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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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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호 박

on 14 Apri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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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of 고조선의 성립

청동기의 사용과 고조선의 성립 우리 나라의 청동기 시대 1.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시기: 기원전 2,000년경-1,500년경
-지역: 한반도와 요동, 만주지역 일대
-청동기의 사용 : 무기, 제사용도구, 장신구

-농경문화 발달
-벼농사 시작, 반달돌칼로 추수,
-민무늬토기 고조선의 건국과 세력범위 1.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우다
-배경 : 청동기의 사용으로 정복전쟁 증가
부족간의 통합 필요성 발생

2. 단군 건국이야기
-선민사상: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움
-농업 중심의 사회: 비 , 바람, 구름을 주관하는 벼슬
-제정일치 사회: 단군(제사장) 왕검(정치지배자)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
-곰부족과 연합: (호랑이 부족은 제외) 1.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다 삼국의 성립과 발전 2.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음하는 삼국 3.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까지 1. 새로워진 신라
*지증왕:
-국호를 신라로 개칭
-왕 칭호 사용
-우산국 정복,
-지방 행정구역 정비, 우경 권장, 순장 폐지

*법흥왕
-율령 반포, 관등정비(17등급), 공복제정
-병부 설치, 상대등(귀족 대표 설치)
-불교 공인: 신라인을 정신적으로 통합
-금관가야 정복
-독자적 연호 사용: 중국과 대등한 의식 1. 국가의 성립과 발전 주거 -강을 낀 완만한 구릉지대(배산임수 지역)
-원형이나 직사각형 모양의 바닥
-점차 지상가옥화 사회 -사유재산 및 청동무기 사용으로
정복전쟁을통해 계급 발생

-권력 발생의 증거 : 고인돌 참성단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제단으로
1946년 사적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의 돌을 다듬어 아무런 접착제 없이 건축했을 정도로 정교하다. 1639년(인조 17년)과 1700년(숙종 26년)에 보강 공사를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단부는 사각형, 상단부는 원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옛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참성단이 위치하고 있는 마니산은 예로부터 하늘과 인연이 깊은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고조선 건국 신화의 우사()와 운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조선의 발전 *기원전 4세기경 철기문화 수용
-요령, 만주, 한반도 북부 차지
-중국의 연과 대등하게 '왕'이라는 칭호 사용

*위만이 중국 변경에서 무리를 이끌고 와
준왕의 왕위를 찬탈함(기원전 194년) 위만조선

위만(衛滿)이 집권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고조선古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後期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위만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개념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王의 외신外臣으로 있었다.

위만 집권시기는 고조선의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外臣)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臨屯)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匈奴)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漢)은 마침내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나타났다. 결국 BC 108년 우거왕(右渠王)이 살해되고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이때 위만조선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이 당시의 부장품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단검·창·도끼들이며, 또한 전차로 추측되는 거여구(車輿具)라는 점에서 이 당시에 고조선사회가 정복전쟁이 잦았고 지배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만 집권기에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한층 진전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갔다. 위만조선의 특징 -철기문화 더욱 발달, 영토확대
-중계무역의 이익독점
: 중국의 한과
남부 여러나라 사이를 연결 법을 지키는 고조선 사람들 1. 고조선의 통치
-왕 아래 상, 대부, 장군 등이 정치와 군사 담당

2. 고조선의 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상
-생명중시
-노동력 중시, 농업 중심사회
-신분제사회, 사유재산 보호, 화폐경제 4. 고조선의 멸망 -한 무제의 침략: 고조선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왕검성 공격(기원전 108년)

-한 군현 설치: 한의 행정구역 설치, 통치함

-풍속의 변화: 고조선 유민의 저항,
법이 60개조 이상으로 증가, 풍속이 각박해짐 철기의 보급과 여러나라의 성장 1. 철기의 사용으로 나타난 변화

-시기: 기원전 5세기경 철기의 용도 -농기구: 생산력 증가
-무기:정복전쟁 활발

-청동기는 주로 제사의식에 쓰이는 도구가 됨 철기문화의 발전 -돌이나 나무로 만든 도구: 더욱 정교, 다양해짐

-청동기: 독자적으로 발전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거푸집)

-중국과의 교류 증거
: 중국화폐(명도전), 붓(한자 사용증거)

-무덤: 널무덤, 독무덤 철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여러 나라 1. 부여
-쑹화강 유역 평야지대에서 발전
-중국과 교류 활발
-5부족 연맹왕국
-중앙,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사출도를 다스림
-왕 : 제가의 합의에 의해 추대
흉년이나 재해시 책임
왕권이 강하지 못한 증거
-순장, 흰옷, 엄격한 법 고구려 -주몽이 건국, 5부족연맹체
-산이 많고 농토 부족: 정복활동 활발
-무예 숭상, 제가회의, 서옥제
-제가회의: 5부의 가(부족장)
-서옥제 옥저와 동예 발전하지 못한 이유
-지형이 불리함
-고구려의 압력: 강력한 권력자 없음
(읍군, 삼로의 세력 약함) 옥저 -비옥한 토지: 농사 잘됨,
-소금,어물등 해산물풍부
-민며느리제
-가족공동며(골장제) 동예 -토지 비옥
-해산물 풍부
-책화:씨족사회의 풍습
-족외혼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삼한 *한반도 남쪽 진이라 불리는 국가 성장
*철기 전래: 위만조선성립 무렵
고조선의 유이민 세력이 전래
*삼한 성립: 마한, 진한, 변한
마한 세력이 가장 큼
*벼농사 발달 *변한: 철이 많이남
-수출, 화폐로 사용

*제정분리
-제사장이 다스리는 소도
-신성한 곳으로 여김
-소도에는 죄인이 들어가도 잡지 못함 1. 국가의 성립과 발전 씨족공동체-규모가 큰 부족-연맹왕국-중앙집권국가

중앙집권국가의 특징
-왕위의 독점적 세습,
-관등제도 정비, 공복제정
-율령반포,
-불교수용
-정복활동 1. 중앙집권국가의 선두주자 고구려

*건국: 부여계통 유이민+졸본지방 토착민
-유이민: 선진 철기문화 소유

*계루부 등 5개부의 부 연합
5부의 귀족이 왕과 함께 정치 주도 주몽설화

주몽의 설화는 3가지 설이 있다.
① 광개토왕 비문()과 《위서()》 <고구려전>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의 딸이었다. 방안에서 이상한 햇빛을 받은 후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주몽이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루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

②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뒤에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설화이다.

③ 《삼국사기》의 <고구려기()>,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주()> 등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①의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 금와왕()이라는 점, 그리고 주몽이 자란 곳과 죄를 지은 곳이 동부여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 다르다. 주몽의 설화는 3가지 설이 있다.
① 광개토왕 비문(碑文)과 《위서(魏書)》 <고구려전>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방안에서 이상한 햇빛을 받은 후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주몽이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巡狩)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奄利水)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루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

②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뒤에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설화이다.

③ 《삼국사기》의 <고구려기(高句麗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주(東明王篇註)> 등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柳花)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①의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 금와왕(金蛙王)이라는 점, 그리고 주몽이 자란 곳과 죄를 지은 곳이 동부여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 다르다. 2.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음하는 삼국 1. 중앙집권국가의 선두 주자 고구려 *건국: 부여계통 유이민+졸본지방 토착민
-유이민: 선진철기문화 소유 2. 계루부 등 5개부 연합
*5부족의 귀족이 왕과 함께 정치 주도

3. 발전과정: 중국, 부여와 항쟁과정서 성장
*1세기 초-국내성 천도(평야지대 진출)
*2세기 태조왕 : 옥저, 동예 정복, 요동 공략
고씨의 왕위 독점 세습

*2세기 고국천왕:
-부족적 5부를 행정적 5부로 개편
-왕위의 부자계승 제도 확립 - 4세기 미천왕 : 낙랑군 축출, 남쪽 진출의 발판 마련

- 4세기 중엽 : 전연과 백제의 침략,
-고국원왕 전사:(백제 근초고왕에게 패배)

- 4세기 소수림왕 : ( 불교수용 , 태학설립, 율령반포 )

- 5세기 영토 확장 : (광개토대 )왕, ( 장수)왕 ④ 통치 : 대대로 이하 10여 관등,
( 제가회의 )에서 중요한 일 결정

⑤ 행정구역 :
수도 - 5부,
지방 - 5방(지방장관 ; 욕살- 행정, 군사업무 모두 담당) 2) 한강 유역에서 발전한 백제, 해상왕국으로 성장하다.
① 건국 : (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 한강유역 토착민

② 한강유역의 유리한 점
: ( 농사 )가 잘되고 (중국 )과 교류에 편리함
중국 군현을 물리치면서 발전

③ 정치 주도 : 왕족( 부여씨 ) + 8성 귀족,
( 정사암 )에서 재상 선출 백제 건국
설화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 혹은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얼마 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주몽이 그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 한강)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기원전 18) 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후회하다가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라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로 하였다. ④ 발전 과정
- 3세기 고이왕 :
한강 유역 차지, 6좌평, 16관등 정비, ( 공복제정 ), ( 율령반포 )

- 4세기 (근초고왕 ): 영토 확대 - ( 고국원왕전사, 마한통합),
가야에 지배권 행사
· ( 요서 ), (산둥), (규슈)진출
· 동진, 왜와 교류
· 왕위의 ( 부자) 계승 제도 확립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 – [송서()]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2군을 빼앗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 3) 신라가 마립간을 맞이하기 까지
① 건국 : 유이민 + 토착민
② 초기
- 박, 석, 김이 돌아가며 왕위 차지,
중요한 일은 ( 화백회의 )에서 결정
( 만장일치 원칙 - 왕권 견제 )

- 고구려의 간섭을 받음
(동남쪽에 치우쳐 중국과 직접 교육에 어려움) ③ 발전 : 4세기 후반 ( )
- 정복 활동,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 확장
- ( 광개토대왕 )의 도움으로 왜군 격퇴
(호우명 그릇, 광개토대왕릉비)

- ( )의 왕위독점 세습
-“ (대군장)”칭호 사용 󰊳 연맹 왕국에 머문 부여와 가야

1) 연맹 왕국 부여의 발전과 멸망

① 환경 : 넓은 영토 차지, 고구려 ․중국과 접경,
대평원지대에 위치 ---- 외적 방어에 불리

② 중국과 교류 : 부여 - 선비족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 고구려와 선비족 견제 목적

③ 멸망 : 고구려와 선비족의 공격
---- 5세기 말에 완전히 소멸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고
돋을새김한 4행 1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째가 되는 415년(장수왕 3)이며,
이 글귀는 '국강() 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용호우'라는 뜻 부여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의 국가.
‘북부여’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2) 철의 왕국 가야
① 환경 : 낙동강 하류 ( 변한 ) 지방,
충적 평야 발달
② 초기 ( 금관)가야- 김해지방 연맹 발전

③ ( 철 ) 풍부 : 화폐처럼 사용,
(낙랑)과 ( 일본) 수출

④ 금관가야 약화
: 신라를 도와 왜군을 격퇴하러 온
(광개토대왕 )의 군대에게 공격을 당함
⇒ 고령의 (대가야 )연맹 발전 황금 알에서 태어난 여섯 왕 - 가야의 건국

가야는
가라, 가량, 가락, 구야, 임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가야를 처음 세운 사람은 수로왕이었습니다.

가야의 건국 설화에는 아홉 명의 추장이 구지가를 부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그리고 나서 추장들은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 있는 금빛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서 처음 머리를 내민 사람이 수로왕이었습니다. 나머지의 알에서도 사람이 나와 임금이 되었습니다.
황금 알에서 태어난 여섯 왕이 6가야를 세웠습니다. 가야는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김해의 금관가야와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그 밖에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가 있었습니다.

6가야 가운데 금관가야가 맹주 역할을 했습니다.
알에서 먼저 나온 수로왕이 금관가야를 세우고(42)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알에서 나온 다섯 명은 나머지 가야를 이끌어나갔습니다. 금관가야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연맹체를 6가야 연맹이라고 부릅니다. 금관가야는 이웃 소국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넓혔고 통치 조직을 정비해 나갔습니다 2. 한강을 놓고 서로 다투다
동북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 1) 영토를 크게 넓힌 광개토 대왕
① 요동, 만주 차지, 백제 공격(한강 북쪽 차지)
② ( 신라 )에 침입한 왜구 격퇴,
금관가야 공격 → 가야의 성장 견제

- 신라에 침입한 ( 왜구 ) 격퇴 증거
:(광개토대왕릉비, 호우명그릇 ) 2) 남쪽으로 향한 장수왕
①(평양 ) 천도(427)
→ 국내성 귀족 세력 약화,
서해안 진출의 터전 마련,
백제와 신라 압박

② 고구려에 대응하여 ( 나제 ) 동맹 체결
③ (한강 )유역 차지 → ( 중원고구려 )비 건립
④ 중국 남북조의 대립을 이용한 외교 정책,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군림 󰊲 국력 회복에 힘쓰는 백제

1) 백제에 닥친 시련
① 장수왕의 공격으로 ( 개로왕 ) 전사
② 한강유역 상실 ⇒ ( 웅진 ) 천도
③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 나제동맹 ) 체결
④ 중국 남조(양나라)와 교류
⑤ 지방에 ( 22담로 )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함. 개로왕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할 기회를 노리면서, 먼저 도림 스님을 첩자로 파견했다. 도림은 자신이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왔다고 속이고 백제로 몰래 들어왔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궁궐에 나아가 고하였다.

“저는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잘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왕님께 바둑의 참 재미를 알려 드리고자 원합니다.”

개로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사람을 시켜 도림을 불러왔다. 개로왕은 좋은 바둑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도림과 수시로 바둑을 함께 두었다. 개로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도림은 개로왕에게 넌지시 말했다.

“대왕이 다스리시는 백제는 사방이 산과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변의 나라들이 쉽게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대왕이 잘 다스리시는 것에 감탄하여 주변의 나라들은 백제를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마땅히 높은 위세와 부유함을 드러내어 다른 국가의 존경을 받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제의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아니하고, 선왕들의 시신은 볼품없는 무덤(假葬)에 묻혀 있습니다. 또 백성들의 집들은 강물이 범람할 때 자주 침수되고 있으니, 이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백제의 강성함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蒸) 성벽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을 비롯한 많은 화려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또 큰 돌을 캐내어서 아버지 비유왕의 무덤을 다시 크게 만들었다. 또 한강 변에 둑을 크게 쌓아 홍수를 막도록 했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벌리다 보니, 백제의 창고는 비어갔다. 백성을 위해 둑을 쌓은 것이 오히려 백성들에게 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사장에 끌려가 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다. 백성들은 굶주리게 되었고, 군사들의 무기와 군량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도미() 열전’에는 백제 개루왕()이 신하인 도미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강제로 범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기지를 발휘해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왕은 신하인 도미에게 죄를 씌우고 두 눈동자를 빼는 벌을 주는 등 전형적인 폭군()다운 행동을 한다. 도미의 아내는 눈이 먼 남편과 다시 만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쳐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개루왕은 백제 4대 임금(128196)이지만, 여러 상황으로 볼 때 21대 개로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2) 다시 한 번 도약을 꿈꾸었던 성왕
① ( 사비)천도, 국호를 ( 남부여 )로 개칭
② 중앙기구 정비 : 22부
③ 행정구역 정비 : 중앙 - 5부, 지방 - 5방
④ 불교장려, 중국과 교류,
( 일본 )에 불경과 불상을 전해줌(노리사치계)

⑤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하였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다시 빼앗김
- 관산성(옥천)싸움에서 전사.

⑥ 삼국의 정세 변화 ; ( 신라 )의 세력 확장
---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대항 2. 삼국통일의 발판을 다진 진흥왕 *황룡사 건축, 화랑도 정비,
사정부 설치→관리의 비리 감찰
*영토확장: 한강 유역 차지, 함흥평야, 대가야 정복
→4개 순수비와 단양적성비 건립
*태왕, 짐이라 칭함,
*연호 사용(개국)
-짐: 황제가 스스로를 부를 때 쓰는 호칭 단양적성비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전쟁에 나가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와 가족 등 주변 인물을 포상하고 적성 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단양 적성비를 세웠다. 4. 연맹왕국 가야의 한계와 멸망 1. 대가야의 성장
-소백산맥 서쪽까지 영토 확대
-중국과 교류
-신라와 결혼 동맹

2. 가야의 약화
-백제와 신라의 압력→불안한 정치상황 계속
-소국들간의 의견대립
3. 멸망: 금관가야 멸망(532), 대가야 멸망(562)
4. 가야의 문화
:일본 고대 문화에 영향을 끼침 3. 신분에 따라 차별받는 사회

󰊱 1. 삼국의 신분제도

1) 신분이란 무엇일까?
① 성립배경 : 국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세력이나
공로의 크기에 따라 성립

② ( 귀족 ) : 관직 독점 외에 사회 경제적으로 각종 특권을 누림
③ ( 천민 ) :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백성이나
범죄자, 채무자 등을 노비로 삼음.

* 신분제 사회 : ( 혈통 )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2) 삼국의 신분제도

① 고구려
- 지배층 ; 왕족인 (고씨)와 5부족 출신 귀족

- 평 민 ; 대부분 (농민 )으로 생산에 종사,
(조세 )와 (노동력) 제공 의무
- 노 비 ; 피정복민 또는 채무를 갚지 못한자 ② 백제
- 지배층 ; 왕족인 ( 부여 )씨와 8성 귀족
- 평민과 노비 ; 고구려와 유사함

③ 신라의 신분제도 : ( 골품제도 )
골품에 따라 개인의 사회 활동과 일상생활 제약
⇒ 지나치게 엄격한 신분제도로
후에 신라 멸망의 원인이 됨.
백제의 대족팔성
백제 귀족 계급의 핵심을 이룬 세력은
'대족팔성(大族八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족팔성'은 왕족(王族)인 부여씨(扶餘氏)를 제외한 8대 귀족 집단으로,
진씨(眞氏 : 진모씨)·해씨(解氏)·사씨(沙氏 : 사택씨)·연씨(燕氏)·협씨(協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白氏) 등입니다.
이들 '대족팔성'에 관한 기록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편찬한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북사(北史)』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8성(八姓) 귀족은 -시대를 달리하여- 왕권(王權)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백제 초기 강력한 세력을 이룬 씨족(氏族)은
진씨(眞氏 : 진모씨)와 해씨(解氏) 세력입니다.
이 두 귀족 집단은 왕족인 부여씨(夫餘氏)와 더불어 혼인 관계로 맺어져 소위 '왕비족(王妃族)'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진씨(眞氏)와 해씨(解氏)는 부여씨(夫餘氏)와 더불어 백제의 왕족(王族)으로 대우받으면서, 백제 초기 가장 큰 귀족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방의 규모)
진골의 방은 길이와 폭이 24척을 넘을 수 없으며,
6두품의 방은 길이와 폭이 21척을 넘을 수 없고,
5두품의 방은 길이와 폭이 18척을 넘어서는 안되며,
4두품 이하 백성의 방은 길이와 폭이 15척을 넘지 말아야 한다. 지바으이 진촌주는 5품과 같으며,
차촌주는 4품과 같다.
-삼국사기- 󰊲 2. 신분에 따른 생활 모습

1) 귀족은 어떻게 살았을까?

① 경제적 기반
- 조상에게 상속 받은 토지, 노비
- 전쟁에 공을 세우거나
관직 복무의 대가로 받은 토지와 노비

② 귀족의 재산 증식
- 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수확의 대부분을 수취함
- 고리대로 농민을 노비로 만들거나 재산을 빼앗음

③ 귀족의 생활
-기와집에서 화려한 생활, 비단옷과 금, 은으로 치장
- 경기와 연회를 즐김 2) 평민과 천민은 어떻게 살았을까?
① 평민
- 토지를 소유한 경우 ;
농업에 종사하며, 수확의 일부를 조세로 바침

- 토지가 없는 경우 ;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땅 주인에게 많은 대가를 지불

③ 천민 : 대부분은 노비,
주인에게 예속되어 자유롭지 못함,
재물로 취급되어 매매 상속됨.


피지배층의 생활 : 잡곡으로 끼니를 때움,
초가집에서 살고 삼베옷 등을 입으며 어려운 생활 ② 농민의 부담
* (조),(용),(조) ; 조세, 역, 공납

- (조) ; 조세는 ( 땅 )에 대한 세금

- (용) ; 역으로 일정한 나이의 남자들이
( 노동력 )을 국가에 제공하는 것
o 요역 ; 성을 쌓거나 저수지 축조에 동원됨
o 군역 ; 훈련을 받고 군사로 참여함

- (조) : 공납으로 그 집의 재산에 따라
( 특산물 )을 납부하는 것
곡물, 삼베, 특산물 등을 제공할 의무 3) 삼국의 경제 발전
1. 생산력 증가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 우경)으로 땅을 깊이 갈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2. 수공업 생산의 증가 :
-각종 장신구, 옷감, 그릇, 철제 농기구,
기와, 벽돌 등을 제작

3. 동시의 성립 ;
-신라 ( 지증왕 )때 금성(경주)에 들어선 시장,
-(동시전) 설치-시장 감독기구

4.조선술, 항해술 발달 ; 중국, 일본과의 무역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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