정면으로 싸우자고 주장
반원파
이성계 등 신진세력
외교적 교섭 주장
제안이 아닌 통고라는 명나라의 태도 비판
요동백호 왕득명이 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다
- 고려사 권137 열전50 中
1388년 3월 미상(음) 우왕 14년
철령위
- 공민왕의 반원 정책 중 되찾은 철령 이북의 땅
- 명나라는 철령위가 원래 원나라의 땅이었으므로 요동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
- 명의 요구에 응해야할지에 대해 고려 내부에서 갈등 발생
친원파
위화도 회군 1388
5/7
5/21
6/1
5/22
4/18
요동 정벌 출정
중앙세력의 주장이 관철됨
최영의 명으로 이성계 출정
위화도 도착
압록강 건너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이성계는 계속해서 회군을 요청함
마지막 철군 요청
최영 장군에게 요청했지만 거절
회군 결심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시작함
개경 도착
최영군 1000여 명과의 내전에서 승리
우왕과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의 아들을 왕위에 올림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
둘째, 여름에는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모든 군사가 싸우러 간 틈을 타 왜구가 공격해 올 것이다.
넷째, 지급은 덥고 우기라서 활을 붙인 풀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다.
이성계가 요동 공벌의 4불가론을 주장하다
-고려사 권137 권50 中
신진 사대부의
분화
온건 개혁파
이색, 정몽주 등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
비리의 핵심 세력 제거, 대토지 사유 정리 등을 주장
그러나 왕조 질서 파괴나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반대
급진 개혁파
조준, 정도전, 이성계 등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 주장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 축소 주장
佇·得厚, 夜詣太祖邸, 爲門客所執, 得厚自刎死. 囚佇巡軍獄, 與臺諫雜治, 辭連前判書 趙方興, 幷下獄. 佇曰, “邊安烈·李琳·禹玄寶·禹仁烈·王安德·禹洪壽, 共謀迎驪興王, 爲內應.” 於是, 遷禑于江陵, 放昌于江華, 廢爲庶人.
이성계 암살 음모가 탄로나서 우왕을 강릉으로 옮기고 창왕을 폐위시키다
1389년 11월 미상(음) 공양왕 1년
- 고려사 권137 열전50 中
我太祖於回軍時, 與敏修議復立王氏之後, 敏修亦以爲. 然及禑廢, 太祖欲擇立王氏之後, 敏修念李仁任薦拔之恩, 謀立仁任外兄弟李琳女謹妃之子昌, 恐諸將違己意立王氏, 以韓山君李穡爲時名儒, 欲藉其言, 密問於穡. 穡亦欲立昌, 乃曰, “當立前王之子.” 太祖謂敏修曰, “其如回軍時所言何?” 敏修作色曰, “元子之立, 韓山君已定策, 何可違也?” 遂立昌. 敏修請于昌, 召仁任·李崇仁等, 仁任已死矣. 昌以敏修爲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 都統使, 賜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號.
조민수가 위화도 회군 후 창왕을 옹립하다
- 고려사 권126 열전36 中
木+子=李 → 이성계가 왕이 된다는 뜻
수시중과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정치, 군사적 실권을 모두 가짐
우왕의 출신을 문제 삼아 그의 아들인 창왕 또한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명분과 암살 음모로 이듬해 폐위 시킴
군사적 실권 장악 후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 마련
{ 이성계의 실권 장악 }
공양왕의 즉위와 조선의 토대 건설 1389~1391
1389 수문하시중
三年五月 都評議使司上書, 請定給科田法,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과전법 제정을 건의하다
{ 이성계의 관직 }
1390 영삼사사 → 전국의 병권 장악
1391 삼군도총제사
→ 전제개혁 단행:
과전법을 통해 구세력의 경제 기반 박탈
1391년 5월 미상(음) 공양왕 3년
- 고려사 권78 지32 中
과전법의 내용
전·현직 관리에게 수조권 지급
땅 주인이 죽거나 반역할 시 국가에 반환
생산량의 1/10 수취
- 관리, 특히 신진 사대부의 경제 기반을 보장
- 국가의 재정 유지
1392 조선 건국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세력을 얻은 급진 개혁파 중심
고려 왕조에 충성했던 온건 개혁파 제거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
이방원
단심가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도전의 개혁
민본적 통치 규범 마련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 비판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
재상 중심의 정치 주장
조선 건국의 영웅 이성계
고려의 배신자 이성계
타락한 불교를 수습함
부패한 권문세족을 물리침
명과의 전쟁 방지
원으로부터의 독립
발전된 사회 건설
명분의 부족
위화도 회군 4불가론의 부당성
이성계의 조선 건국,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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